한겨레가 작심하고 내뱉은 이유가 있었네
한겨레가 작심하고 내뱉은 이유가 있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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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시계에서 직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방귀깨나 뀌어야 하며 목소리는 졸라 커야 한다. 권력에 쪼인트 까이지 않으면서도 권력에 저항하는 흉내도 좀 낼 줄 알아야 하는, 아주 섬세한 터치를 요하는 기술이다. 무엇보다 직설로 돈 좀 긁어모을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 자칭 할 말은 한다는 좆선의 실력은 이 방면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직설이 잘 팔리게 섹시한 표제 뽑는 데 아주 귀신이다. 좆선의 직설 장사는 아예 문예창작의 경지에까지 이른다. “희대의 언론탄압”이 있었다던 참여정부 시절, 놀랍게도, 좆선은 돈 좀 벌었다. 한겨레는 실상, 이런 좆선이 남몰래 졸라 부러웠던 거다. ‘정통 진보정론지’를 자칭하던 한겨레가 왜 <독설> 장사에 뜬금없이 나섰겠는가. 우아한 언어로는 더 이상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비장하게 떠들어봤자 목만 뻐근하다. 그동안 우아 떨다 망하지 않았나(한홍구)” 한겨레는 한걸레가 되어야 장사가 된다. 조선이 좆선이 되어 잘 나가듯 말이다. A급 진보로는 더 이상 돈 되지 않는다. 우석훈을 포함한 자칭 새로운 진보들이 왜 B급 진보, C급 좌파라며 자기비하하겠는가? 마조히스트여서? 겸손해서? 틀렸다. 자기를 슬쩍 낮추면서 독설, 직설, 막말의 면죄부를 얻으려는 거다. 그렇게 해야 눈에 잘 띄고, 장사 잘되거든. 엘레강스한 말빨은 제 명을 다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민주주의’를 낳은 1987년 체제가 성장을 멈춰 이제 민주주의의 발전에 독이 되었듯이, 역시 6월 항쟁을 뿌리로 하는 한겨레는 이제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성장이 멈춘 것을 넘어 아예 퇴화하고 있다. 한겨레는 이제 잘난 파리-독일유학파 진보 엘리트들이 모여 하루종일 그저 궁시렁대는 곳으로 전락했다. 장사 될 리 있나. 그리하여 고경태가 과감히 치고 나가기로 한다. ‘직설’ 장사에 나선 것이다. “작심하고 내뱉는다. 빙빙 돌며 말하지 않는다. 거침없는 직설화법을 택했다. ‘한홍구와 서해성의 직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새로운 대담 코너의 이름이다. 원칙은 두 가지다. 첫째, 구어체로 한다. 둘째, 우아 떨지 않는다. (서해성이 말했듯이) 쉽고 간명하게 말하겠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하면 뭐하나.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한겨레가 독설 하는 것이야 지들 맘이니, 사실 뭐라 할 게 못 된다. 문제는 직설의 대상이 노무현이라는 데 있다. 한겨레들은 “노무현이 죽어야 진보가 산다”고 떠들었다. 근데, 지금 노무현은 없는데도, 직설의 대상은 아직까지 오직 노무현이다. 한겨레는 “쥐를 잡기 위해”서 <직설> 코너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놈현’이라고는 쓰면서도 ‘쥐박이’라고는 하지 못한다. <직설>이 연재된 게 이번이 네 번째인데, 아직까지 이명박에 대한 독설은 전혀 없다. 근데, <직설> 신설에 대한 고경태의 기사를 보면 이 직설이 향하는 곳은, 당연한 듯이, “2000년 이후 지난 10년”이란다. 횡설수설이다. 지난 10년에 대해 직설하면서 쥐를 잡겠다고? 놀고들 있다. 한겨레의 진짜 목적이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노무현에 대한 직설로 장사해 먹겠다는 것!… 작심하고 내뱉는 게 직설이라면서 그 대상은 현재의 가카가 아닌 노무현이다. 이자들, 불과 연재 4회 만에 그 본심을 드러나고 말았다. 허! 뭐라, “‘놈현’ 관 장사”? 그렇다면, 한겨레에게 노무현은 자신들이 독점해야 할 진보적 시민권력을 빼앗아간,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권력이란 말인가? 실은, 이번 선거에서 그게 증명됐다. 아마, 직설 연재를 시작한 5월 중순쯤에는 사태가 이리되리라 전혀 예측 못 했을 거다. 제딴에도 여론조사라는 것을 했을 테니, ‘딴나라 대승, 노풍 미미’를 예상하고 <직설> 연재를 통해, 진보가 완전히 망가진 책임을 또 노무현에게 돌리려 했을 것이다. 근데, 민심이 노무현을 부활시키자, 한겨레에게는 엿 같은 상황이 됐다. 오래도록 연재하면서 지난 10년을 차근차근 씹으려 했는데, 지방선거에서 노무현 정신이 확 살아나자… 놀라자빠진 나머지, 그새를 참지 못하고 화끈하게 터뜨린 것이다. 더 이상 관 장사 하지 말라고? 어라, 정작 관 장사 하는 자는 한겨레 아닌가! 서해성도 마찬가지다. 이 듣보잡을 검색해 봤더니 좀 묘하다. 서해성은 노 대통령 서거 직후 자주 얼굴을 드민다. 추모기고를 했고, 추모시를 썼고 추모대담을 했으며 그를 추도하기 위해 줄을 선 5백만 명을 한껏 추켜세웠다.
“이는 국상이 아니라 민상(民喪)이다. 백성, 서민, 민중, 민초, 시민 그리고 민주가 바로 주인인 장례인 것이다… 대중은 여기서 역사적 충격, 민주주의 위기, 인간적 상처라는 삼중의 참혹함을 동시에 경험해야 했다… 분향소에 이르는 긴 기다림이 새로운 정치적 각성의 학습 과정이자 표현이었음은 물론이다… 서민 풍모와 수더분한 생활어는 대중과 일상적 일체감을 주었지만 보수 언론에서 시작된 비주류를 향한 모멸적 공격에 대중은 쉽게 동의해버리면서 이를 싫어했다. 정작 너무도 자신들과 흡사한 게 이번에는 죄가 되었다… 이 국민 상주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의 양은 시민이 다시 역사의 주체로 서는 위대한 씨앗이자 거름이 되고 있다. 역사에서 보듯 필시 민상이 천하를 바꾸게 될 것이란 뜻이다. (서해성)” ‘국민상주들이 역사의 주체로 서는 위대한 씨앗이자 거름이 되고 있다’고 씨부린 자가, 이번 선서에서 국민들이 그것을 보여주자마자 뭐, 관 장사 그만 하라고? 쉽게 국민 독자들한테 구어체로 직설하겠다면서, 왜 하필 서해성은 그 첫 직설 대상으로 ‘서민 풍모와 수더분한 생활어’를 쓴 전직 대통령, 그리하여 ‘너무도 (국민) 자신들과 흡사한’ 노무현을 택했을까? 단순 실수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것일까? “오늘은, 고종 인산 날 이래 대한문 펄럭거리는 밤, 울음소리가 천하를 이불로 덮는데, 향불을 끄는 자 누구인가. 오늘은, 백범 선생 이래 분한 밤, 창마다 등을 내리니, 빼앗긴 얼굴들 촛불로 돌아오는구나. 오늘은… 담배 한 대 나눠 피우는 밤, 불씨로 나눠 피우는 밤. (서해성)” 이런 시를 쓴 자가 그런 막말을 해댔으니, 어떤 서해성이 진짜 서해성인가? 그는 노빠인가, 노빠를 가장한 진보 장사꾼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시류에 영합하는 양아치에 불과한가? 그러고 보니 서해성의 이력이 좀 독특하다. “그는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으로 통한다. 분야를 넘나드는 박학다식과 아이디어로 문화기획자의 역량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문화기획자? 서해성은 노무현의 죽음을 ‘문화기획적’으로, 즉 직업적으로 접근한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진짜 관 장사 아닌가. 서해성과 한겨레가 과연 가카에게도 직설을 할까? 졸라 궁금하다. 지켜볼 것이다. 직설을 지켜보는 사람들 늘었으니, 아무튼 장사에는 성공한 듯싶다. 기쁘냐?
초모룽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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