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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권력은 누가 세습시킬까?

순수한 남자 2010. 10. 19. 10:04

북한 권력은 누가 세습시킬까?
번호 208244  글쓴이 개곰 (raccoon)  조회 850  누리 312 (317-5, 25:34:0)  등록일 2010-10-18 23:45
대문 24


북한 권력은 누가 세습시킬까?
(서프라이즈 / 개곰 / 2010-10-18)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참패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까지 포로가 되어 제2제국이 무너지면서 들어선 제3공화국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프랑스 국민은 왕당파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급진공화파는 38석, 온건공화파는 112석, 자유주의파는 72석이었다. 공화파는 모두 222석을 얻었다. 반면에 왕당파는 모두 416석을 얻었다. 프랑스는 공화정으로 바뀌었지만 왕당파 의원은 3분의 2나 되었다.

같은 왕당파라도 누구를 왕으로 미느냐에 따라서 파가 갈렸다. 보나파르트파는 나폴레옹의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왕당파였다.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보나파르트파는 겨우 20석을 얻는 데 그쳤지만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정통 왕조제를 왕보다 더 열렬하게 추종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1830년 혁명으로 퇴위한 루이 10세의 아들 앙리 5세를 왕으로 밀던 적통파는 182석이었다. 1830년 혁명 당시 온건 군주를 선호하는 의회를 등에 업고 조카(앙리 5세)로부터 사실상 왕위를 찬탈하여 1830년부터 또다시 혁명이 일어나 제2공화국이 들어선 1848년까지 프랑스 국왕으로 군림한 루이필리프의 후손을 왕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온건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던 오를레앙파는 무려 214석을 얻었다.

의원들은 제3공화국을 왕조로 복귀하기 위한 과도기적 체제로 인식했다. 적통파와 오를레앙파의 타협으로 왕으로 추대되었음에도 국기를 프랑스혁명으로 만들어진 삼색기가 아니라 백합기로 되돌려야 한다는 조건을 내거는 등 러시아나 프로이센 수준의 왕권을 요구하면서 앙리 5세가 버티지만 않았어도 프랑스는 금세 또다시 왕정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세운 프랑스 국민이었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본능적으로 군주의 강력한 지도력에 기대려는 본능을 번번이 보여주었다.

프랑스혁명이 낳은 풍운아 나폴레옹이 1804년 제1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도 유럽 열강들과 혼자서 맞서던 프랑스의 위태로운 상황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피 흘려 세운 공화정을 버리고 다시 제정으로 돌아가려는 조국의 현실에서 느끼는 착잡함 때문이었는지 프랑스 국민의 70%가 기권했지만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에 찬성표를 던진 프랑스인은 357만 2329명이었다. 반대표를 던진 프랑스인은 겨우 2569명이었다.

1848년 혁명으로 들어선 제3공화국에서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558만 7759표를 얻어 75%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뽑힌 것도, 대통령 5년 단임제 개정이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자 1851년 12월 2일 나폴레옹 1세의 황제 즉위 47주년과 아우스터를리츠 전투 승리 46주년에 맞추어 그가 스스로를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일방적으로 선언했을 때 프랑스 국민이 국민투표에서 이를 압도적으로 추인해준 것도 나폴레옹이라는 강력한 지도자의 후손에게 기대려는 심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871년 독일에 패하면서 들어선 제3공화국이 1940년에 역시 독일에게 점령당하면서 무너진 뒤, 1946년에 들어선 제4공화국이 좌우 대립으로 인한 국론 분열 속에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북아프리카 등지의 식민지를 하나 둘 잃어갈 때, 강력한 대통령제를 요구한 자신의 헌법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946년 일찌감치 낙향하여 자서전 집필에 몰두해온 프랑스 항독 투쟁의 영웅 드골의 정계 복귀를 1956년 알제리 위기 때 프랑스 군부와 다수의 국민이 기원했고 결국 대통령이 강력한 지도력을 갖는 제5공화국이 1958년 드골의 정계 복귀와 함께 들어선 것도 나라가 흔들릴 때 목숨을 걸고 프랑스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낸 드골이라는 검증된 지도자에 대한 프랑스인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정부의 미온적인 지원에 불만을 품고 알제리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드골 만세를 외친 프랑스 장군들은 드골이 철권을 휘두르는 독재자가 되어서라도 식민지를 사수하기 원했을 테지만 드골이 정계로 복귀한 것은 지도자가 강력한 힘을 갖는 안정된 새 헌법의 반석 위에 프랑스를 올려놓기 위해서였지 무리하게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결국 프랑스 군인들은 반감을 품고 드골 암살까지 시도한다. 드골은 적국에게 점령당한 조국은 무력 항쟁을 통해서 반드시 해방시켜야 한다고 믿었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스 헌법을 수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골은 자신들의 식민지 기득권 유지를 위해 헌법을 유린하는 군 장성들을 끌어안을 수 없었다.

드골을 추종하는 우익 세력은 드골을 왕처럼 떠받들었고 또 왕 노릇을 해주기를 기대했을 테지만 드골은 초헌법적으로 군림할 마음이 없었다. 프랑스는 비록 중심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2차대전 당시처럼 외국 군대에 점령당한 상황이 아니었다. 알제리라는 식민지를 잃는다고 해서 프랑스가 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알제리인이 프랑스를 침공하려고 벼르는 것도 아니었다. 프랑스는 여유 있는 나라였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부터 침공 위협을 받는 나라가 아니었다.

▲ 북한 노동당 창건 65주년을 맞아 10일 평양에서 열린 대규모 열병식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삼남인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에서 김정일의 후계자로 아들 김정은이 사실상 결정된 것을 두고 여기저기서 비판이 거세다. 심지어 진보지를 자처하는 경향신문까지도 북한의 권력 세습을 비판하지 않는 세력은 진보를 입에 담을 자격이 없다면서 통일의 한 축인 상대의 체제를 존중하는 뜻에서 논평을 삼가하겠다는 민주노동당을 툭하면 빨갱이 타령을 하면서 마녀 사냥을 벌이던 한나라당 뺨치게 몰아세우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세습이 아니라 검증된 지도력과 신뢰에 있다는 것을 경향신문 같은 한국의 유럽 지향 진보들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유럽 공화정의 종주국 프랑스의 역사는 보여준다. 프랑스는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들어선 1792년부터 제2제정이 무너지는 1871년까지 8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공화정과 왕정을 오락가락했다. 프랑스인이 공화정을 세운 것은 왕의 폭정에 학을 뗐기 때문이었지만 다수의 프랑스 국민은 입헌군주제를 원했다. 그리고 나라를 위기에서 지켜줄 것 같은 지도자라고 판단되면 나폴레옹 1세에서 볼 수 있듯이 스스로 황제를 선언해도 추인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삼촌 덕분에 대통령으로 뽑힌 조카가 하루아침에 황제라고 우겨도 눈감아주었다. 나폴레옹은 유럽 열강의 공세 앞에서 풍전등화의 운명에 있던 프랑스를 지켜낸 검증된 지도자이고 나폴레옹의 이름과 피를 물려받은 후손도 그래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북쪽 사람들에게 김일성은 검증된 지도자다. 이광수 같은 심약한 작가가 일본 제국의 거대한 벽 앞에서 민족개조론이라는 자기부정의 논리를 설파할 때, 이승만 같은 독불장군이 씨알도 안 먹히는 강대국 설득 외교론을 내걸면서 영어로 폼을 잡을 때, 김일성은 자기 민족의 저력을 믿고 풍찬노숙하면서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끝까지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 북한이 90년대 초반 고난의 행군을 걸으면서 굶주려야 했던 것은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면서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소련 공산주의가 무너진 것은 미국의 냉전 세력이 공산주의 체제가 인민 복지에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자하지 못하도록 끝없이 무기 경쟁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정직하게 번 돈으로 무기 산업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기축 통화 달러를 물 쓰듯 찍어내면서 부당한 방식으로 벌인 경쟁이었다.

드골의 프랑스 국민과 김일성의 조선 인민이 느끼는 공포는 차원이 다르다. 드골에게 기댄 프랑스 국민은 싸움에 져서 식민지 알제리를 잃더라도 자기들이 사는 프랑스 본토는 멀쩡했다. 김일성에게 기댄 조선 인민은 싸움에 질 경우 다시 식민지 하등민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두려움의 차원이 다르다. 더욱이 북한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나라로부터 60년 동안 제재를 받고 핵 공격의 위협에 24시간 떨어야 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내건 명분은 만약 선거를 통해 허약한 인물이 공화정을 맡게 되면 폭정을 일삼던 부르봉 왕가가 다시 프랑스를 말아먹는다는 논리였다. 더 나쁜 세습을 대대손손 막기 위해서는 나처럼 검증된 지도자가 계속 세습을 해야 한다는 나폴레옹의 논리를 뿌리치지 못할 만큼 프랑스 국민은 반혁명 세력의 복귀를 두려워했다. 반혁명 세력에게 짓밟혀 다시 노예로 살아가는 운명을 두려워했다. 나폴레옹의 세습을 정당화시킨 것은 부를 대대손손 독점해온 소수의 세습 왕조 세력에게 다시 권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찰스 다윈은 인간을 움직이는 기본적 감정을 여섯 가지로 보았다. 행복, 슬픔, 분노, 혐오, 놀람, 공포였다. 이 중에서 사람에게 가장 먼저 생겨났고 또 사람에게 아직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감정은 뭐니뭐니해도 공포라고 현대의 진화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원시 종교는 공포에서 나왔다. 흔히 다신교가 발전한 것이 일신교라고 말하지만 모든 다신교의 뿌리에는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문자 공포라는 단일한 공포가 빚어낸 일신교가 있었다. 고상한 사람들은 자유 같은 추상적 가치가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 동력인 것처럼 말하지만 자유는 인간을 움직이는 동심원들의 바깥쪽 언저리에 있다. 인간을 움직이는 동심원의 중심에 있는 것은 나의 안전이, 내 가족의 안전이, 내 나라의 안전이 언제 남의 손에 유린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다. 그리고 외부의 위협이 지속되는 한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검증된 지도자의 혈통을 중심으로 뭉치려는 인간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북쪽 사람들은 어쩌면 누구보다도 자유를 갈구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갈구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공동체의 자유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공동체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타국으로부터 핵 공격을 당할까 봐 24시간 불안에 떨지 않고도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자기가 살아가는 공동체가 위협을 받지 않아야만 그 속에서 개인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주민의 인권을 들먹이는 미국이 바라는 것은 북한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북한이라는 공동체의 굴종이다. 그래서 휴전협정을 정전협정으로 바꾸고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만들자는 북쪽의 제안을 번번이 뿌리친다. 끝없는 도발 위협으로 북한이 자원을 군수 산업에 집중시켜서 인민의 불만을 폭발시켜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소련과 동유럽에서 먹혀든 미국의 전략이다.

북한은 6·25전쟁을 제외하고는 타국과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나라다. 6·25전쟁은 동족 상쟁의 비극이었지만 그것은 어느 나라나 한두 번 이상은 겪은 내전이었다. 미국의 남북전쟁도 내전이었고 영국의 청교도전쟁도 내전이었다. 북한은 타국을 침공한 적이 없다. 타국을 번번이 침공하면서 다른 공동체의 자유를 허물어뜨린 제국주의 국가들이 타국을 단 한 번도 침공한 적이 없으며 식민지의 상흔을 겪은 나라의 자기방어적 권력 승계를 비웃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의 자유에서 나온다. 개인이 누리는 자유는 공동체가 누리는 자유에 정비례한다. 북한이라는 공동체의 자유를 끝없이 위협하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인권을 염려하는 것은 위선이다. 북한의 권력을 세습시키는 것은 북한이라는 공동체를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세력이다. 북의 체제를 세습으로 몰아가는 주범은 물질주의에 맞서는 마지막 보루를 무너뜨려 다수가 소수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본 세습의 천국을 관철하려는 세력이다. 세습에 세습으로 맞서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나의 사익을 지키는 세습에 우리의 공익을 지키는 세습으로 맞서는 것은 더더욱 잘못이 아니다.

 

개곰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08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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