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래서 이해찬이다 |
번호 102566 글쓴이 광주의아들 (loeil) 조회 222 누리 186 (186/0) 등록일 2007-9-22 11:41 | 대문 4 톡톡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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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이 글에 물타기를 하려고 알바들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바꿔 다시 올립니다.
어느덧 나이가 불혹이 다가오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늘어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1988년 올림픽은 지은 지 20년이 넘어 낡아가는 잠실 경기장처럼 역사 속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2002 월드컵조차 청소년들에게는 점차 어린 시절 어렴풋한 기억 속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아마 다음 월드컵이 열릴 때쯤이면, 2002년에 있었던 거리의 붉은 물결은 청소년들에게 어른들이 하는 알듯 모를 듯한 역사 속 이야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언젠가 1987년 6월 항쟁이 스무돌이 되었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벌써 20년이 되었구나! 20년은 그만큼 성숙한 역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거꾸로 이제는 그 시절의 일이 케케묵은 옛날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광주는 그보다 더 오랜 30년 가까운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20대는 광주의 일을, 386세대가 6.25를 기억하듯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개인적 체험에 의한 기억이 아닌, 사회의 집단 기억(다시 말하면 역사)으로서 광주를 알고 있는 것이다.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는 나에게 올림픽의 해가 아니라 청문회의 해로 기억이 된다. 6월항쟁에 이은 정권교체의 열망이 무너지고 나서, 민주개혁진영의 열망은 청문회로 집중이 되었다. 1988년 4월 26일에 열렸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헌정 사상 최초의,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과도 같았던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졌다.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5공비리 청문회와 광주청문회였다. 5공비리 청문회에서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의 활약은 유명하였다. 그 때 사람들은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 당시만 해도 불과 15년 뒤에 그게 현실화되는 혁명이 이루어질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랬지만 당시 노무현은 87년 대선 실패 이후에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한가닥 위안을 주는 국회의원이었다. 기억이 안 난다와 잘 모르겠다는 말로 국민들을 열 받게 하던 5공비리 당사자들이 노무현 의원의 논리적인 추궁에 쩔쩔 매는 것을 보고 통쾌해 하지 않던 사람들이 없었다. 그 때의 솔직한 심정으로 아쉬운 것이 있었으니 그런 너무나 좋은 노무현의원이 YS의 통일민주당 소속이었다는 것이었다. DJ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그런 노무현이 좋으면서도 너무나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DJ 곁에 있던 국회의원들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무식한지, 도대체 질문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서 물어보는 국회의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도 정치인 중에서 가장 지적이라던 DJ의 곁에 있는 국회의원들이 하는 말들은 지지자인 내가 봐도 너무 한심했다. 그래서 나는 노무현 보다는 도대체 DJ 곁에 쓸 만한 국회의원 찾느라 청문회 생중계를 볼 정도였다. 얼마나 DJ 광신도로서 안타까웠으면 그랬을까? 아마도 DJ도 아쉬웠었나 보다. 청문회 직후 노무현을 의원회관에서 만나자, DJ는 노무현에게 “잘 했어요, 참 잘 했어요”라고 말하면서 두 손을 꼭 잡았다고 한다. 당시 어느 신문기자는 너무 잘하는 YS의 통일민주당 국회의원들과 너무나 못하는 DJ의 평화민주당 국회의원들을 비교하면서 이런 비유를 했었다. “YS는 옷걸이는 안 좋은데 옷이 좋고, DJ는 옷걸이는 좋은데 옷이 안 좋다” 김대중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사람에게 이런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는 잘 알 것이다. 그 와중에 나의 관심을 끄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광주청문회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해찬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도 너무 노무현을 비롯한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어서, 찾아낸 평화민주당 소속의 국회의원이 바로 이해찬 의원이었다. 호통만 칠 줄 알았던 평화민주당 소속 의원 중에서 사실적인 자료와 논리적인 추궁을 통해 청문회 본연의 책무를 잘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주위에 야당 성향의 경상도 출신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치인이 하나 생기게 되었다. “5공 청문회장에 노무현이 있다면, 광주 청문회장에는 이해찬이 있다” 청문회가 끝나고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한 이해찬과 노무현은 같이 노동위원회에 들어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을 위한 정치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해찬과 노무현은 반짝 정치인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의정활동을 통해서 언론과 시민단체의 주목을 받는 모범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해 간 것이다. 물론 한 명은 DJ의 곁에서 다른 한 명은 YS의 곁에서 말이다. 유독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DJ에 대한 지지가 강했던 나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욕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이 같은 당에서 일하면 정말로, 정말로 좋을 텐데 하고 말이다. 이미 이해찬은 DJ 옆에 있으니 노무현만 데려오면 금상첨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DJ가 노무현과 이해찬을 좌청룡 우백호처럼 거느리면 옷걸이는 좋은데, 옷이 시원찮다라는 말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의 욕심일 것 같았던 일이 엉뚱하게 YS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YS가 자신의 국회의원들을 데리고 몽땅 여당으로 넘어가버리는 3당합당을 단행한 것이다. 익히 알다시피 노무현은 여기에 따라가지 않고 꼬마 민주당으로 남게 되었다. 노무현의 강직한 성품이 고난의 길이고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따라가지 않은 것이다. 여담이지만 몇 달 전에 손학규가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이 길은 죽으러 가는 길인지 알면서도 간다고 했지만, 그런 말은 자기 욕심 채울 때 쓰는 말이 아니다. 죽으러 가는 길은 맞았지만, 대통령이 대권욕을 가지고 올인하면서 정도가 아닌 사도의 길을 갈 때 쓸 수 있는 말은 절대 아니다. 용기와 만용은 백지 한 장 차이라지만, 역사의 평가는 그 한 장 차이로 준엄하게 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꿈같았던 간절한 소망은 YS의 3당 합당으로 이루어진 셈이 되었다. 그리고 1992년 DJ는 나의 소원대로 이해찬과 노무현을 좌청룡 우백호처럼 거느리면서 대선 전에 뛰어들었다. 나는 모두 때려 치고 DJ 대통령 만들기 위해 얼어붙은 손과 약한 몸을 추스르면서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노무현은 이미 DJ 깃발을 들고 부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였다. DJ를 위하여 노무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DJ의 당선에 올인하였던 것이다. 대통령 선거 바로 전날, 선거 운동의 마지막 행사는 크리스마스 캐롤 송이 울려퍼지는 명동거리에서 장미 한 송이씩을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때 DJ의 곁에 이해찬이 있었다. 몸이 불편한 DJ를 이해찬은 근접 수행하면서 시민들 하나하나에게 정말로 진정 어린 표정으로 지지를 부탁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DJ의 당선을 확신했다. 객관적으로 상황판단을 하기에 그 때 나는 너무 어렸었나 보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연인들의 손에 장미 한 송이를 쥐어주면서, 그래 이 번에 우리는 이길거야! 노무현이 저렇게 애쓰고, 이해찬이 옆에서 수행하는데,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을 팽개치고 선거운동 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는 이길거야... 다음날 저녁에 실시간 개표 상황을 보면서 우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개표결과가 발표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개표 결과가 최종 확정이 되고 YS의 당선을 축하하는 방송의 팡파레 음악을 뒤로 하고, DJ는 정계은퇴 선언을 하였다. 담담하게 정계은퇴 선언을 하는 DJ 뒤로 이해찬과 노무현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아마 어디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으리라. 나는 울었다. 그냥 소리 없이 울었다. 노무현과 이해찬을 모두 모아놓고도 질 수밖에 없었던 정치 현실이 암담해서 울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대한민국 정치에서는 내가 죽을 때까지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가 너무 덧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더 울었다. 나는 정치에서 손을 뗐다. 학생운동도 싫고, 정치도 싫고, 이 나라 국민도 모두 싫었다. 물론 내가 손 뗀다고 기억하는 사람도 주목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나는 스스로 비장하게 공익적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것과의 영원한 결별을 선언했다. 그렇지만 그런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은 싹트고 있었다. 노무현도 절망하지 않았고, 이해찬도 절망하지 않았다. 정권교체의 희망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1997년 DJ는 다시 노무현과 이해찬을 한 편으로 하여 대통령에 도전한다. 그 희망은 1995년 지방선거가 출발점이었다. 군사정권 아래서 폐지되었던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면서, DJ 부활의 화려한 신호탄을 올린 것이다. 다들 알지만 당시 선거에서 민주당이 조순 후보를 영입하면서 서울시장을 당선 시킨 것이다. 이 때 가장 강력한 대항마는 박찬종이었다. 박찬종은 서울시장 선거를 징검다리 삼아 대권에 도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물리친 사람이 바로 이해찬이었다. 당시 조순 후보는 정치에는 초년병이었고, 이러한 핸디캡을 이해찬이 보좌했던 것이다. 이해찬은 당시 최초로 도입된 TV토론에서 청문회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딱 한번 보좌진에게 주어진 질문 기회를 활용하여 박찬종을 한 방에 보내버렸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박찬종은 무기력하게 떨어져 나갔고, 결국 대권의 기회마저 멀어지게 되었다. 바바리코트를 날리던 박찬종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알린 공은 이해찬에게 있을 것이다. 노무현은 당시 부산시장에 출마하였다. DJ깃발을 들고 나간 노무현 치고 너무나 여론조사 결과가 좋았다. 부산시장에 당선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DJ가 선거판에 나타나자 부산 민심은 돌변하였다. 여론조사의 압도적 우위를 뒤로 하고, 노무현은 또다시 두 번째 낙선의 쓴 맛을 봐야 했다. 이렇게 DJ에게 손해만 봤던 노무현은 또다시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DJ 진영에 합류하였다. 역시 노무현은 개인의 이해관계와는 다른 역사적 판단을 할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감격스런 국민의 정부에서 이해찬은 교육부 장관을, 노무현은 해양수산부 장관을 하면서 국정경험을 쌓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라는 찰떡궁합을 만드는 든든한 초석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해찬이 국민의 정부시절 교육부 장관을 할 때, 노무현은 종로 보궐선거에 당선이 되어 국회에 복귀하게 된다. 10년 전에 노동위에서 같이 활동하던 이해찬과 노무현은 다시 교육위원회에서 만나게 된다. 이제는 동료 국회의원이 아니라, 한 사람은 장관으로서 한 사람은 그 장관을 견제하는 국회의원으로서 말이다. 노무현이 교육위에 가게 된 것은 이해찬의 부탁이 작용했다. 교육개혁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이 때 교육위원회에서 자문단으로 활동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유시민이다. 유시민은 BK21 등 이해찬 장관의 핵심 정책들의 브레인 역할을 했고, 이 정책들을 국회 차원에서 밀어주었던 사람이 노무현이었다. 이해찬 장관을 중심으로 해서 노무현과 유시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삼각편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1년도 노무현 후보가 경선을 위하여 캠프를 꾸리고 있을 즈음에 이해찬과 술 한잔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느꼈던 것은 이 사람의 머리가 참 비상하다는 것이다. 당시는 국무총리를 했을 때도 아니었는데, 국가 예산을 몇 천억 단위까지 줄줄 꿰고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이 저돌적인 개척가라면, 이해찬은 머리가 비상한 재사 형이라는 것을 그 때 나는 깨달았다. 2002년 경선은 노무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드라마였던 것 같다. 아마 이해찬이라면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노무현이 개척해 놓은 길을 이해찬이 걸어가면 안성맞춤일 것이다. 참여정부 초대 총리인 고건의 후임을 정해야 할 때,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에 김혁규 카드를 꺼내 들었다. 경남도지사를 지낸 실물 경제에 밝은 김혁규가 국무총리에 적임자라고 생각했지만, 한나라당은 배신자를 그 자리에 앉힐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 거부감은 너무 강해서 국정을 온전히 맡기기에 부담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자들이 누구도 후임을 알아채지 못했을 때, 속으로 누가 될지 분명하다고 예측을 한 사람이 있었다. 유시민은 후임 총리가 이해찬일 거라고 예측을 했다고 한다. 기자들이 바보라서 그렇지 조금만 생각했으면 이해찬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해찬 총리의 등장은 20년 전에 노동위에서 호흡을 맞추던 사람들이 드디어 최고 국정파트너로 올라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같은 사실을 봐도 남다르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해찬 총리의 등장은 그렇게 남다르게 보였다. DJ를 중심으로 묶였던 그리고 착실하게 수업을 받았던 두 사람이 그것을 바탕으로 국정을 멋지게 운영하였던 것이다. 내가 누구보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20년 전 청문회의 기억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찬은 충남 청양 출생이고,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나도 안다. 고향을 이야기하고 학벌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리고 이것을 선거 전략으로 고려하는 것이 우리의 원칙에 위배가 된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김대중은 DJP연합을 했고, 노무현은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를 하였다. 정치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워내는 일이며,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워내는 작업이다. 고고하게 정치를 하려 했던 고건과 정운찬은 아마 노무현의 능력이 어디에 있음을 지금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은 경제도 알고 행정도 알아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치를 알아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를 아는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말은 고건과 정운찬은 정치에 발을 들여 놓으려다가 한 발 물러선 지금은 조금 깨달았을 것이다. 옆에서 훈수를 두긴 쉬워도, 자기가 하면 잘 할 것 같아도 그리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정치이다. 그러니 진흙과 쓰레기통이라는 현실을 말하는 나를 절대적 견지에서 비난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광주’의 아들이다. 1980년 광주 정신의 아들, 1987년 6월 항쟁의 아들, 1992년 김대중이 정계은퇴 했을 때 같이 울던 사람들, 1997년 DJ를 당선시킨 사람들, 그리고 2002년 우리 같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역사를 가진 진정한 ‘광주’의 아들이 나에겐 필요하다. 김대중이 되었고, 노무현이 길을 닦았다. 이제 그 길을 편안하게 잘 관리하면서 걸어갈 사람이 필요하다. 노무현이 어지간한 설거지는 다 해 놓았다. 개척가의 길을 잘 유지하고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쯤 되면 내가 왜 이해찬을 이야기하는지 알 것이다. 아니 알아야 한다. 1997년에 김대중과 이회창이 각 지역별로 어떻게 득표하여 김대중이 당선될 것이라고 세밀한 브리핑을 하던 사람이 바로 이해찬이었다. 나는 광주시민들이 어떻게 학살당했는지를 국민들에게 알려주던 광주 청문회의 이해찬을 기억하고 있다. DJ의 정계복귀를 가능케 했던 서울 시장 선거의 위대한 승리를 일구었던 이해찬을 기억한다. 그는 충남 청양 출생이지만, ‘광주’의 아들이다. 그러기에 그는 DJ,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승리의 공식을 가진 사나이다. 아이러니 하지만, 수구세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가지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현재 한나라당 대선후보인 이명박이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물론 내용상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명박의 말 실수 문제가 도마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완벽하게 커버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해찬은 청문회와 서울시장 선거, 국무총리를 하면서 갈고 닦은 실력이 있는 사람이다. 오늘날 선거는 미디어 선거이다. 미디어 선거는 말솜씨와 함께 진솔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해찬은 이러한 콘텐츠가 꽉 차 있는 사람이다. 이해찬이 1995년 어눌한 말솜씨의 조순 시장을 데리고(?) 서울시장 선거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콘텐츠와 포장을 적절한 수준으로 해 놓았기 때문이다. 콘텐츠는 별로 없이 포장이 좋았던 박찬종은 그래서 한 방에 날아간 것이다. (포장만 좋고 콘텐츠가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아시겠죠)
우리는 콘텐츠와 포장이 괜찮은 사람을 내세워야 한다. 그리고 지역적인 구도에서도 필승의 전략을 짜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지난 두 번의 선거처럼 필승할 수 있다. 그리고 절대 훼손해선 안 될 원칙, 적어도 개혁세력의 대통령 후보라면 ‘광주’의 아들을 선택해야 한다. ‘광주’의 아들이 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와서 넙죽 절하고 5.18묘지 참배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지난 몇 십 년의 역사가 그리도 우스워 보였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혁명은 노무현으로 완성이 되었다. DJ가 길을 열었고 노무현이 닦았다.
이제 멋지게 포장된 길을 한나라당이 걸어가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 될 것이다. 화려한 준공식의 팡파레와 커팅식, 그리고 함께 걸어갈 사람도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래서 이해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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