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권하는 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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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교육감이 체벌 전면 금지를 선언한 후로 학교 현장은 무척이나 어지러운 듯 보인다. 최소한 언론의 기사로 마주한 상황은 그렇다. 화두는 무너지는 교권이며 주인공은 무기력한 교사와 기세등등한-그리고 되바라진-학생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단지 기자의 펜 끝에서 나온 기사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싶지 않다. 이는 항상 비슷한 기사가 동일한 언론사의 이름을 달고 내 앞에 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나 스스로가 아직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난 지 약 10년도 안 되었으니 가능한 선에서 체벌에 대한 기억을 먼저 되살려 보기로 했다. 1. 중학교 때였을까. 아마 기술 시간이었던 것 같다. 자세한 정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친구가 선생님께 뺨을 맞고 교탁에서 앞문 까지 ‘비행’ 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내 우리 나이 15살이었다. 15살. 2. 수학 문제 못 풀어서 발바닥 45대 맞았던 기억이 난다. 검정 테이프로 칭칭 감아 타격감이 쫄깃했던 지름 약 2.5 센티미터의 나무 몽둥이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다행히 나는 한 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나보다 더 수학에 취미가 없었던 친구들은 항상 그 시간을 싫어했다. 이때 우리 나이 16살이었다. 3. 고등학교 1학년 때. 내 친구는 교실 뒤편에서 선생님한테 약 20분가량 ‘구타’당했다. 정말로 말려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이 당시는 17살. 우리 반 모두 다 같이 체육 시간에 각목으로 맞았던 것도 17살 때였다. 새삼 인간에게 ‘망각’이란 ‘축복’이 있다는 것이 고마운 순간이다. 분명 훨씬 더 어렸을 적부터 시작되었던 ‘사랑의 매’에 대한 기억은 꽤나 많이 희미해졌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어렸을 적부터 ‘매’로 길들여진 우리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둘 중 하나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굴종 또는 상처.
우리는 알게 모르게 폭력에 익숙해지거나 혹은 그로 인한 상처를 스스로 몰래 치유하며 살아왔다. 이러한 경험을 일반적인 학생이라면 모두 공유하는 우리 사회적 배경에서 최근의 언론 기사들과 그에 대한 반응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어울리게 무척이나 다이내믹하다. 학생은 교사의 배를 걷어차고 낄낄대며 한번 때려보라며 조롱한다. 심지어 성적으로 희롱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해당 기사를 마주한 네티즌들은 무너진 교권을 한탄하며 그에 멈추지 않고 ‘사랑의 매’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정말 좋게 여과하여 표현하면 이렇다. 일반적인 반응은 보통 육두문자와 함께 저런 아가들은 맞아도 싸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과거에 자신이 당한 체벌에 대한 ‘미담’과 ‘우리는 이런 것까지 당해 봤어’ 등의 으스댐이다. 다음날에는 더욱 ‘대단한’ 학생이 등장하고 한층 더 ‘불쌍한’ 선생님이 등장한다. 매일매일 더욱 강력한 스토리와 막장 요소를 가미하여 반복되는 기사 속에 사람들의 한탄은 더해간다. ‘요즘 애들’에 대한 분노도 그와 함께 더해간다. 위에 보이는 것처럼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체벌금지에 반대하는 입장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반응은 ‘맞아도 싸다.’ 맞을 짓을 했으니 매로 다스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소식을 기원전 1750년에 태어난 함무라비 왕께서 듣는다면 무척이나 반기시리라. 조금 더 부드러운 의견은 ‘물론 폭력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일대 다수의 상황에서 통제가 필요한 우리나라 학교의 특성상 일정 부분의 폭력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외에도 ‘선생님의 권위가 무너지고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닌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직업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걱정도 들려온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1) 체벌로 해결하자 (2) 어쩔 수 없으니 체벌로 해결하자 (3) 교권이 무너지는 것이 걱정이니 변화는 지양하자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애석하게도 수많은 드라마틱한 언론 기사와 분노의 리플들을 보고도 나는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보다. 사실 군대에서도 이 문제를 가지고 동기들, 선 후임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체벌에 동의했다. 그냥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보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내 생각을 조금 써볼까 한다. 누군가 시원한 답을 주었으면 좋겠다. 먼저 가장 지배적인 ‘맞아도 싸다’는 생각. 이는 함무라비의 탄생 연도만큼이나 낡고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가장 감정에 충실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무논리적이고 그만큼 설득력도 없다. 감정이 가는 대로 행동한다면 과연 인간이 짐승과 다를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 구호에 불과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모두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현대사회에 대해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어들 역시 바로 ‘자유·평등·정의’이다. 또한 우리는 모두 인간의 ‘보편적 인권’을 믿으며 그러한 인권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다. 다만 사회적인 합의에 의해 ‘양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그것을 ‘침해’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는 민주주의가 흔히 생각하는 다수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고 인권이라는 가치는 말 그대로 다른 단위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로써의 존엄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인간의 이성이 인간 스스로에 선물한, 침해받지 말아야 할 개인의 권리에 대해 무척이나 강한 애착을 가지고 산다. 물론 아직 우리나라는 무척 뒤쳐져 있지만 우리 역시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인권’을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산다. 하지만 유독 학교에서는 이러한 의식이 급격히 희미해진다.
나는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30세 이상의 성인에게서 15~17세의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권위적인-때로는 무차별적인-폭력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단순한 경구가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은 이해하겠다. 하지만 아직 자아조차 정립되지 않은 청소년들을,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며 배워나가는 것이 당연한 청소년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폭력’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차용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기사들을 보고도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요즘 애들은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어쩔 수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반문한다. 그럼 수십 년간 수백 만의 학생들이 당해온,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사화되지 못한’ 폭력과 상처는 과연 체벌을 정당화하는데 과연 어떤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같은 이유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묻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 유동적인 상황에 의해 흔들린다면 그것이 하나의 ‘가치’로써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인권이라는 ‘가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권이라는 ‘가치’는 상황에 의해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탱해야 할 기반이다. 그런데 왜 유독 학교에서만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가? 80년대에 거리로 뛰쳐나가 민주주의를 외치며 개인의 정당한 권리를 노래하던 바로 그 국민은, 과연 어떻게 우리의 아이들이 당하는 비민주적 폭력에 대해 이렇게도 관대한가? 최근 군대에서도 구시대적인 폭력 및 가혹행위를 금지하고 나서고 있으며 이제는 이를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시민의식이 높아진 우리 사회에서, 유독 왜 학교에서 이뤄지는 폭력에 대해서는 이토록 관대하냐는 말이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그 자체로 무척 무책임하다. 하지만 우리들 사이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나는 우리들 사이의 ‘어쩔 수 없다’가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아니리라 믿고 싶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체념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 이러한 표현은 무척이나 잘못되었다. ‘어쩔 수 없다’ 가 아니라 현 교육 체계를 ‘바꿀 수 없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틀렸다. ‘바꿀 수 없다’가 아닌 ‘바꿔야 한다’로 반드시 바꿔야 한다. 이제는 교육 또한 변화를 맞이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교원 수를 늘리고 학급당 학생 수를 줄여 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선생님들의 어깨에 과도하게 자리 잡고 있는 행정 업무 또한 행정을 담당하는 전문 인력을 뽑아서 해결해야 할 것이다. 폭력 대신 전문 상담 교사를 배치를 통해 대화를 통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절대 체벌을 배제한 상태에서 지도해야 한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교육자가 되기 위하여 대학교육까지 마치고 학생들보다 최소 10년 이상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정신적으로도 훨씬 더 성숙했을 교원들이, 아직 덜 여물었기에 항상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청소년들을 상대로 대화를 포기하고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교육자의 직무 유기이며 ‘패배’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현재와 같이 강요적 형태의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야’식 합리화와 시혜성 교육을 벗어나, 학생들에게 스스로가 책임과 의무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그 후에도 문제 학생에게는 필요하다면 징계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과 ‘무책임’을 개선하기 위한 처벌이어야지, 개인의 ‘감정’에 의한 사적 처벌이어선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돈 있으면 그렇게 하면 좋지’ 정도로 비용-편익을 따져 ‘고려’할 사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당위’이고 우리가 반드시 나아가야 할 ‘미래상’이다. 우리 교육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현재 뒤늦게나마 학생들에게 주어진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자유로 인한 부작용은 오랜 기간 억압되고 뒤틀려진 체제 속에서 곪았던 고름이 터져 나오는 과정이라고 본다. 교권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또한 과거의 뒤틀린 기반 위에서 세워졌던 어긋난 형태의 교권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무질서’라고 생각한다. 폭력과 그로 인해 얻어진 권위로 다진 교권의 기틀은 절대 건강한 사제지간을 만들지도 못하고, 설사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두 인간 사이에 맺어질 수 있는 훨씬 더 아름다운 관계를 상당 부분 퇴색시킨다고 보았을 때, 현재의 무질서는 우리가 견뎌내야 할 긍정적인 무질서이다. 현재의 폭풍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훨씬 더 건강한 학교에서 건설적인 교권이 새로이 바로 서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이러한 모습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곳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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