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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뚱 루이 16세” 이건희에게, <굿바이 삼성!>

순수한 남자 2010. 10. 18. 10:15

“짝뚱 루이 16세” 이건희에게, <굿바이 삼성!>
번호 207896  글쓴이 명덕 (aristotal)  조회 2326  누리 519 (519-0, 27:70:0)  등록일 2010-10-17 09:42
대문 32


‘짝퉁 루이 16세’ 이건희에게, <굿바이 삼성!>
(서프라이즈 / 명덕 / 2010-10-17)


삼성은 리바이어던인가?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언젠가 교육인적자원부 직원을 대상으로 ‘내가 바라본 대학교육, 내가 바라는 대학혁신’이란 주제의 특강에서 이런 요지로 말을 했다. 초·중등교육의 문제점을 시대요구에 뒤떨어진 교육내용, 평준화제도로 인한 하향평준화, 영재 조기 발굴 시스템 부족이라고 짚으면서, 대학경쟁력 부재(不在)를 비판했다. 그는 여기에다 ‘몇몇 엘리트가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시대에 수월성(秀越性) 교육 없이 대한민국이 먹고 살기는 힘들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함축적인 발언 뒤엔 삼성 이데올로그가 그대로 숨어 있다. 최고 일류만이 살아남고, 일등(一等)만을 우상시하는 이데올로그, 평등보단 경쟁만을 최고의 가치로 평가하는 이데올로그, 한두 명이 온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오만 극치의 이데올로그. 이런 사유의 바탕에는 삼성이 공동체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는 ‘기업독재국가’의 권력논리가 터 잡고 있다.

이 일류병으로 돋아난 이데올로그가 ‘죽은 정의사회’의 허울 좋은 헛구호였음은 삼성전자 부사장이 타워 팰리스 성(城)에서 어쩔 수 없는 죽음을 택한 고공낙하가 그대로 거짓 없이 반증하고 있다. 그 주검 뒤엔 삼성이 암묵적으로 인간을 죽음의 경쟁으로 몰아가는 밀림 자본주의의 가치인 경쟁과 탈락, 그 탈락을 두려워하는 죽음의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삼성이 초일류기업이 되는 날 모든 열매와 보람은 함께 땀 흘린 임직원들과 협력업체가 골고루 나누어 가지게 될 것임을 다시 한 번 약속합니다. 먼 훗날 삼성의 역사에서 여러분과 내가 함께 이 시대를 빛낸 주인공으로 기록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1993년 3월 22일)”

이 말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직접 한 말이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하지 못할 테니 다시 끄집어 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늘 삼성이 초일류 기업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다. 대한민국을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든 영역에서 좌지우지하는 최고의 공룡과도 같은 리바이어던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이런 사회에서 이건희 말마따나 ‘삼성이 역사에서 한 시대를 빛낼 주인공’으로 기억될 리 만무하다. 한 기업이 모든 열매를 독식하는 사회는 공정한 사회가 아니다.

<욥기>에 보면 리바이어던은 ‘모든 교만한 자들에 대한 왕’이다. 이 괴물은 국민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모양새로 늘 우리를 내려다보던 ‘왕’이었다. 삼성이 꼭 그렇다. 입법, 사법, 행정은 말할 것 없고, 시민 생활경제의 구석구석까지도 다 잡아먹어 치운 지 오래다.

실상, 삼성은 그들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부라퀴가 되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는 기업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세상을 재는 하나의 척도만을 가진 삼성은 비길 만한 권력이 지상에는 하나도 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다. 모든 길은 하나다. 삼성이 통하는 길은 유일무이한 척도가 되는 ‘돈’이 되는 길이다.

삼성이란 리바이어던이 지배하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일 수 없고, 공정한 사회일 수 없다. 무소불위를 권력을 휘두르는 삼성이 존재하는 한 정의로운 사회를 외치는 것은 공허한 헛소리(flatus vicis)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몇십만 부가 팔리고 센델의 강의에 몇천 명이 참석해도 삼성을 향한 구체적인 정의로운 행동이 없으면 도로아미타불일 뿐이다.


아직도 <굿바이 삼성>인가?

이제 막 벌어지고 있는 코리안 시리즈 재벌팀 간의 야구 시합에서 한 쪽을 편들기 위해 ‘굿바이 홈런’을 바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얼마 전 <삼성을 생각한다>(김용철, 사회평론)가 출간되어 의식 있는 독자들의 호응을 받은 바 있다. 삼성 가족의 구질구질한 생활을 엿보고자 하는 관음증 때문에 책을 사본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가지는 중요성은 그간 막연하게 알려졌던 삼성 내부의 비자금을 비롯한 내부의 비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는 점이다.

그 책을 통해 낱낱이 밝혀진 비리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철두철미하게 무대응으로 함구하고 있다. 정녕 아니라면 법적으로 대응할 터인데, 대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 삼성은 ‘사실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이 책을 통해 삼성이 가지는 그 엄청난 불의의 무게를 인식한 독자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삼성과 그 가족을 고발하는 그 책의 고발에 따른 삼성의 내부적 변화와 삼성을 변화시키려는 외부적 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그 책이 출간됨으로써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던 삼성불매 운동이 더욱 활짝 타오르기를 다들 바랬다.

삼성은 김용철 변호사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특검을 통해 빗겨간 그들의 범죄에 대한 법적, 정치적 사면으로 리바이어던 삼성은 ‘너희들은 짖어라,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갈 뿐’이라는 마이웨이를 부르며 지나갔고,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히려 갈수록 삼성의 막강한 힘이 청와대에서, 법정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었을 뿐이다. ‘비즈니스 프렌드리’한 허울 좋은 권력자인 대통령은 삼성의 이건희 앞에선 ‘중소기업과 상생해주세요’라고 머리 조아리며 조근조근 타이르고 빌 뿐이었다.

엄청난 죄로 법을 위반해도 솜방망이 같은 법으로 심판받은 범법자 이건희는 사면을 받았다. 감사의 표시로 이건희는 으레껏 인사치레로 삼성의 협력체와의 상생하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하면 그뿐이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내가 누차에 걸쳐 지시했는데 아직도 그 방안을 찾아보지 못했냐’ 호통 한 마디면 끝이다.

그러니 청와대에서 리바이어던과 그 조무래기들이 모여 머리 맞대고 수군수군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이다. 겨우 알맹이 없이 나오는 허무한 대책에 대해 일상인이 느끼는 것은 기업이 이윤을 남기지 않는 일에 투자를 할 리 없다는 시큰둥한 반응뿐이다.

<굿바이 삼성 - 이건희, 그리고 죽은 정의의 사회와 작별하기>(김용철, 김상봉, 조국, 홍윤기 외, 꾸리에출판사)이 다시 출간되었다. 15명의 법학자, 문학가, 경제학자, 철학자 등이 모여 다시 한 번 꺼져가는 불꽃을 살리려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들은 왜 삼성이 이 땅에 해악을 주고 있는지를 다방면에 관찰해 보고해 주고 있다. 어찌 보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던 새삼스럽지도 않은 내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 발간된 <굿바이 삼성>은 선언적으로 그친 감 있는 삼성불매 운동의 기본적 방향을 예시하고 그 실천적 방안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이 책의 주요 저자인 김상봉은 철학적으로 삼성불매의 운동의 정당성을 깊이 있게 논하면서 삼성을 혁파하는 대안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그것은 삼성을 해체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짝퉁 루이 16세” 이건희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길은?

한 신문의 편집국장이란 분은 ‘더 이상 삼성은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이라고 했다. 오히려 이 책은 삼성을 공존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삼성을 해체하는 방안이 이 땅의 정의를 다시 세우는 길이라는 강한 주장을 편다.

그렇다면 삼성을 해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도대체 왜 이건희 일가를 삼성에서 몰아내고 삼성을 종국에는 해체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가? 그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건희 회장과 삼성이 단순한 기업집단도 자본가도 아니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나라의 근본인 정의를 파괴하는 독재권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쪽, 김상봉)

누가 우리를 먹여 살릴까를 걱정하면서 ‘그래도 삼성만 한 기업이 있느냐’, ‘삼성 하나만이라도 잘 되면 국민이 잘 살지 않겠는가’라고 노심초사하는 분들에게는 이런 말을 들려주고 있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주인이 “‘먹고사니즘’에 빠져 있을 때 국민은 영원히 ‘삼성 왕국’의 ‘신민(臣民)’일 뿐이다. 삼성이 마음대로 이윤을 축적하도록 내버려두면 국민에게도 ‘떡고물’이 떨어지고 국가 경제도 좋아진다는 주술에서 벗어나야 한다”(97쪽, 조국)고 권유하고 있다.

그러니 그 주술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주권자인 국민으로서 자유와 정의가 숨 쉬는 세상에 살 수 있을 것이다. 삼성을 해체하라는 극단적 주장에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굿바이 삼성>은 삼성을 해체한다는 것은 “삼성이라는 기업집단을 무턱대고 망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순환출자의 연결고리로 얽혀 있는 삼성의 계열사들을 자립적인 기업으로 독립시키고, 모든 법질서를 능멸하면서 오직 권리와 권력만을 행사할 뿐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짝퉁 루이 16세’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삼성을 시민 기업으로 만드는 것”(369쪽)을 의미한다고 명확하게 정의한다.

이 시간부터 우리는 삼성의 이건희라는 아이콘을 지워야 한다. 이 책은 이건희 아이콘을 지우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건희 아이콘은 무소불위의 방자함을 기준으로 권력과 자본 만능주의 경제판을 만들어 온 21세기 초반의 대한민국 시민 전체의 욕망, 아니 탐욕을 기반으로 쌓아 올려진 이상형”(110쪽, 홍윤기)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 모두가 이건희라는 아이콘을 획득할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이건희라는 아이콘에 죽자사자 매달린다면 우린 모두 루저(loser)가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우린 벌써 루저일지도 모른다.

한동안 루저였던 김용철 변호사만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용철은 이렇게 고백한다. “반듯한 삶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어려운 게 아니다. 일에 충실할수록 보람도 커지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구겨진 삶을 바로잡기 위한 나의 선택은 단순하게도 낯익은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자리를 있게 해준 열여덟 살의 나에게 감사한다.” (60쪽)

‘낯익은 자리’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선, 자발적으로 순응적인 루저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가치에 따라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구상하는 민주시민’이 되기를 결단해야 한다. 바로 이 책은 이런 루저 되기를 거부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깨어있는 시민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촉구하고 있다.


좋은 사회와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돈이 인간이네(chrēmat' anēr). 가난한 사람치고 고귀하거나 영예로운 이는 없네.’ 이 말은 고대 그리스 서정문학 시대가 배출한 걸출한 서정시인 알카이오스가 한 말이다. 어느 시대고 늘 가난한 사람은 정신적 고상이라곤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부정한 사회, 정의가 살아 숨 쉬지 못하고 죽은 정의가 판치는 사회, 독재자본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도 정의와 좋은 사회를 위해 여러 방면에서 투쟁하고 분투노력 하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를 향한 발걸음을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마이클 센델은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삶’을 고민해야 하고, 나아가 ‘좋은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연대의식과 상호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며 나아가 공동의 희생정신이라는 것이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하나의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정의, 절제, 용기, 중용과 같은 윤리적 가치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좋은 국가’란 도덕적 덕(德)을 갖춘 ‘좋은 시민’(agathos politēs)을 길러내서, 좋은 시민들이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 사회를 말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센델의 정의론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시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서로를 향해 “부자 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지만, 부자가 되기 위해선 다른 이들에 대해 얼마든지 그악스러워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을지는 굳이 질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51-152쪽)

사람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사회, 가난해도 인간답게 대접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우린 원하지 않는가? 홍세화의 지적처럼 이 책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들씌워진 욕망의 노예로서 삼성 왕국의 신민(臣民)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삼성을 거부하는 불편함을 선택함으로써 주체적 시민으로 거듭날 것인가.”

돈과 욕망의 노예보다 자유인으로 산다는 자부감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자유(elutheria)란 지혜로운 자가 목표로 하는 삶의 태도로서 높은 가치를 가지는 덕(德)’이다.  개인적 태도로서 자유는 외적인 상황과 감정적 반응에 의해 방해받거나 제약됨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원하는 바대로 외부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에픽테토스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방해받지 않고 강요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자유롭다. 그의 충동은 제약받지 않는다. 그의 욕구는 그 목적에 도달한다. 그의 혐오는 회피하고자 하는 것에 떨어지지 않는” (『담화록』 4.1.1) ‘영원한 자유’를 향한 정신의 기백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명덕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07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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