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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를 한국땅으로 만든 정치인

순수한 남자 2008. 8. 4. 13:33
  • 울릉도를 한국땅으로 만든 정치인.. [0] | 폭주천사
    • 번호 248453 | 2008.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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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 남구만은 우리에게 그다지 잘알려져 있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1689년 희빈 장씨의 소생인  균(均)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동해로 유배당한 시절 지은   `동창이 밝았으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라는 시조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 봤을 정도로 매우 친숙한 시조이다.

     그는 장희빈 문제로 당쟁이 격화될 무렵, 소론세력의 영수에 있으면서 소론의 입장을 적극대변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남구만선생 영정 88×162cm


      17세기 이전까지 조선은 도서지역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방관적인 경영을 하고 있었으며 울릉도와 독도 문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1695년 안용복이 단독으로 일본까지 건너가 울릉도 및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사건으로 인해  조일간에는 외교 마찰이 일어났다.

     당시 조선은 국법을 어긴 안용복에게 중죄를 물어야 하며 아울러  울릉도및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고유 영토임을 확인해야 된다는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이때 남구만은 영중추부사를 지내면서 조정의 중론을 모으는 한편,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배격하고 숙종임금에게 보다 적극적인 실효지배방안을 제시하였다. 

     1차 외교분쟁 '우리나라의 울릉도(鬱陵島)'

     숙종19년 1693년 당시 안용복(安龍福) 박어둔(朴於屯)등 어부 40명은, 봄철 울산(蔚山)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울릉도(鬱陵島)까지 나아가 배를 대었다. 그런데 울릉도에는 일본인배도 정박해 있었고 양측간에는 다툼이 벌어져, 결국 일본인은 박어둔·안용복 2인을 꾀어내 납치하였다. 

     일본은  그 두명을 몇달동안이나 억류하고 있다가 겨울철이 되어서야 대마도(對馬島) 정관(正官) 귤진중(橘眞重)을 통하여 조선에 송환시키고,  아울러  죽도(竹島)가 일본의 영토임을 주장하며, 안용복등의 조업행위를 항의하는 한편 조선인이  고기잡는 것을 금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예조(禮曹)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전달하였다.

    “ 비록 우리 나라의 울릉도일지라도 또한 아득히 멀리 있는 이유로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고있으며, 지금 이 어선(漁船)이 감히 귀경(貴境)의 죽도에 들어가서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당시 예조는  죽도가 울릉도나 독도가 아닌 일본영해의 섬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의 서한을 보낸 것이다. 따라서 예조의 서한 내용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로 인정하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이에  귤진중역시 예조의 유감표명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울릉도'란 문구를'죽도'로 산개(刪改-글자나 글귀를 지우거나 고쳐서 바로잡음)해 줄 것을  15일에 걸쳐 수라례나 요청하였지만, 고유지명에 대한 명칭변경문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조선역시 울릉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인 대응책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귤진중을 비롯한 일본인들은, 동래부사를 통해  '조선(朝鮮) 사람은 우리의 죽도에 마땅히 다시 들어오는 것을 금지야 할 것이다.’ 는  의사를 그 후로도 계속 전달하였다.

     조정의 강토를 어찌 남에게 주랴


     이 보고를 접한 남구만(南九萬)은 '
    남의 의사를 무시하고 방자하게 구는 일은 바로 책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숙종임금에게 울릉도가 분명한 조선영토임을 주지시켰다.


    "신라 때 이 섬을 그린 그림에도 또한 나라 이름이 있고 토공(土貢) 을 바쳤으며,

    고려 태조(太祖) 때에 섬 사람이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리 태종(太宗) 때에 왜적이 침입하는 근심을 견딜 수가 없어서 안무사(按撫使)를 보내어 유민(流民)을 찾아 내오게 하고는,
    그 땅을 텅비워 두게 했으나, 지금 왜인들로 하여금 거주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조종의 강토를 또한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





     *18세기 말경에 제작된 조선전도. 

    울릉도와 독도는 물론 대마도와 제주도 심지어는 만주지역 일대까지 우리나라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남구만은 신라시대 이후부터 울릉도는 우리의 영토였으며.  공도(空島)는 단지 왜적 침입에 피해를 줄이기 위한  정책일뿐 울릉도 역시 조종의 강토임을 분명히 하였다 .

    강원도의 울진현(蔚珍縣)에 속한 울릉도

     하지만 남구만은 시종 일관된 태도를 보인것은 아니다.
    숙종 20년 8월 중순 왜차(倭差)가 돌아오면서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서계(書契)를 바쳤는데,  , 조선의 답변서에 나와있는 ‘울릉’ 두 글자를 삭제하기를 요청하자, 남구만이 그만 그 말을 따라 울릉도라는 문구를 삭제하려 하였다.
    그야말로 울릉도마저 분쟁지역으로 넘어갈 역사적 오류를 범할 순간이었다. 그때 윤지완(尹趾完)은 이미 국서로 작성한 문서이며  .‘죽도(竹島)는 곧 우리 울릉도이다. 우리 나라 사람이 가는 것이 어찌 경계(境界)를 범한 것인가?라며 남구만의 처사에 강력 항의하였다.

     결국 남구만은 윤지완의 의견을 받아들여 '울릉도' 의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이런 사실을 빠짐없이 숙종에게 아뢰었다.
     
      숙종은 "교활한 왜인(倭人)들의 정상(情狀)으로 보아 필시 점거(占據)하여 소유하려는 것이다.” 라고 하며 일본인의 영토점거야욕을 단호히 배격할 것을 주문하였다 .

    이에 남구만은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청컨대 삼척 첨사(三陟僉使)를 가려서 보내되 섬 속에 가서 형편을 살펴보도록 하여, 혹은 민중을 모집하여 거주하게 하고 혹은 진(鎭)을 설치하여 지키게 한다면, 곁에서 노리는 근심거리를 방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왜적들의 해적행위로부터 울릉도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소극적인 공도정책에서, 적극적인 영토경영정책으로 바뀐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이에 숙종역시 윤허하고  장한상(張漢相)을 삼척 첨사로 삼아 울릉도를 관리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억류 생활을 하였던 안용복의 증언으로,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서계(書契)에 ‘죽도(竹島)’란 말은 곧 장차 강호(江戶:에도 - 지금의 東京(동경) )에서 공을 과시하기 위한 계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조선은 
    왜차(倭差 조일간의 외교실무업무를 맡아보던 통역관 )들을 질책하여, 울릉도 개칭문제를 들먹이던 그들을 굴복시키기에 이르럿다.


    이에 이르러 남구만은 일본에 보내는 공식 답변서를 일부 수정하여 더욱 강경한 어조로  울릉도가 우리 영토임을 밝혔다.

    우리 나라 강원도의 울진현(蔚珍縣)에 속한 울릉도란 섬이 있는데, 본현(本縣)의 동해(東海) 가운데 있고, 수시로 공차(公差)를 보내어 왔다갔다하여 수검(搜檢)하도록 했습니다.

    본도(本島)는 ....우리 나라의 《여지승람(輿地勝覽)》이란 서적에 실려 있어, 역대에 전해 오는 사적이 분명합니다.

    이번에 우리 나라 해변의 어민들이 이 섬에 갔는데, 의외에도 귀국(貴國) 사람들이 멋대로 침범해 와 서로 맞부딪치게되자, 도리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끌고서 강호(江戶)까지 잡아갔습니다. 

    비록 그러나 우리 나라 백성이 어채(漁採)하던 땅은 본시 울릉도로서, 대나무가 생산되기 때문에 더러 죽도(竹島)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곧 하나의 섬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하나의 섬을 두가지 이름으로 부른 상황은 단지 우리 나라 서적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귀주(貴州) 사람들도 또한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 귀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지경을 침범해 와 우리 나라 백성을 붙잡아간 잘못은 논하지 않았으니, 어찌 성신(誠信)의 도리에 흠이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바라건대,  귀국의 변방 해안(海岸) 사람들을 거듭 단속하여 울릉도에 오가며 다시 사단을 야기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조선의 공식답변서를 보자 왜차들은 당황한 나머지 ‘침범해 오다[侵涉]’와 ‘붙잡아 갔다[拘執]’  울릉鬱陵등의 어구(語句)만이라도 삭제 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남구만은 울릉도에 대해 섬을 비워두는 공도정책에서 삼척부사로 하여금 2~3년마다 정기적으로 순찰하는 수토(搜討)정책으로 변경할 것을 요청하여 숙종은 이를 윤허하였다. 이렇게 남구만은 조선의 영토정책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또한 남구만은 안용복이  개인신분으로 외교문제를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사형위기에 있을때도 이를 변호해줘 유배형으로 낮춰준 일도 있다.

    아! 조종(祖宗)의 강토(疆土)는 남에게 줄 수가 없는것

     이렇듯 약천 남구만은 시조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의 울릉도 침략 야욕을 배격한 매우 주목할만한 인물이지만, 외교분쟁의 처리과정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일본과의 친선관계를 우선시하고 국재분쟁을 원만희 해결하려는 취지에서 유연하게 대처한 것이겟지만,  울릉도 문제 처리과정에서도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에 다소 밀리는 듯한 자세를 취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조정의 외교방식을 그저 말없이 지켜보며 역사를 기록하던 한 이름없는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아! 조종(祖宗)의 강토(疆土)는 남에게 줄 수가 없으니 명백히 분변하고 엄격히 물리쳐서 교활한 왜인(倭人)으로 하여금 다시는 마음을 내지 못하도록 할 것이 의리가 분명한데도, 주밀하고 신중한 데에 지나쳐서 다만 견제(牽制)하려하였으며... 더욱 이웃 나라에 약점(弱點)을 보였으니, 이루 애석함을 견디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