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쓴 아름다운 영어 글
(서프라이즈 / 천년세월 / 2010-07-01)
그러고 보니 이른바 제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지 28년째다. 82학번인 나는 대학에 붙기가 무섭게 모든 과외가 금지돼 있던 시절 이른바 ‘몰래바이트’라는 것으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정말이지 생존을 위해 그게 필요했다.
또한 그러고 보니 조화유 씨가 지적한 그대로 ‘분사구문에 주어는 주절의 주어와 일치한다’는 문법을 가르친 지 역시 28년째다. 물론 이것은 문법시험에 한해서다. 잠깐 그 얘기를 하고 싶다. (이렇게 얘기하고 싶으면 오늘 내가 술 마신 거다.) 그 문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28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자 이 문장을 해석해보기 바란다.
‘Burnt seriously, the doctor decided to give the patient up.’
틀린 문장을 찾으라는 문법문제라면 당연히 골라야 할 문제이겠지만 만약 어떤 학생이 독해지문 속에 숨어 있는 위 문장을 들고 와서 틀린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학생을 나무란다.
“진정한 독해란, 어떤 문장이 왜 문법적으로 틀렸는지, 왜 그 사람이 그 틀린 문장을 썼는지 따지는 것이 아니다. 당장 눈을 조금만 부릅뜨면 오늘 아침 국내 신문기사나 외국 유명잡지에서 몇몇 틀린 문장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좋은 독해를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왜 그 표현을 썼을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그 생각이나 심정을 느껴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법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게 받아들일 때 위 문장은 비로소 ‘심하게 화상을 입은 사람은 의사가 아닌 환자이며, 의사는 그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고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글쓴이에 대한 이해이며 그에게 마음을 여는 태도이다.
셰익스피어의 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의 글이 항상 grammatic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대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자주 ‘항상 느껴왔던 것이지만 표현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을 그가 대신 표현해주고 있거나, 혹은 ‘도대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던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표현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마음을 열게 해준다. 반면 문법적이나 아무런 느낌이 없는 글은 옆집 아저씨의 벤츠를 보는 것만큼이나 나에게 아무런 감흥이 없다.
아직도 나는 고등학교 때 배운 제망매가를 읽으면 마음 구석구석까지 파고 도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다. 특히
삶과 죽음의 길은/이에 있음에 두려워하고/‘나는 간다’는 말도/못다 이르고 갔는가?/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여기저기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같은 나뭇가지에 나고서도/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누이를 잃은 2천 년 전 작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 마음 한구석에 두고 싶어 지금도 가끔 이 구절을 적어놓고 읽어본다. 하필 이럴 때에 문법이 옳고 그름을 꼭 따져야만 할까?
나는 지금까지 조화유라는 사람이 내 마음의 심금을 울릴만한 어떤 좋은 작품이나 글을 쓴 것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내 독서의 양이 부족한 소견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저 ‘문법에 적절한’ 어떤 책을, 영어책을 몇 권 썼던 것 같다. 그건 그냥 장사치의 책이고 조금 한 세대만 지나면 우리 기억 속에 잊힐 그렇고 그런 책들일 것이다.
비록 정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영어전공자로서, 그리고 자칭 영어전문가로서 독고탁님의 글을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법적으로 틀린 곳이 과연 많이 있었다. 기실 마음 한구석에 고쳐서 다시 보내드릴까 생각도 있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고 그러기에는 내 현실적인 여건이 따라주지 못했던 점이 컸다. 그러나 더더욱 중요한 것은 보고서를 읽으면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는 자기가 표현해야 할 것을 모두 표현했고,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표현했다. 좋은 글이었고, 이를 고쳐봐야겠다는 내 생각이 오만했음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분사구문의 주어가 어쩌고 떠드는 반쪽 절름발이 영어전문가가 아니라면, 배울 만큼 배운 원어민이라면 이 글의 가치는 필경 사소한 문법적인 오류보다 훨씬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작 한 영어장사꾼의 글에 맘 상해 있을 서팡들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꼭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꽉 짜인 24시간이라는 틀에서 나도 먹고살기 위한 시간의 배정은 있는 법.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고미생각님이 먼저 좋은 글을 쓰셨다. 그래서 이 글은 고미생각님의 글에 대한 보충이 되겠다.
대학에서 전공 첫 수업시간에 어느 교수가 물었다. “학생들은 왜 영어를 배우지?” 그때 난 이렇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좋은 영어를 배워서 국문학을 영문학보다 위에 올려놓는 토대로 삼고 싶다”
물론 그때는 벌써 30여 년 전이고 어느 질문이든지 그 대답은 어느 정도 민족주의적인 어떤 것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 있던 때이기는 했지만 나에게 이 대답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직도 나는 영어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조화유 류의 반열에 올라 있지 못하다. 결국 아직도 나는 내 것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순박한 영어학도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 점에서 적어도 내가 보기에 독고탁님은 조화유가 지금까지 한 번도 쓰지 못한 “진정으로 내가 감동할만한 어떤 아름다운 영어 글”을 썼다. 그에게 감사한다.
천년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