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끼」, 불의한 세상을 향해 정의를 묻다
영화 「이끼」, 불의한 세상을 향해 정의를 묻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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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거인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잊을 수 없는 말씀을 많이 남기셨다. 그중에서 1992년 14대 대선 운동 때,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 나라를 만들 것이다”는 말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특히 “정의가 강물처럼 흐른다”는 말은 최근 필자가 봤던 영화 「이끼」와 겹치면서 잔상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아마 지금의 불의(不義)한 세상 탓이 아닐까. 휴가 대신 가족과 함께 본 영화 「이끼」는 의외였다. 미리 만화를 본 아들이 “좀 머리가 아픈 영화”라고 경고했지만, 필자는 시큰둥했다. 애시당초 킬링타임 정도로 생각한 탓이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인간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킬 수 있고, 이를 통해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유목형(허준호 분). 이러한 신념과 행동을 야만적 폭력으로 무산시키려는 형사(정재영 분, 나중에 이장이 됨). 이 영화는 두 사람의 대립을 통해 도덕과 야만,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무덤덤하게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몸을 곧추세우기 시작한 것은 형사가 유목형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할 때부터였다. “당신에게 정의가 있어.” 형사는 그동안 유목형을 좌절시키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공존을 모색한다. 포주, 살인자 등과 같은 범죄자를 모아 이상사회를 함께 건설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건설된 이상촌은 전혀 달랐다. 형사(이장)가 사실상 조직폭력배 두목처럼 행세한다. 한 여자를 폭력으로 지배하고, 여러 명이 차례로 공유한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남의 재산을 빼앗아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도 한다. 이들의 행태는 유목형의 도덕주의를 비웃고 조롱한다. 그리고 모두에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며,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유목형의 비현실적인 도덕주의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렇다고 유목형의 도덕주의가 성공한 것도 아니다. 이장과 마을주민들의 비웃음과 폭력을 견디다 못한 유목형은 이장을 살해키로 한다. 도덕주의도 결국 도덕이라는 명분을 걸고 폭력에 의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목형은 이장 일당에게 도리어 살해당한다. 이후 이장 일당도 구속되는데, 여기에는 윗선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파헤치는 용기있는 검사가 존재한 덕분이다. 그렇다면 형사(혹은 이장)가 말한 ‘정의’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도덕주의는 폭력에 기대는 순간 실패하고 말았다. 정의는 윗선의 방해와 외압을 견디며 진실을 파헤치는 검사에게 있는 것일까. (그러나 작금의 검사가 정치검찰(검새), 뇌물검찰(떡검), 성접대검찰(섹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참 영화스러운 결론이지 않은가)
영화 「이끼」에서 정의를 떠올린 것은 최근 읽은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들 지음, 김영사 출간)라는 책 때문이다. 요즘 지식사회는 이 책에 푹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쉽지 않은 책인데도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공부하지 않는 정치인들도 앞다퉈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휴가 중에 이 책을 들고 가기도 한 모양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휴가 때 읽을 책으로 이 책을 챙겼다’고 했다가 혹시 나중에 책 내용을 묻는 질문에 답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인지 ‘참모들이 추천했다.’라고 수정했다고 한다. 박근혜 의원도 휴가지에 이 책을 갖고 갔다고 한다.
이들은 제각각 자기 입맛대로 이 책을 독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진보적 함의를 충분히 캐취했을까. 이 점이 필자는 의심스럽다. 이명박 대통령이나 박근혜 의원이 이 책을 읽고, 이면의 진보적 함의를 이해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이 책의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들은 자신의 보수적 입장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들은 공동체주의자이다. 개인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공공적 가치를 보존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한 사회의 건강한 존립을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파시즘과 같은 극단적인 공동체주의는 아니다. 미국적 맥락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공동체주의는 진보적 함의를 갖는다. 지금과 같은 약육강식의 사회, 부자만을 위한 사회, 기본적인 게임의 룰을 무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진보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론적으로도 시장의 경쟁과 개인의 자유를 절대시하는 로버트 노직의 ‘최소국가’류의 주장에 대해 공공적 가치를 옹호하는 입장은 매우 진보적이다.
재밌는 사실은 최근 8․15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참 어이없는 일이다. 자신은 반칙과 편법으로 대통령이 됐고, 그 밑에서 장관을 하려면 위장전입, 부동산투기, 군입대 회피 등 무수한 불법·편법리스트 중 적어도 두, 세 가지는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여기에 국민들에게 정치사찰, 폭력, 언론통제 등 온갖 패악을 저지르는 이명박 정부의 사람들은 마치 영화 「이끼」의 이장과 그 일당들과 비슷하다. 그러면서도 공정한 사회를 부르짖는 것을 보면, 이건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개념이 없다고 해야 할지 기가 찰 노릇이다.
어려운 철학 서적인데도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정의에 대한 갈증 때문일 것이다. 이 갈증은 이명박 정부 들어 뚜렷해진 민주주의의 후퇴에서 비롯됐다. 정의는 공동체적 가치를 전제한다. 한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 판단을 가져야 한다. 한 공동체가 보편적으로 공유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그것이 정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도덕과 질서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주관적 정의에 입각해 폭력적으로 시민들의 의사를 가로막았다. 정치인들은 물론 민간인까지 뒷조사하는 반민주적 작태를 서슴지 않는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법은 약자에게만 엄격하고, 강자에겐 한없이 너그럽다. 시장은 소수의 부자만을 위해 봉사한다. 이 같은 민주주의의 후퇴가 시민들에게는 바로 ‘정의의 상실’이라는 감각으로 다가온 것이다. 시민들은 이명박 정부에서 강물처럼 넘쳐나야 할 정의가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고 느끼고 있다. 여기에 참여정부 때 두 눈 부릅뜨고 정부를 감시하던 언론이라는 감시견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지금은 그야말로 정권의 푸들만 꼬리를 흔들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현실이 영화 「이끼」와 「정의란 무엇인가」가 대중에게 어필하는 대목이다. 정의를 상실한 사회에서 어떻게 정의로운 공동체적 가치를 찾을 것이냐를 대중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민이 현재 진보의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명박 대통령마저 제 식대로 말한 그 ‘공정한 사회’, 그리고 ‘공공적 가치’, ‘공동선’, ‘공동체’가 진보의 핵심 키워드가 돼야 한다. 이 가치로부터 약자에 대한 배려(복지)는 물론, 공정한 룰과 사회적 투명성(민주주의), 균형발전(중앙과 지역,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상생발전) 등 수많은 당면과제에 대한 진보적 대안이 창출돼야 한다. 현시기 진보에 이보다 더 적합한 가치와 절실한 당면과제가 있을까. 이것이 진보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을 진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의란 무엇인가」는 결론에서 정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다.” 사익집단화 돼버린 정치집단, 그리고 편법과 반칙이 정상인 양 취급되는 작금의 정치를 넘어서기 위해 공동선으로서의 정치를 되살려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는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라는 꿈을 노래했다. 그 꿈은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후, 생애 마지막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께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 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을 다해야 합니다”
김창호 / 전 국정홍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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