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척결

[스크랩] 광복 60년, 재계 친일청산은 끝났는가?

순수한 남자 2007. 10. 16. 21:42
광복 60년, 재계 친일청산은 끝났는가?
[이코노믹리뷰 2005-08-11 09:36]

상황논리 등으로 흐지부지, 미완의 과제로 남아

오는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동양권에서 60주년은 50주년, 100주년보다도 더 큰 의미가 있다. 60갑자가 한 바퀴 돌았기 때문.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친일청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과거사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에 우리는 재계의 친일청산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특정 기업과 기업인을 공격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며, 숨겨진 진실을 밝힌다는 거창한 의미를 가진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한 번쯤 짚고 넘어가면서, 후세 역사가의 평가에 맡기기 위한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초창기 2∼3대 회장을 지냈던 고 이정림 대한유화 전 회장은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16세에 일찍 장사를 시작했다.

개성의 명문가 출신인 그의 집안은 ‘대학을 나오면 벼슬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뜻을 굽히는 것이 되므로, 자주적인 사업에 수완을 발휘해야 한다’는 가풍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조선조에 대한 적개심으로 학문과 출사를 거부하고, 천시되던 상인의 길을 택했던 개성 사람들의 유풍 때문이었다.

엄혹한 시대에 뜻을 굽히지 않기 위해서는 이처럼 명예나 출세욕, 물욕은 철저히 배격하고 뭇 사람들과 거꾸로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제 말기 국내에 있던 대부분의 민족지도자들이 변절하고, 친일 내지 소극적 협일(協日)로 돌아선 것은 개성 사람들처럼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반민특위에 끌려간 박흥식과 김연수
1948년 9월 대한민국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즉 반민특위를 구성한다. 드디어 광복 3년 만에 친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 반민법은 반민족행위자, 즉 친일파의 범주를 협소하게 규정함으로써 수십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혐의자 중 그 정도가 심한 7000명 정도를 처벌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중앙청에서 업무를 시작, 사흘 만인 8일 화신백화점 사장이던 박흥식을 제1호로 체포했다.

반민특위에 잡혀간 친일혐의 기업인은 박흥식, 경성방직 김연수, 태창직물 백낙승, 북선교통 방의석, 영보실업 민규식을 비롯해 방규환, 장직상, 박춘금, 이기연, 김정호, 신용욱 등이었다.

박흥식의 죄목은 군수산업인 비행기 공장을 경영한 혐의였다. 그는 1944년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경기도 안양에 공장을 세워, 군수공장 지정을 받았다. 하지만 시제품만 만들었을 뿐, 해방 때까지 단 1대의 비행기도 생산하지 못했다.

방규환, 방의석, 장직상, 김연수, 박춘금, 이기연, 민규식, 김정호 등도 조비의 이사진이다.

“조선총독부는 나에게 황은을 입게 된 조선인의 손으로 비행기 공장을 세워, 비행기를 생산하라고 요청했다. 오늘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내일은 조선군사령관이, 다음날은 참모장이 번갈아 가며 식사에 초대하고 연회에 부르는 등의 방법으로, 회유와 압력을 계속했다. 일제의 강요를 끝내 거절할 수 없다는 체념이 서자, 이 기회에 비행기공장에 더 많은 조선청년을 채용하여, 징용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결심했다.” 박흥식의 주장이다.

박흥식은 매우 아이러니한 경우다. 도산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 출신인 친형 박창식은 1910년 일본경찰에 검거돼 모진 고문 끝에 사망했고, 이에 상심한 부친도 술로 세월을 보내다 39세에 요절한 사람이기 때문. 박흥식은 ‘아버지와 형님의 원한을 갚겠다’고 결심했다고 하는데, 결국에는 친일기업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박흥식이 6대 조선총독 우가키에게 감사편지를 보냈다는 대목에서는, 그가 진짜 친일파가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된다. 그는 반민특위 조사과정에서 “우가키를 숭배했다”고 털어놨다.

골수 친일파 백낙승, 이승만과 유착
친일청산 문제만 나오면, 단골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의 하나가 인촌 김성수다. 그의 친동생이자 당시 최대의 민족기업이었던 경성방직 사장을 지낸 수당 김연수도 마찬가지다.

경성방직은 김성수가 1919년 창업했고 김연수가 경영하다가, 광복 후 매제인 김용완 전 회장이 맡은 기업으로, 오늘날의 경방이다. 또 김연수가 1924년 창립한 농업기업 삼수사는 삼양사의 전신이다.

김연수는 일제 말 조비 이사였을 뿐 아니라 만주국 명예총영사, 중추원 칙임참의, 국민총력연맹 후생부장, 임전보국단 간부 등 많은 직함을 갖고 있었다. 조선인 최고의 민족자본가, 국내 제일의 부자라는 그의 객관적 위치상,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역사의 질곡이었다.

“나에 대한 수모요, 나아가 우리 국가에 대한 수모라는 것이 끝까지 발목을 잡았지만, 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의 산업을 살리고 키워 나가는 데 밑거름이 되면 족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연수의 친일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태창직물 백낙승은 돈을 위해 작심하고 친일행위에 나섰던, 골수 친일파였다.

백낙승의 태창직물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관동군사령부 헌병대의 비호 하에 직물수출 독점권을 확보하고 이토추, 마루베니 등 대무역상들의 수출을 대행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태창은 일본상사들에게서 받은 포목에, 사쿠라 무늬 속 ‘泰’자가 들어있는 상표를 찍어, 헌병대의 호송을 받아가며 만주로 밀수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문난 친일파이자 밀수꾼인 백낙승은 광복 이후 하루 하루가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치인과 줄을 댔는데, 그가 바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일종의 도박이었다.

당시 곤궁한 처지였던 이승만의 후원자를 자처한 백낙승은 거액의 정치자금과 아울러, 매달 생활비를 바쳤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그에게 적산(일본인이 운영하다 버리고 간 기업)인 고려방직 영등포공장, 조선기계를 불하해 주었고, 식산은행에서 500만 달러의 외화대부를 허용해 주었으며, 홍삼전매권도 몰아주었다. 그 덕분에 백낙승은 태창방직, 태창공업, 태창직물, 해전직물, 대한문하선전사, 조선기계 등을 거느린 국내 최초의 대재벌로 도약할 수 있었다.

정경유착과 특혜로 재벌이 된 친일파 백낙승. 그러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의 사업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백낙승은 4월혁명 직전에 사망했고, 그가 부정축재자로 몰리면서 전 재산도 국가에 귀속됐다. 장손은 일본에 귀화해 버렸으니, 과연 골수 친일파의 후손다웠다.

전원 무죄, 반민특위 좌절로 유야무야
한편 운수업자로 함흥택시를 운영하기도 했던 방의석은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태평양전쟁 중 국민총력연맹 이사로서 흥아국단이라는 친일조직을 만들었으며, ‘애국기’라는 명목으로 일본 육·해군에 비행기 한 대씩을 바쳤다는, 친일파 기업인이었다.

또 신용욱은 조선항공기회사를 설립해 항공기를 제조하면서 일제와 내통했고, 백낙승과 김정호는 군수공업을 하면서 일제를 도왔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이들 반민특위에 회부된 친일기업인들은 최종적으로 모두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백낙승은 이승만의 직접 지시로 석방됐고, 박흥식은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검찰관이 바뀌는 우여곡절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김연수 역시 공판에서 무죄판정이 내려졌다.

“피고의 행위는 많이 참작할 곳이 있으며, 관직 및 명예직은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피동적으로 맡은 것이며, 한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학생들에게 원조를 하였으니, 이 점으로 피고가 남긴 공적은 크다고 할 것이며, 단순히 친일 및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할 수 없다.” 당시 재판부의 판결문 중 일부다.

특히 반민특위 자체가 이승만 정권과의 대립 속에 경찰의 습격을 받아 위원들 및 특경대원들이 체포된 것을 계기로, 활동이 흐지부지되고 결국 해체 수순을 밟게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후 1965년 한·일수교회담과 이에 반대하는 6·3데모가 한창이던 당시, 김용완 전경련 회장은 일본 경제인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경제인은 총알보다 먼저 적국에 들어가고, 병사보다도 더 용감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연수의 친일논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였다.

친일행위 및 과거사 청산문제는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재계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친일청산의 실패가 정경유착의 시작으로 귀결됐기 때문이다.

기타 친일 의혹이 있는 기업인들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매헌 박승직은 김연수, 박흥식과 함께 당시 대표적인 민족기업인으로서, 일제의 집요한 강온 양면 포섭공작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이 됨으로써, 결국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김성수 경희대 교수는 《매헌 박승직, 연강 박두병 연구》에서 “끝까지 거절하지 않은 것은 사업을 위해 시대에 타협하려는 그의 성격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고 밝혔다.
박승직이 1933년 12월 자신의 사업과 전혀 무관한 소화기린맥주의 주주가 된 것도 일제의 회유책으로 보인다. 광복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떠난 소화기린맥주를 불하받아 장자인 박두병에게 맡긴 것이, 두산이 맥주재벌로 성장한 기폭제였다.

◆금호아시아나 창업자 박인천
금호아시아나 창업자인 박인천은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그 어렵다던 보통문관시험에 합격, 영광경찰서에서 경찰생활을 시작했다.
광복 무렵까지 경찰간부로 근무했던 박인천의 최종 계급은 경부였다. 이는 곧 발간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야 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친일행위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특히 일부 기록에는 그가 광복 직전 파면당했다고 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실제로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대한전선그룹 창업자 설경동
설경동은 일제시대 함경북도 청진에서 청어잡이 선단을 이끌고 이름을 날리던 대부호였다. 그러나 광복 후 친일파로 몰려 공산당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하고, 어선 몇 척을 몰고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현재로서는 그가 정말 친일행위를 했다기보다는, 공산주의자들이 억울한 누명을 씌웠을 가능성이 높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기업인도 있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맹호군’ 창설 주도, OSS 특수공작대원

유한양행 창업자인 고 유일한 박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후세 기업인들의 사표가 되는 인물이지만, 일제 말기 한때 독립운동에 열정적으로 투신했었다는 점에서도, 다른 기업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사업을 하던 유일한은 1926년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와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않은 국민만이 주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유한양행을 창립했다.

승승장구하던 유한양행은 태평양전쟁과 일제의 탄압으로 위기를 맞는다. 일제의 전시통제 및 수탈정책, 물자총동원 계획 등은 기업활동을 극도로 위축시켰고, ‘조선의약품 기업 정비령’과 군수공장 지정 등으로, 유한양행의 손발은 완전히 묶였다.

특히 일제는 유한양행을 미국계 회사라며 핍박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 간부사원 전원을 종로경찰서에 연행하기도 했으며, ‘양행(洋行)’이 적성적인 표현이라고 해서 상호도 유한제약공업으로 바꿔야 했다. 또 혹독한 세무조사로 끊임없이 회사의 목줄을 조여왔다.

당시 유일한은 미국에 있었다. 1938년 유럽과 남북미의 약업계를 시찰하고 수출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국했다가, 전쟁 발발로 미국에서 발이 묶인 것. 유일한은 남가주대학 경영학석사 과정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민족대회 개최를 주도했고, 1942년 8월에는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에 참석,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회장 이승만 및 캘리포니아 주지사 컬벗 올손의 축사를 대독했다.

또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미국 육군사령부로부터 허가를 받고 ‘맹호군’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기여했고, 위원회 기획연구부 위원장을 맡아 《한국과 태평양전쟁》이라는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특히 유일한의 항일 독립운동의 하일라이트는 미국 전략정보국(OSS·CIA의 전신)의 특수공작요원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OSS는 중국에서는 광복군을 훈련시켜 낙하산으로 국내에 투입시키는 ‘독수리작전’을, 미국에서는 ‘냅코(NAPKO)’작전을 추진했다. 냅코 작전은 재미 한인교포들로 특수공작대를 구성해 한국에 침투시켜 첩보수집 및 지하조직을 만들어 무장유격투쟁을 벌이게 하자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두 작전은 모두 허사가 됐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씨에 따르면, 공작원들 중 8명의 명단이 보안상 A부터 H까지 알파벳으로만 남아있는데, 이중 A가 유일한이다.

OSS 훈련책임자는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회사 간부들을 보다 투철한 한인 애국자들로 채웠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고, A에 대해 소개했다.

공작원들은 캘리포니아 산타카타리나섬에서 무기사용법, 폭파훈련, 낙하산침투, 비밀 먹 사용법, 독도법, 무전기술, 촬영법 등을 배웠다고 한다.

당시 50세의 나이에 이렇게 고된 특수공작원 훈련을 자원해서 받고, 자신의 회사도 무장투쟁에 기꺼이 바칠 각오를 했던 유일한은 기업인이기 이전에 애국지사, 독립투사였다고 할 수 있다.

교보생명그룹 창업자 신용호
독립투사 집안, 신갑범·이육사 따랐다

“일찍이 막막한 식민지시대 아버지, 형들
일제와 맞서 싸우는 동안 제대로 자랄 겨를 없이 (중략)
혁명가 신갑범, 시인 이육사 선생의 애국수행 길목
만나는 곳이 학교요, 만나는 이를 스승으로 삼은 사람”

고은 시인은 지난 2003년 교보생명그룹 창업자였던 고 대산(大山) 신용호의 추모식에서, 이렇게 읊었다. 이 추모시 중 상기 부분은 신용호의 소년·청년시절을 짐작케 한다.

신용호는 1917년 8월 광주에서 신성언의 6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남 영암의 사대부 가문으로, 부친은 한학자이자 애국지사였다. 맏형 신용국은 영암에서 발생한 소작쟁의 항일농민운동의 주동자로 낙인찍혀 투옥됐다. 또 셋째형도 일본 도쿄에서 항일학생운동에 가담, 체포됐다.

신용호는 어릴 때부터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목격하고,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자연 남다른 민족의식과 아울러 일제에 대한 증오심을 품었고, 나라 잃은 국민의 슬픔을 절실히 느꼈다.

부친과 형들의 항일운동의 여파로, 그는 향리인 영암을 떠나 목포로 이사해야 했고, 신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독학으로 한학을 공부해야 했다.

하지만 불타는 향학열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억누를 수 없었던 신용호는 20세이던 1936년 홀홀단신 만주로 건너간다.

열혈청년 신용호는 만주 다롄, 베이징, 북만주 목단강, 자무스, 중·소 국경지대 하이라얼까지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다롄에서는 뒤늦게 중학교를 다녔다.

이 시절 신용호는 집안 어른이자 애국지사였던 신갑범 선생의 도움으로, 시인 이육사 등 많은 애국지사와 교류했다. 신갑범은 독립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던 기록이 있고, 이육사는 유명한 저항시인이며 의열단, 조선군관학교 등에 가담했고 일제에 체포돼 베이징에서 1944년 순국했다.

이 두 지사의 지도로, 신용호는 민족관, 사회관을 확고히 형성하고 투철한 소신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 영향으로 그는 북경대학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학을 포기했다. 조국 광복이 라는 투쟁목표 앞에, 그저 학업에만 열중할 수는 없다는 실천적 가치관 때문이었다.

신용호는 그 시절에 대해 “나의 대륙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결단의 시절이었다. 내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 것도 그 시절이었으며, 그 결심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회고한 바 있다.

베이징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이듬해인 1946년 여러 애국지사들과 함께, 10년 만에 귀국했다.

순천향대학교 박광서 교수는 “대산 선생의 행동철학의 원류인 ‘무자기(毋自欺)’ 사상은 그가 만주에서 만나 정신적 지주로 섬기던 신갑범과 이육사 선생의 사상에서 전수한 듯하다”고 지적했다.

무자기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 스스로에게 정직한 것이다. 맹자는 “무자기의 수양을 가진 사람은 남과 다른 기개, 즉 대장부의 기(氣)가 있다”고 했다.

1958년 8월 국민교육 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을 위해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을 창업하고, 사업보국과 교육진흥에 진력한 대산 신용호.

그가 비록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기업철학과 가치관은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들의 정신, 바로 그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산무역 이끈 마지막 경주 최부자 최준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전 재산 털어 넣다

장남 최준, 3남 최완은 독립유공자로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특히 최완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일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1921년 35세로 순국했다. 반면 둘째 최윤은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죄로,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다.

경주 최부잣집은 10대에 걸쳐 만석꾼이었던 조선 최고의 부호이자, 독립투사 이시영 선생의 집안과 함께, 한국의 전통적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대표하는 명문가였다. 최준은 마지막 경주 최부자이며 최윤, 최완은 그의 동생들이다.

인촌·수당 형제를 포함, 일제 말기에 지조를 굽히고 일제에 협력하는 오점을 남긴 민족지도자들은, 흔히 상황논리를 말한다. 한마디로 집안과 기업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최씨 집안 형제들이 독립유공자와 부역자로 갈린 것도, 이런 측면이 있다.

최 부잣집의 장손 최준은 한말의 우국지사인 면암 최익현, 의병장 신돌석, 일제 초기 비밀결사였던 광복회를 이끌었던 박상진, 인촌 김성수 등과 교유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겨레의 일원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늘 고민했다.

그러던 중 최준은 백산 안희제를 만나게 된다. 안희재는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1914년 영남지역 민족자본가들을 규합, 부산에 최초의 무역회사인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백산상회는 겉으로는 곡물상이었으나, 사실은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소였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전달하는 루트였다.

1919년 5월 백산상회는 자본금 100만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됐는데, 사장이 바로 최준이었다. 백산무역은 대구, 서울, 원산, 만주 봉천 등지에 지점을 설치하며 사업을 확장시켰으나, 상하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단체에 거액을 지원하다보니, 경영은 날로 악화됐다.

최준은 걸핏하면 일본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일제의 감시로 백산무역의 자금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결국 최준은 1927년 회사 문을 닫았고, 110만원이라는 엄청난 빚을 떠안았다.

“최부잣집이 망했다”는 소문이 돌자, 식산은행 아리가 총재는 최준의 부채 절반을 탕감해 주고, 긴급자금까지 빌려 주는 특혜를 베풀었다. 당시 사이토 총독의 ‘내선일체’ 유화책이었는데, 최준은 알고도 걸려들 수밖에 없었다.

아리가를 앞세운 총독부는 한편으로는 은행빚 혹은 투옥과 고문 위협으로 그를 압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집요하게 그를 회유했다. 최남선 등이 친일파로 변절한 것도 이 무렵이다.

마침내 1936년 최윤은 형 최준 대신 총독부 6대 중추원 참의가 되겠다고 자청했다. 집안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희생, ‘이대도강(李代桃降. 복숭아나무 대신 자두나무가 쓰러진다)’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광복 후, 최준은 그때까지 남은 전 재산은 물론,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과 장서류 8000 권까지 몽땅 털어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것이 현재 영남대학교의 전신이다.

최씨 일가는 이시영 집안과 달리 국내에 머물다보니, 최후까지 지조를 지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추원에 이름만 걸었을 뿐 아무런 친일행위도 하지 않았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모든 재산을 조국과 민족에 아낌없이 바쳤다는 점에서, 인촌·수당과는 다르다.

최준은 한 노스님에게서 받은 이런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으나,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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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Vision Korea!!!
글쓴이 : 메멘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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