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정부 안에 X맨 있다?
MB 정부 안에 X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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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교수께서 MB 정부가 ‘공정사회’를 국정운영의 기조로 삼겠다고 한 것에 대해 조소하면서 한 말이다. 부자감세, 토목경제 등 강자 중심의 정부운영을 거침없이 해오던 MB가 갑자기 ‘공정사회’를 떠들고 있으니, 좋게 보면 무식하거나 정신 나간 사람이고, 나쁘게 보면 교활한 사람일 것이라는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어제까지 하던 일을 팽개치고(정확히 말하면 예전 그대로 하면서) 갑자기 ‘공정, 공정!’을 외치고 다닐 수 있는가. 명색이 일국의 대통령인데, 마치 영화 ‘부용진’에서 시대착오적으로 ‘혁명이오!’만을 외치고 다니는 광인(狂人)이 오버랩될 정도다. 벌써 한나라당 내부에서 ‘공정사회가 MB 정부의 굴레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MB의 정치적 기반이 불공정사회를 기반으로 성장해온 집단과 세력이라고 한다면, ‘공정사회’가 자기 기반을 무너뜨려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된다고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유탄이 튀었다. 유탄의 첫 희생자는 외교부였다. 아마 ‘공정사회’가 아니었다면 외교부는 ‘아버지에 이어 딸도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다는데…’라고 항변했을지 모른다. 외교부는 아직도 ‘그놈의 공정사회 때문에 당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필자가 국정홍보처장으로 일하면서 정부가 하는 일에 가장 비협조적인 부서가 바로 외교부였다. 외교부의 잔머리는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구체적인 사례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참여정부 시절 외국에 나가 있는 수많은 한국 대사들의 인터뷰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조선일보에만 유독 자주 실렸다. 참여정부의 고민이나 공직자로서의 책무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 정부가 들어오든 상관없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기득권 재생산구조는 정부정책을 무시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사실 쇠고기 수입도 MB가 외교부에게 당한 것으로 보면 정확할 것이다). 이런 외교부가 자식들 좀 특채했다고 지금 폭탄을 맞고 있다. 뭐 예전에는 훈훈한 감동기사로 다뤄졌던 일이다. 과거에는 ‘아버지에 이어 아들도 국가를 위해 외교관으로 희생(?)하고 있다’는 등의 기사가 적지 않았다. 과거에는 휴먼스토리였던 것이 공분(公憤)의 대상으로 변해버렸다. 외교부 출입기자들이 갑자기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걸까. 아직 밝힐 수는 없지만, 필자는 어떤 경로를 통해 MB가 ‘공정사회’를 자신의 임기 후반기 아젠다로 선택하게 됐는지 대충 알고 있다(물론 이 아젠다도 오래 못 갈 가능성이 있지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필자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전두환 정권이 ‘정의사회’를 정치적 슬로건으로 사용함으로써 ‘정의’라는 용어가 어떻게 굴절됐는지 기억났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http://www.changhorg.net/) ‘공정성’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매우 진보적 가치를 갖고 있다. 해방 이후 산업화과정은 기본적으로 불공정 사회를 조건으로 이뤄져 왔고, 불공정 위에 또 다른 불공정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이었다. 수도권 중심의 발전전략,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을 전제로 한 산업발전, 재벌중심의 발전전략은 물론 교육, 부동산, 금융, 법률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불공정한 게임이 이뤄졌다. 물론 그것이 우리 사회의 파이를 키움으로써 삶의 질이 전체적으로 상승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불공정도 확대, 심화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공정성만큼 중요한 진보적 가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기회균등은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핵심문제이고, 이를 위한 가치와 원칙으로 공정성은 현재 진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안타까운 것은, 이 진보적 가치(담론)가 가장 반동적인 MB에 의해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학생들이 피 흘려 지키려 했던 ‘정의사회’를 전두환 정권이 전용해 그 가치를 훼손한 것과 같다. 한심한 것은 공부하지 않는 야권의 지도자들이다. 지금 대통령 후보급이라고 자처하는 정치인들 중 나름대로 우리 사회를 제대로 규정하고, 진일보시킬 수 있는 아젠다를 갖고 있는 분을 발견할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동서화합, 남북평화, 대중경제, 인권민주주의 등과 같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아젠다가 있었고, 이를 통해 국민은 김대중이라는 정치지도자를 인식하고 신뢰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 사람사는 세상, 특권폐지 등을 아젠다로 제시하고, 국민의 지지를 모아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야권의 지도자를 보면, 그런 아젠다가 없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공정사회’와 같은 의제를 MB에게 빼앗겨 버렸다. ‘4대강개발 반대’, ‘미디어법 반대’ 뒤에 숨어 우리 사회의 비전에 대한 고민을 게을리했다. 과거에는 모든 것이 민주-반민주 구도로 용해돼 별다른 대안담론이 필요 없었다. 그저 민주진영에 서는 용기만 있으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486이든 누구든 대안없는 세력은 존재의미가 없다. 문제는 MB가 이런 대안담론(진정성과 실천가능성은 매우 낮지만)을 만들어 내는 데 앞서고 있다는 점이다. 공정성이란 기회의 균등한 배분을 의미한다. 공정성이란 정치영역뿐 아니라, 경제, 사회영역에서 불편부당한 민주적 절차라고 할 수 있다. 특권으로 이익을 취득하거나, 부당하게 타인의 기회를 빼지 않는 것이 공정성의 최소조건일 테고, 조금 적극적으로는 약자들에게 사회적 재화를 조금 더 얹어주는 것까지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공정성은 ‘정의’의 하위 개념일 뿐이다. 민주적 절차와 기회의 균등한 배분은 한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한 방법일 뿐, 한 사회의 가치를 궁극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마이클 샌들은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에서 ‘정의란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가치판단의 문제’라고 정의한다. 공정한 이익의 배분을 넘어 한 사회가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가치판단을 의미하는 더 포괄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가령 장애인 여성을 여러 명의 남성이 성폭행했다고 가정해보자.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성폭행을 통해 남성들의 쾌락은 증가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정의에 어긋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면 누군가의 희생쯤은 무시할 수 있다는 공리주의적 관점의 치명적 약점이다. 정의는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지켜야 할 어떤 가치와 관련이 있다. 친일청산, 남북의 평화정착, 환경보호 등이 그러하다. 아동들의 먹을 권리와 구타당하지 않을 권리 등도 그렇다. 때론 절차는 공정하지만, 결과가 정의롭지 못한 경우도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경쟁은 현행법의 범위에서 절차에 하자가 없다고 하더라도, 애초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는 매우 불공정하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적 장치, 분배정의를 위한 제도 등이 필요한 것이다. 존 롤즈도 「정의론」에서 ‘최소수혜자 우선의 원칙’을 정의로운 사회의 기본조건 중 하나로 제시하지 않았는가. 결국 정의란 한 사회가 유지되고 진보하가 위해 필요한 가치판단의 체계로 요약할 수 있다. 절차적 공정성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다. 그리고 복지와 평화 등의 개념은 바로 한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진보하기 위한 가치판단인 ‘정의로운 사회’의 핵심 구성요소들이다. 불행히도 전두환 정권의 ‘정의사회’ 슬로건 때문에 정의의 개념 자체가 오염돼 버렸다. 전두환 정권의 정의사회는 조폭들이 어깨에 새긴 ‘바르게 살자’라는 문구처럼,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어(死語)가 돼 버렸다. 따라서 이제 굴곡진 한국사에서 우스꽝스럽게 변질돼 버린 정의라는 단어의 명예회복을 시작해야 한다. 정의에 대한 진보적 의미부여를 위한 개념투쟁이 필요하다. 지금 진보개혁세력이 지향해야 할 사회, 그리고 우리가 다음 대선에서 담론투쟁의 중심에 세워야 할 것이 다름 아닌 ‘정의로운 사회’가 아닐까. 공정한 사회, 균형발전, 보편적 복지, 평화공존 등은 바로 정의의 하위 범주인 정책의제들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야권의 정치지도자들이 진보를 얘기하면서 주장하는 수많은 의제들도 결국 이들 정책의제의 일부에 해당할 뿐이다. MB가 오염시킨 공정사회의 허구를 폭로하고, 사회의 총체적 가치를 진보적으로 재구조화하기 위해 ‘정의로운 사회’를 정치운동의 중심에 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진보도 기존의 경제 및 노동정책이나 남북관계를 넘어 새로운 사회적 정당성에 기초한 사회상을 제시하고 시민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진보가 주장하는 수많은 정책의제들이 정의에 의해 뒷받침돼야 하고, 보수의 의제였던 정의를 진보의 것으로 되찾아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보개혁세력은 정당성을 확보하기도, 편협한 도그마에서 벗어나기도 힘들 것이다. 군사정권의 사생아가 돼 버린 정의를 진보개혁세력의 친자(親子)로 확인하는 개념투쟁 없이 진보개혁세력의 승리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김창호 / 전 국정홍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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