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조선일보형’ 직장인의 특별한 성공기
어느 ‘조선일보형’ 직장인의 특별한 성공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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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신입사원으로 들어와 그를 처음 알게 된 사람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그를 좋아하게 된다. 처음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낯선 생활에 익숙하지 못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서먹할 때 그는 제일 먼저 다가서는 직장 선배다. 신입사원을 자연스럽게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둘만의 술자리를 몇 번 가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떠하니 조심하라거나 신입사원은 모르는 이런저런 부서의 은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면 신입사원은 당연히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특히 그가 부서 내의 계보가 어떻고, 라인이 어떠하니 너 역시도 누구 줄에 서야 앞으로의 직장 생활이 좋다고 충고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은 당연히 그를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신입사원은 그때부터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나 앞으로의 계획 등을 비롯하여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들까지 솔직하게 그 ‘조’ 선배에게 말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다. 그 신입사원이 ‘조’ 선배에게만 단둘이 사적으로 은밀하게 이야기했던 것들이 다른 부서원들에게 서서히 퍼지기 시작한다. 입사하기 전 몇 번의 연애 경험이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그의 집안 내력, 재산 정도, 학교생활 등은 기본이고 각 부서원들에 대한 첫인상부터 지금의 감정까지 모든 것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물론 이런 상황을 신입사원은 전혀 모른다.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 우연히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의외의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면 이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조’ 선배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보면 ‘조’ 선배는 태연히 반문한다. “별것도 아닌 것 같고 왜 그러니?” “…………” 물어본 후배가 오히려 당황한다.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된 것이다. 그렇다. 이런 것들은 사내 기자인 ‘조’ 선배에게는 별것도 아닌 것들이다. 그러나 진짜는 지금부터다. 그 ‘조’ 선배는 그 후배에게 무언가 이야깃거리가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생기면 또다시 주저 없이 그 후배를 불러 자연스럽게 자기 돈 들여 밥 사고 술을 산다. 그러면 아직도 철없는 신입사원은 얼마 전의 일은 금세 잊어버리고 또다시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아! 고마운 사람. 직장인의 그 작은 박봉으로 이렇게까지 나를 위해 자리를 만들다니. 다른 선배들은 무관심하기만 한데 이 선배는 나를 정말 열심히 챙겨 주는구나. 지난 일은 나의 오해야. 어쩌면 정말로 별것도 아닌 일로 내가 정말 좋은 선배를 오해했는지도 몰라. 이렇게 밥 먹고 술 먹으면서 대충 분위기는 ‘조’ 선배의 의도대로 술기운에 회사불만 내지는 개인 고민을 하소연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워낙 타고난 소질에 많이 해본 솜씨라. 같이 생활했던 사람들도 ‘이 양반 기자지. 조심해야지.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하면서도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이 분위기에 취해서 그의 의도대로 넘어간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이런 분야로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누가 먼저 호의를 베풀면서 “정말 인간적으로 믿고 얘기하자. 너 너무 힘들지. 내가 위로해줄게. 괜찮아 말해봐….”라며 마음을 살살 풀어헤치거나 “우리 부서 ‘박 과장’ 그 인간은 너무도 무능해, 어떻게 과장이 된 지 모르겠어.”라고 먼저 분위기를 띄우면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 대화에 휘 말리게 된다. 특히, 마음 약하거나 순진한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 자. 그러면 어느새 분위기 진지해지고 “사실 저 이런 고민 있어요. 우리 부서 XX양을 좋아해요. 그런데 내 맘 몰라줘서 괴로워요.” 이런 말이 나오거나 “우리 ‘박 과장’이 나만 괴롭히고 나쁜 인간이에요. 그놈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너무 싫어요.” 이런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아차차!!! 라고 말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좋아해’, ‘싫어해’, ‘죽일 놈’ 이런 특급, 독점 기사성 단어가 이미 ‘조 기자’의 귓구멍을 강하게 후벼 판 다음이었다. 항상 독점 기사에 목 말라 하는 굶주린 하이에나 ‘조 기자’. 이미 이 굶주린 하이에나의 머릿속에는 내일 아침 부서 뉴스의 헤드라인이 그려진다. “이XX군. XX양 짝사랑 끝에 너무도 괴로워 퇴사 예정.” 결국, 그 다음 날 오후면 졸지에 취재원이 된 그 사원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휴게실에 가면 몇몇이 자기들끼리 수군수군 거리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 급기야 성질 급한 어떤 선배가 살며시 다가와 묻는다. “언제 퇴사해?” “퇴사요. 무슨 퇴사요?” 이때서야 그 취재원 신입 사원은 어렴풋이 알게 된다. 아! 보도됐구나… 언론의 횡포가 이런 거구나… 기사의 사실 왜곡 보도가 이런 거구나. 사실 ‘조 기자’가 이런 식으로 소문을 퍼트려 헤어지게 된 사내커플도 있었다. 심지어는 ‘조 기자’의 지속되는 일면 ‘톱 보도’로 인해 퇴사한 사람도 생겼다. 이런 일을 겪고 난 후 사람들은 자연히 이 선배를 두려워하거나 경계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호의에 숨겨진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런 ‘조 기자’가 어떻게 변함없이 그런 ‘기자’ 역할을 무사히 수행할 수 있을까? 분명 사실 왜곡 허위 이간질로 손해 본 사람들도 많고 그의 상습적 부풀리기를 이미 다들 알 만큼 알고 있는데 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의 ‘기자’ 위치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조 기자’의 끊임없는 사내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직장 동료들의 비겁과 이중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사실 ‘조 기자’가 처음부터 막강한 영향력과 대형 특종을 터트리는 사내 언론은 아니었다. 입사 초기만 해도 그냥 불평불만이 많거나 말 많은 ‘떠버리’ 정도였다. 그러나 남에게 싫은 소리 하기 싫어하는 부서 문화 탓인지 아니면 악착같이 덤벼드는 그의 호전성 때문인지 사람들은 말 많은 그에게 별 탓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위의 예처럼 단순한 가십성 이야기를 풀어 대더니 점점 그 이야기의 주제는 무거워지고 직장 상사에 대한 불만이나 부서 문제점으로 커져 갔다. 어차피 내가 빠진 남 이야기들인지라 사람들은 그의 같은 자리에 없는 남에 대한 성토를 자연스럽게 즐기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했다. 사실 누구나 그런 것은 있을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누군가 신랄하게 성토한다면 성토하는 그 사람에게서 괜한 대리 만족을 느끼거나 그 사람에게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그 어떤 비겁한 본성이 있다. 단지 내가 그 성토의 대상에 들어가는 것이 싫을 뿐 내가 아닌 누군가가 비난의 대상이 된다면 그건 충분히 눈 감아 줄 수 있거나 동조할 수 있다는 이중성이 있다는 씁쓸한 본성. ‘조 기자’는 사람들의 그런 이중성을 적절히 활용해 서서히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갔다. 일반 사원들에게는 상사들을 비난했고 상사들에게는 일반 사원들을 비난했다. ‘조 기자’가 자신의 험담도 남에게 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우선 자신이 직접 듣게 되는 것은 아니니 누구도 ‘조 기자’의 그런 온 동네 ‘지적질’과 ‘험담질’을 제지하지는 못했다. 또한 ‘조 기자’와 함께 자신을 성토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으니 분명 심증은 있으나 확실한 증인이 없는 상황이므로 꼭 집어 말하기는 곤란했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채찍과 당근을 섞었다. 상사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일반 사원들에게 들려주며 중요 정보를 특별히 주는 척 했고 일반 사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상사에게 보고하며 충성심을 보이는 듯 했다. 무척 유치해 보이는 방법이지만 의외로 이 방법은 사람들의 비겁과 맞물려 꽤나 괜찮은 효과를 보였다. 어찌 보면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처럼 그는 그렇게 사람들 속에 점점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으로 자리 잡아 갔다. 그러면서 차츰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거나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가’라는 사람에게는 ‘나’라는 사람이 널 싫어 한데… 반대로 ‘나’라는 사람에게는 ‘가’라는 사람이 널 싫어 한데… 이러다 보니 ‘가’와 ‘나’는 직접적인 갈등 없이 서로를 껄끄러워하는 사이가 됐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연결 고리인 ‘조 기자’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표적인 분열이 후배 사원들과 선배 사원들의 갈등이나 출신 지역, 출신 학교 간의 갈등이었다. ‘조 기자’가 주로 즐긴 갈등 구도가 신구의 세대 간의 갈등이나 출신 지역, 출신 학교에 따른 ‘편 가르기’이었다. 그렇게 차츰 세월이 흘렀다. 그는 늘어난 직장 생활 경력만큼 활동 폭을 넓혔고 이제 그의 타고난 성격 탓인지 그 넓은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열심히 찾아다닌 동호회 활동과 동문 모임, 지역 모임에 그는 회사 최고의 마당발이 되었다. 이제 그의 취재 대상이나 기사는 단지 부서 내의 문제가 아니라 전 부서, 전 사원들까지 포함된 폭넓은 것이었다. 그를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은 예의 그의 시원한 독설과 이런저런 가십성 정보에 그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심약한 직장인들은 자신이 혹시나 급변하는 회사 분위기에 뒤떨어질까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더더욱 그의 별것 아닌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같은 부서의 신입 사원들이 그에게 그러했듯 타 부서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그렇게 털어놓게 되었다. 이제 그는 부서 언론을 넘어 사내 언론이 되었다. 폭넓고 막강한 정보력까지 갖춘 사내 최고의 뒷담화 전문 언론. 이간질과 편 가르기의 원조 언론. 이런 그에 대해 부서에서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는 판단에 따라 그를 견제하고 통제하려 해도 이미 때가 늦어 버렸다. 그는 너무 영향력이 큰 사람으로 커버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가 자신이 악착같이 스스로 나서서 노조의 대의원 자리까지 차지하는 바람에 그 어떤 합법성까지 띄게 되었다. 노조 대의원 자리도 자기가 스스로 추천지를 만들어 들고 사람들을 한 명씩 찾아다니며 상대방이 추천 서명을 할 때까지 끝까지 따라다녔다. 이 정도면 어쩔 수 없이 서명을 해준다.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하지만 그는 분명 부서 노 측의 대표다. 또한 그런 위치를 악용해 노동자를 위해 일하기보다는 회사에 입맛에 맞추어 철저히 아부를 하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그의 행실이 골치는 아프지만 그냥 묵인해 주었다. 오히려 그가 온 부서를 찾아다니며 ‘입방정’을 떠는 것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그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여론몰이를 하는 역할로 적절히 활용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제는 사람들이 그에 눈치를 보거나 그에 힘을 빌리려 했다. 자신들의 경쟁자를 탈락시키기 위해 그를 이용 했다. 의도적으로 경쟁자의 약점을 그에게 흘려 그가 떠벌리고 다니도록 유도했다. 관리자들은 그가 일반사원들을 선동할까 봐 두려워하고 일반 사원들은 그가 관리자에게 자신의 약점을 보고 할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을 ‘조 기자’자신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위치를 최대한 활용해 자신의 잇속(진급, 인사 평가 등…)을 최대한 챙겼다. 이제 어느덧 그는 부서의 막강한 권력자가 되었다. 한때는 그런 그를 견제 하기 위해 부서장은 그를 한직으로 보냈었다. 하지만 그는 격렬히 저항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철저히 아부했다. 원래 늘 여기서는 ‘아’ 하고 저기서는 ‘어’ 하는 그인지라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틈만 나면 자기 부서와 타 부서를 다니며 부서장을 성토했고 또, 그 부서장 앞에서는 또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부와 칭찬을 쏟아 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부서장은 할 수 없이 그를 원위치로 복귀시켰다. (사람들에게 너무 떠벌리고 다녀서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한 아부 때문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두 가지 모두가 이유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습게도 그는 부서장에 항거하고 불의에 맞서 싸운 이력까지 갖게 되었다. ‘할 말은 하는 기자’라고 스스로를 떠벌리고 다녔다. 그러면서 부서 관리자들이 몇 번 바뀌었다. 그때마다 ‘조 기자’는 자신에 입맛에 맞는 관리자를 택했다. 그리고는 그를 일방적으로 추켜세웠다. 늘 그의 칭찬으로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관리자를 성토했다. 라인을 정확히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면 늘 칭찬받는 관리자는 ‘조 기자’에게 이런저런 특혜를 주었다. 인사고과나 모범사원 또는 진급 등으로 그에게 충성의 대가를 나누어 주었다. 그는 더더욱 신나서 온 부서를 다니며 그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불러 댔다. 반대로 그의 그런 행동을 질타하는 관리자는 별별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어 비난했다. 업무 외적인 사생활까지 들추어 냈다. 물론 증명되지 않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비난받는 그를 의심 했다. 그러다가 무슨 일로 자신이 라인을 바꾸거나 자신이 충성을 바쳤던 관리자가 자신을 다소 서운하게 대한다 치면 그는 가차없이 논조를 바꾸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칭찬했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얼굴을 싹 바꾸고 그를 비난 했다. 정말 뻔뻔스러운 일이었다. 그를 익히 아는 사람들이 “당신 어제는 그렇게 말 안 했잖아?”라고 그에게 문제를 제기하면 그는 재빨리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자신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조 기자’가 논조를 바꾸는데 자주 쓰는 수법은 이런 거였다. ‘알고 보니…’, ‘사실은…’, ‘나도 속았어…’, ‘이용당해보니…’ 정말 뻔뻔스런 변명에 불과한데도 의외로 그의 그런 논리는 사람들에게 먹혀들었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누구에게나 그런 비겁함과 이중성이 있어서일까. 사람들은 금세 “아하!… 그렇구나.”라며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이런 ‘조 기자’에게 오직 자신의 이익과 연관된 적이나 동지만 있을 뿐… 결코, 공공의 선은 없었다. 이제 사람들도 ‘조 기자’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속을 만큼 속았기에 그를 경계하고 조심한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건 사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에게 귀 기울이는 이유는 이런 거다. 일단 그의 폭넓은 정보망이다. 친분 관계의 깊이를 떠나 그는 회사의 많은 부분의 사람들에 이야기를 듣고 다닌다. 물론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말을 전하겠지만 그런 사실이 있다는 상황만이라도 알고 싶은 심리에서다. (즉, 누가 어디로 새롭게 회사를 옮겼다면 ‘조 기자’는 이런저런 멋대로의 이유를 덧붙이지만 회사를 옮긴 것 자체는 사실이다. 옮긴 이유는 비록 틀리더라도 옮긴 사실만은 알고 싶은 거다.) 그리고 자신이 그 피해자가 되기 싫어서이다. 그의 마당발을 익히 알기에 괜히 그와 좋지 못한 상황이 되면 그는 주저 없이 온 사방 ‘악소문’을 내고 다닐 것이다. 그것에 대한 사실 여부를 본인이 모두 해명하고 다닐 수는 없다. 해명한다는 사실 자체도 우스운 것이고…. 결국, 졸지에 멀쩡한 사람 바보 되는 거다. (원래 언론의 오보란 것이 그런 것 아닌가.)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상대편들의 의사가 궁금해서다. 직접 말하기가 껄끄럽거나 어려울 경우 ‘조 기자’를 통해 상대편의 이야기를 듣는다. 스스로의 표현으로는 폭넓은 의견을 듣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물론 ‘조 기자’도 안 믿고 상대편도 싫지만 그래도 궁금해서다. 어떤 이는 ‘조 기자’를 잘 이용 할 필요가 있다고도 한다. 온 사방 소문이 재빨리 퍼지는 그를 잘 이용하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말한다. 실제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조 기자’만큼 또는 ‘조 기자’ 같은 실력자들이다. 그리고 또 누구는 말한다. ‘조 기자’가 사실을 말했다고…. 잘못한 건 맞지 않냐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조 기자’의 기회주의와 아부와 유언비어에는 관대하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비겁과 이중성과 관대함이 ‘조 기자’를 이만큼 크게 했고 또 ‘조 기자’의 피해자들을 양산해 냈다고 생각한다. ‘조 기자’가 정말 자신의 말처럼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다. 그가 아무 말 하지 않을 때 부서가 평화로운 이제 더 이상 ‘할 말조차도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 어느 사회나 어느 정도의 갈등과 불협화음은 있지만 그 회사가 ‘조 기자’로 인해 갈등이 매우 심화 된 것은 사실이다. 작은 일도 부풀려졌고 없던 일도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서로를 미워했고 서로를 원망했다. 때로는 멋모르고 그런 말을 전해준 ‘조 기자’에게 고마워했다. 하지만 이제 그 회사와 조직원들은 ‘조 기자’가 설쳐댄 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부서원 간의 신구의 대립과 지역의 대립, 그리고 깊은 감정의 골까지…. 때로는 내 편이 되어 상대편을 비난한 것 같지만 결국엔 알고 보니 그것이 단지 ‘조 기자’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결국은 ‘조 기자’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것. 그에 대한 모든 뒷수습은 결국 자신들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 조직원 모두를 농간한 ‘조 기자’는 어느덧 커다란 권력으로 서 있고 그 밑에서 아직도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며 서로를 원망하는 사람들. 승자는 단지 ‘조 기자’뿐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가 피해자가 된 이 기막힌 상황. 이런 ‘조 기자’에게서 ‘조폭 신문’, ‘낡은 신문’으로 불리 우는 ‘조중동’을 떠올린다면 잘못된 생각일까. 오늘도 그 회사 사람들은 출근하면 ‘조선일보’를 본다. 그리고 ‘조 기자’에게 다른 부서원들의 동향을 물어본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조 기자’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공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조 기자’가 얼마나 자신들을 농락했는지. 그러나 끝까지 그 사실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은 오늘도 ‘조선일보’를 보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아주 열심히 숙독을 하며 아침을 시작한다. 그 시간 ‘조 기자’는 또다시 휴게실에서 몇몇 사람들에게 조간 뉴스로 신나게 떠벌린다. “어젯밤. 그들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조 기자’가 그들에게 가르쳐 준 오래된 버릇처럼 변함없이 서로를 욕하고 있다. 물론 이런 ‘조 기자’의 폐해를 알게 된 몇몇 사람들이 그를 무시하고 그를 견제하기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떠들고 있다. 자신이 곧 진실이고 여론이라며 막무가내로 떠들고 있다. 자신이 이 부서를 이끌고 있다고 열심히 착각하며 떠들고 있다. 이제 그만, 이런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나약함을 자극하여 기생하는 이런 더러운 언론을 버려야 한다. 잘못됨을 알지만 혹시나 하는 심약한 마음에 그 유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스스로들의 이중성을 버려야 한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모두를 피해자로 만드는 간악한 비겁함에 더 이상의 관대함을 버려야 한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 이런 더러운 행태가 더 이상 반복될 수 없도록 이런 낡은 사람, 낡은 신문은 이제 정말 딱 끊어 버려야 한다.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될 뿐이고 유일한 승리자는 오직 그들, 악덕 언론들뿐이다. 묻는다. 과연 이 나라의 수구언론이 과연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단 한 가지라도, 단 1%로라도 국민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기여 했는가. 단연코 전혀 없다. 단지 지배 권력을 공고히 하고 국민들 피 빨기에 앞장섰을 뿐이다. 과거 독재시대는 독재의 앞잡이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뛰어넘어 오히려 주도적으로 이 사회를 자기들 잇속대로만 길들이고 통제하고 있다. 아직도 이것을 모르고 그래도 수구언론이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니, 정치면만 빼면 괜찮다느니, 그래도 정보는 빠르다느니, 양쪽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일부러 양쪽 신문 모두를 본다느니 하는 것도 사실은 비겁과 무지의 결과일 뿐이다. ‘양쪽 균형’을 말하는 그 속마음에는 수구언론 같은 더러운 욕망과 야비한 출세욕이 당신 마음속에 있기에 그렇게 포장할 뿐이다. 수구언론을 보는 논리 중에 ‘조중동’을 안 보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정보에 뒤떨어진다고 하는데 근 10년 동안 수구언론 기사를 거의 본 적 없지만 그래도 지금껏 잘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조중동’ 그렇게 열독하신 그분들 중에 부자 되고 잘살게 된 분들 별로 본 적 없다. (최소한 내가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니 별말도 안 되는 핑계로 수구언론 보며 ‘세상이 이래서야’ 하며 혀차다가 그들의 교묘한 논리에 이용당해 제 목 조르기 하지 말고 정신들 좀 차리시라.) 모르는 사람은 모르니까 그렇더라도 아는 사람, 깨어 있다고 하는 당신들이라도 제발 그따위 위선적인 말은 집어치우고 쓰레기 같은 신문 따위는 그냥 무시하라고 말해야 한다. 아무리 떠들어도 듣는 사람이 없으면 제풀에 지쳐 그만두듯 아무리 말 많은 신문이라도 구독자가 없는 신문은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래서 사실 따지고 보면 수구언론이 아직도 기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 마음속에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그런 비겁과 욕망들 때문인 것이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진중한과 진지함이 없는 가볍기만 한 이 사회는 모두가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결국 모두가 실패한 사회가 될 것이다. 이 사회가 오직 물질적 성공과 자극적 욕망에만 열광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의 참가치와 더불어 함께 사는 가치도 관심 받는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래야 이 사회와 당신과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강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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