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의 전개과정★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교내시위의 분출로부터 발화되었다. 즉 부산대학교의 교내시위에서 발단되고 그 것이 당일 부산 도심지 민중항쟁으로 증폭되었던 시위 첫날을 기준하여 흔히 ‘10ㆍ16 부마항쟁’이라 일컫고 있는 데, 그 이후 이 항쟁에 참여한 주요 집단에 따라서는 자신들이 대대적으로 항쟁에 뛰어 든 날을 기준으로 해서 각기 다른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10월 15일의 부산대 교내시위 기도가 불발로 실패한 뒤 이튿날인 16일 다시 불붙게 된 것이 이 일련의 사태 전반에 걸친 직접적 발단인 것이며, 바로 이 날을 항쟁의 시작점으로 잡아 ‘10ㆍ16 부마항쟁’으로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1)불발된 10월 15일의 시위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교정은 중간고사를 꼭 1주일 남겨 놓은 월요일을 맞고 잇었다. 쾌청한 가을날씨에 도서관(지금의 구 도서관)은 시험준비를 하는 학생들로 붐볐고 대운동장(지금은 넉넉한 터) 스탠드에선 많은 학생들이 교련 과목수업을 대체하여 오전 9시부터 학군단 정기사열을 참관하고 있었다, 10시쯤 되자 조용하던 교정이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똑같이 ‘오전 10시 도서관 앞’으로 모일 것을 촉구하는 두 종류의 등사판 유인물이 교내 곳곳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공대 이진걸의 팀이 뿌린 <민주선언문>과 법정대 신재식의 팀이 뿌린 <민주투쟁선언문>이 그 것이었다.
공대 이진걸의 팀과 법정대 신재식의 팀으로 각자 진행되던 시위준비가 ‘15일 오전 10시 도서관 앞’이라는 하나의 행동지침으로 통일된 채 결정될 수 이었던 것은 이진걸 쪽이든 신재식 쪽이든 인원동원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이념 서클들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구조적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즉 이진걸과 신재식이 각자 당시 공개 써클 ‘아카데미’를 이끌던 김종세나 비공개 스터디 그룹의 이호철 등과 개별적으로 접촉하는 과정에서 최손한 시위 일시와 장소는 중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제들은 시간이 촉박하여 합의되지 못하였다, 15일 두 종류의 유인물이 각각 뿌려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진걸과 그 동료들은 유인물이 든 가방을 각각 나눠 들고 도서관과 본관, 문창회관, 대운동장 스탠드 등지를 돌며 <민주 선언문>을 뿌렸다. 처음엔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누구 하나 만류하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민주투쟁선언문>을 준비한 법정대 신재식과 그 동료들도 본관 강의실과 미리내 골 주변 벤치를 돌아다니며 유인물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모두에게 말한 것처럼 이 날의 시위는 실패했다. 선언문에 지정된 10시에 학생들이 그렇게 많이 모이지도 않았고, 누군가 과감히 먼저 주도하는 적극적 선동도 없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채 모이지 않았고 사복경찰들이 깔려 있었다. 학생들로부터 별다른 방응도 읽을 수 없었다. 본관쪽도 마찬가지였다. 이진걸은 후에 “당시 10시께 유인물을 뿌리면서 집결시간을 10시로 잡은게 실패의 주 원인이었다”고 진단했다.
(2)10ㆍ16 교내 시위와 시가지 진출
이진걸의 <민주 선언문>과 신재식의 <민주투쟁선언문> 뿌려진 10월 15일의 시위가 불발로 끝나자 학생들은 즉각 16일의 시위를 모의했다. 대략 4개의 그룹이 다음날의 결행을 바쁘게 준비하였다. 법정대의 신재식 그룹이 내일 다시 시작키로 했고, 언더 써클의 이호철ㆍ노재열 그룹, 아카데미의 김종세 그룹, 상대 경제사학과의 정광민 그룹이 그들이었다. 여기서 상대 경제사학회란 경제학과 학생들의 자치적이며 공개적인 스터디 그룹으로서 2학년 복학생 박현호ㆍ여성모 등이 이끌고 있었으며, 정광민도 당연히 이 그룹의 멤버였다.
이호철과 노재열은 김종세와 만나 다음의 대처 방안을 논의한 끝에 일단 “16일이다”라는 소문부터 내기로 하고 이호철은 이를 자신의 조직에 보고했다. 그리고 이들 각 그룹은 그날 오후 내내 내일의 거사를 위한 인원동원과 시위계획을 짜느라 동분서주하였다. 이호철, 김종세 등은 특히 아카데미, 성아, 정통 예술 연구회, 경제사학회, 영목, 동녘 등등 공개기구들의 의식 잇는 멤버들을 집중적으로 접촉하였다. 이 때 정광민은 같은 경제학과의 전도걸, 황헌규, 경영학과의 박준석 등 친구들을 만나 내일의 시위 계획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리고 김종세, 노재열 등에게도 인원동원을 부탁하고는, 등사기 입수 등 유인물 제작을 위한 준비에 뛰어들었다. 정광민 그룹이 본관 뒤 상대(지금은 자연과학관)에서 인원을 모아오면 이호철, 김종세 등이 도서관(지금의 구 도서관) 앞에 모아 놓은 인원과 합류시킨다는 기본적인 계획도 서게 되었다. 이처럼 <민주 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의 돌연한 파고가 조용하던 교정에 퍼져 나간 그 오후, 한편에선 내일의 제2시위를 위한 준비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미리 써두었던 <선언문>이라는 제하의 초안을 놓고 정광민은 학과 친구 전도걸과 함께 그의 집 다락방에서 유인물 등사에 들어가 뜬눈으로 밤을 밝히며 500여장을 밀어낸다. 10월 16일 아침 10시가 가까워지자, 정광민은 인문사회관(지금의 제2사범관)으로 뛰어들어 갔다. 박준석과 엄태언(모두 경영 2)에게 경영학과를, 이성식(무역2)을 만나서는 무역학과를 각각 부탁하면서 유인물을 쥐어 주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신의 급우들인 경제학과 2학년생들이 있는 306호 강의실로 들이닥쳤다. 정광민은 가방을 열러 <선언문>을 나눠 준 뒤 교단으로 올라가 두 주먹을 휘두르며 열변을 토했다. 40여명의 급우들이 일제히 의자를 박차고 밖으로 몰려 나갔다. 인근의 경영, 무역, 회계학과 학생들까지 가세하여 인문사회관 앞에는 순식간에 100여명의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독재 타도!”의 구호가 터져 나왔다.
정광민은 <선언문>의 뒷면에다 검은 싸인펜으로 ‘자유’라고 크게 휘갈겨 쓴 종이 피켓을 두 손으로 쳐든 채 4열로 줄지은 대열을 이끌었다. 상대 앞에 멈추어 학우들의 동참을 호소하던 대열 속에서 “우리의 소원은 자유…”하고 뜨거운 노래가 터져 나왔다.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의 ‘통일’부분을 ‘자유’로 바꾼 것이었다. 수업을 받고 있던 학생들도 놀라서 창문을 열고 내다 보았다. 대열은 미라보 다리를 건너 도서관쪽으로 나아갔다. ‘독재 타도!“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가 도서관 앞에 이르렀을 때는 인원이 200여 명 쯤으로 불어나 있었다.
도서관 앞 잔디밭에는 이미 또 다른 200여 명쯤의 학생들이 모여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호철, 노재열, 김종세 등이 전날 오후부터 지금까지 동분서주한 결과였다. 도서관 앞에서 두 팀은 자연스럽게 합류하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일거에 400 ~ 500여명으로 증강되었다. ‘아침이슬’ ‘선구자’ ‘ 애국가’ ‘교가’ ‘기다리는 마음’ 등 절절한 가락이 학생들의 가슴과 가슴을 밟으며 이어갔다. 특히 “외치노니 학문의 자유 이 곳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 부산대학교”라고 울려 퍼진 교가를 합창했을 때, 학생들의 눈에선 눈물이 글썽거렸다.
박기채 총장을 비롯한 보직교수들이 몰려와 “학생들이 이러면 안된다”며 해산을 종용했다. 이에 학생들은 “어용교수 물러가라” 고 되받아쳤다. 바로 이 불길 속으로 사복경찰이 뛰어들었다. 도서관 열람실을 돌며 학우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밖으로 나오던 정광민의 멱살을 두명의 사복형사가 움켜잡자, 주위의 학생들이 우루루 몰려가 이들을 에워싸고 뭇매를 가하며 떠밀었다. 두 형사는 3미터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도서관 3층에서 사진촬영을 하던 형사들도 학생들에게 쫓겨 카메라를 버리고 도망쳤다.
형사들과의 난투극은 학생들을 격분시켰다. 마침내 500~600여명의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효원회관 쪽 계단으로 뛰기 시작했다. 대열은 도서관 계단을 내려가서 본관 뒤 공대2호관 (현 재료관)을 지나고 미리내 골을 돌아 스탠드를 내려 밟으며 운동장을 향해 달려갔다. 뒤따라 달려온 학생들이 속속 대열로 빨려들었다. 어느 새 2,000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며 운동장을 한 바퀴 돈 뒤 신정문으로 진출하였다. 투석전이 벌어졌다.
이윽고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자 최루 가스를 내품으며 전투경찰 진압부대가 물밀듯이 교문 안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일순간 시위대열은 흩어지고 학생들은 경찰에 밀려 운동장과 본관 쪽으로 후퇴했다. 따가운 최루 가스가 10월의 교정을 온통 회색빛으로 뒤덮었다. 시꺼먼 가스 차와 기동 진압대가 운동장과 본관 진입도로를 종횡무진 헤집고 다녔다. 운동장으로 들어온 가스 차는 깔아뭉개기라도 할 듯이 학생들을 스탠드 바로 밑까지 몰아부쳤다. 그리고는 본관 앞까지 올라와 최루 가스를 마구 뿜어대었다. 학생들이 그래도 마지막까지 놓을 수 없었던 신성한 학원의 권위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마저 여지없이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의 적대감은 극에 달했다. 운동장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학생들과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까지 밖으로 나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흩어지던 학생들 사이에서 “도서관 앞에서 다시 모이자!” 는 외침이 들려왔다.
오전 11시 쯤 도서관 앞엔 다시 2,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다시 정광민이 나섰다. 그는 경제사학회장 박현호가 전날 받아 둔 이진걸의 <민주 선언문>을 건네주자 그것을 받아들고 낭독한 뒤 구호를 선창했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학원사찰 중지하라!”
“구속학생 석방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
구호 제창을 끝내고 학생들 사이에서 시내 진출의 목표지를 놓고 잠시 의견이 오갔다. 정광민도, 써클 쪽의 학생들도 교외진출 계획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지만, 이제 사태는 계획 같은 것이 문제될 수 없게 되었다. 온천장, 부산역, 남포동 등 몇 가지 지점이 거론되었으나 결론을 내지는 못하였다. 우선 학교를 뚫고 나가기로 했다.
대열을 재정비한 학생들이 독수리탑을 돌아 신정문으로 내리뛰기 시작했다. 교정 곳곳에서 구름같이 모여든 학생들이 운동장을 돌며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쳐댔다. 그날 교정에 있던 학생들의 절반은 족히 대열에 참여하였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대열은 대운동장과 신정문에 이르는 공간을 꽉 메운 4.000여명의 물결을 이루며 넘실대었다. 신정문을 사수하는 진압부대는 500여명에 불과했다. 이제 거의 학생들의 결단만 남은 듯이 보였다.
학생들의 교외친출 시도에 맨 먼저 뚫린 곳은 구 정문 쪽이었다. 구정문으로 내려간 1,000여명의 학생들은 구 정문 옆 블록 담장을 무너뜨렸다. 그 곳을 지키고 있던 진압부대 100여명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 절반 정도인 500여명의 학생들이 처음으로 교외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이들은 구 정문 우측의 주택가 골목 사이로 빠진 뒤 식물원 입구를 거쳐 온천장 방면으로 진출하였다(제 1진). 한편 운동장을 돌며 시위를 하고 있던 대열의 주류 속에서 일단의 학생들이 갑자기 사대부고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사대부고 정문에서 진압부대와 접전을 벌이던 중 역시 블록 담장을 무너뜨리며 1,000명 쯤이 또 바깥으로 밀고 나갔다. 이들은 부곡동 산업도로를 거쳐 온천장 방면으로 진출하였다(제 2진). 제 2진이 진출한 지 15분 내지 20분 쯤 지났을 때, 경찰의 강공에 밀려 잠시 흩어졌다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학생 600~700여명이 바로 그 곳으로 또 한번 뚫고 나갔다. 이들도 제 2진이 갔던 길을 따라 산업도록를 거쳐 온천장 방면으로 진출하였다(제 3진).
제 1진은 온천장 금강원을 통과한 뒤 뒤따라온 제 2진의 주류와 합류하면서 원예고교→금성사 (지금의 럭키아파트)→사직동 미남 로터리에 이르렀고, 그 곳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진압부대를 인근 공사장의 자갈을 투석하여 대패시킨 뒤 거제리 군부대 앞까지 진출하였는데, 거기서 진압부대와의 접전 끝에 “2시 부산역 집결”을 전파하며 해산하여 각기 시내로 진출하였다.
제 2진은 “유신 철폐” “독재 타도”의 구호를 외치며 산업도로로 진출하여 고속버스나 택시의 승객, 행인들로부터 대환영과 격려의 박수를 받으며 행진해 갔다. 그러나 온천 입구 사거리를 지난 직후 잔혹한 진압부대와 부딪혀 많은 학생이 구타당하며 연행되는 가운데, 주류는 우측 금성사 방향으로 빠져 제 1진과 합류하였고 다른 일부는 온천천을 건너거나 뒤로 되돌아 나오다가 곧 뒤따라 온 제 3진에 흡수되었다.
가장 조직적인 모습을 보였던 제 3진은 산업도로를 타고 나오다 온천 입구 사거리에서 방향을 틀어 명륜동 쪽으로 나아갔다. 앞서 흩어진 2진의 일부를 그 과정에서 흡수하며 명륜동→동해 로터리→동래 경찰서→교대 입구까지 무난히 진출했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언론 자유” “학원 자유”와 같은 구호가 물결칠 때마다 거리를 지나는 기사나 승객 모두가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흔들거나 박수를 쳤고,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격려해 주었다. 확실히, 시민들이 지지한 것은 정권 쪽이 아니라 학생 시위대임이 점점 더 분명해 지고 있었다. 제 3진의 경우 행진 도중 내내 중간에 해산당할 시는 “2시 시청앞 집결”이라는 약속이 앞에서 뒤로 차근차근 전달되었다. 그런데 사직동과 거제리로 빠지지 않는 한, 교대 앞은 시내 진출을 위해 반드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목지점이었다. 경찰은 그 곳에 400여명의 진압부대를 배치해 놓고 완강한 공세를 취하였다. 최루탄을 퍼붓고 대열 속으로 뛰어든 전경들은 마구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연행했다. 그리하여 “시청 앞 집결” 을 외치며 3진 역시 일단 해산하여 하나하나 버스로 올라탔다.
한편 교내에 남아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는 “2시 부산역 집결”이 전파되었다. 학생들은 한내시위의 한계를 명백히 인식했고 시내진출을 위하여 교문을 빠져나와 제각기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1, 2, 3진 및 교내 시위대의 시내 진출로 당시 시내행 18, 19번 등의 노선 버스는 발디딜 틈도 없이 꽉꽉 들어찼다. 차비를 받으려 하지 않는 안내양, 어깨를 치거나 손을 잡아주는 승객, 격려의 말을 거네는 운전기사…. 한 대 한 대의 버스가 모두 시위버스였다. 버스를 차단하기 위해 경찰차가 뒤쫓아 오면 운전기사는 더 빨리 차를 몰았다.
부산대 교문의 제 1방어선이 무너진 경찰은 서면을 제 2방어선으로 잡고 학생 시위대의 시내 진입을 막기 위해 일대 검문에 나섰다. 버스들을 세우고 학생차림의 남녀는 무조건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내 서면에서의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곳에서 버스를 한 대 씩 세운다면 차량교통은 완전히 마비되고 만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었다. 당시 서면 로터리는 하루 10만대의 차량들이 오가는 가장 번잡한 부산의 교통 중심지였던 것이다. 버스 대열이 끝도 없이 줄을 이어 길을 막아 나갔다. 하는 수 없이 경찰은 서면을 포기했다. 그 대신 부산역을 네 3방어선으로 잡았다. 시경당국은 학생들이 부산역에 집결한다는 정보에 따라 부산역버스를 내린 학생들이 속속 연행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연행되는 학생들은 끌려가면서도 버스를 향해 내리지 말라는 손짓을 계속했다. 경찰 또한 학생들을 가득 태운 버스들이 잇달아 부산역 정류소에 닿자 승강구 문을 열지 못하게 하고 시청 쪽으로 계속 가도록 강요했다. 서면에서의 실패를 되풀이할 위험도 있거니와 버스에 탄 학생들이 워낙 많아서 그 모든 학생을 끌어내린다는 것도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엔 아예 정류소에 버스가 멈추지도 못하게 하고 그냥 통과하도록 했다. 경찰의 제 3방어선도 속절없이 무너져버렸다.
1979년 10월 16일 유신독재 철폐를 부르짖으며 감행된 부산대학교의 교내시위는 학생 시위대가 시가지까지 진출하는 폭발적인 상황으로 발전되었다. 이날 낮 학생 시위대는 남포동과 광복동을 중심으로 한 중구 지역 도심지에서 잇달아 시위를 계속하였는데, 학생들의 이 도심지 가두투쟁이 마침내 민중들과 결합ㆍ증폭되고 인접한 서구 및 동구 지역, 나아가 마산 지역으로까지 확산됨으로써 거대한 ‘부마민주항쟁’의 물결로 나타났던 것이다.
(1)도심지 민중항쟁의 폭발
처음 2시경 광복동과 창선동, 남포동 일대에서 불붙고 국제시장, 신창동, 보수동, 대청동으로 번져가던 시위가 4시 쯤을 전후해서는 계속 확산되어갔다.
경찰과 시위대 간에는 쫓고 쫓기는 공방전이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학생들이 요리조리 골목을 빠져 나가면, 경찰은 그 꼬리를 따라다니며 힘만 소모했다.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 혹은 수천 명의 시위대가 놀라운 자생력으로 흩어졌다 결집되고 흩어졌다 또 결집되어 남포동, 광복동, 국제시장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휩쓸고 다녔다. 경찰은 속수무책이었다.
시위에 직접 나서지않은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열띤 지지를 보냈다. 시위대가 지나가는 골목마다, 다방이나 빌딩의 사무실마다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흔들어 환호하거나 힘찬 박수로 격려와 성원을 보내었고, 경찰에겐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건물 위에서는 추격하는 경찰에게 재떨이, 화분, 병 등을 내리 던져 진압을 방해하는가 하면, 부산 데파트 옥상에선 시위대 위로 색종이 가루가 뿌려 지기도 했다. 가게의 상인들은 쫓기는 학생들을 얼른 가게 안으로 숨기고 셔터를 내려 버리기도 하였다. 이미 경찰은 학생 시위대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온 시민을 상대로 싸워야했다. 시위의 양상은 단순한 학생 데모의 차원을 넘어서고 이었던 것이다. 학생과 시민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민중항쟁’의 성격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몰리는 쪽은 학생이 아니라 경찰이었다. 행동으로는 학생들이 쫓기고 있었지만, 심리적으로는 경찰이 몰리고 있었다, 시민들의 학생 시위대를 향한 응원은, 이처럼 쫓는 편과 쫓기는 편을 뒤바꿔 놓았던 것이다.
야간시위와 더불어 본격적인 민중항쟁으로의 전화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의 시위는 분명 학생들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지만 어둠이 깔리면서부터 시위의 주도권은 점차 시민들에게 넘어가고 시위 양상도 훨씬 격렬해 지게 되었다. 저녁 7시 경 도심의 대로가 시위 인파로 넘쳐 흘렀다. 부영극장 앞 육고를 중심으로 시청앞에서 충무동에 이르는 6차선 대로와 광복동 일대를 꽉 메운 장대한 인파의 물결이 도심의 모든 것을 떠밀어 낼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청앞과 충무동 입구 사이를 왔다 갔다하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5만여 인파의 장엄한 행렬은 밀려 왔다 밀려 갔다하는 거대한 조수처럼 보였다. 이제 대학생은 소수였다. 계층과 신분을 뛰어넘은 다양한 사람들이 말 그대로의 혼연일체를 이루었다. 유신정권 최초이자 유일의 민중항쟁이 항도 부산의 도심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경찰진압대가 공격해 들어오자 곧바로 민중들의 격렬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도심의 밤하늘이 온통 희뿌연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민중은 돌과 병으로 대항하였고 공봉에는 가로수 버팀목을 뽑아 맞섰다. 밀고 밀리는 대접전이 벌어졌다. 한낮에 학생들의 시위가 터진 이래 한번도 공세의 기선을 잡지 못한 경찰의 진압행태는 갈수록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부상당한 사람이 업히어 병원으로 향하는 모습은 쌓여있던 민중의 분노에 더욱 큰 불을 붙였다,
시위대는 물리적은 목표물을 겨냥하여 더욱 과감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파출소와 언론기관이 시위대의 첫째가는 표적이었다. 이 날 시위대는 수백명씩 게릴라처럼 몰려다니며 파출소를 공격했다. 이날 밤 자정을 넘어 새벽 1시까지 계속된 민중들의 항쟁을 통하여 모두 11개의 파출소가 파괴되었고, 여기저기 파출소에서 떼내어 온 대통령의 사진도 불태워졌다.
(2)항쟁의 확산
4월 혁명 이래 초유의 대규모 민중항쟁이 폭발하였던 전 날의 상황을 국내 언론들은 결코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박정권은 결코 더 이상 존립되어서는 안될 정권임이 보기 좋게 입증될 일이었다. 그러나 시민들 사이에선 전 날의 충격적인 항쟁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도시내의 모든 가정과 공장, 사무실, 시장에서 어젯밤의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아침부터 뜨거운 화제로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이날 10월 17일은 유신 선포 7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오전 10시 점일동 구조방 터에 위치한 부산시민회관에서는 각급 기관장과 공무원등이 모여 기념행사를 갖고 유신체제를 더욱 굳게 다져 나갈 것을 결의하고 있었다. 시내에는 경찰과 진압 차량들이 요소요소에 진을 치고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정오부터 학생들이 광복동 등지에 자리잡기 시작하자 교수들도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 함께 나와 시내 중심가는 온통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런 가운데 오후 3시 쯤, 바로 코앞의 시청에서는 내무부 장관 구자춘이 기자 회견을 갖고있었다. 전 날 시위의 진압실패 책임을 물어 이미 아침에 부산시경 국장을 해임시킨 그는 기자회견에서 경찰병력을 충분히 증강시킬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국기 하기식 애국가 방송이 끝날 무렵 부영극장 주위의 군중들 속에서 다시 육성의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이를 계기로 몇 갈래의 시위대가 형성되어 남포동 및 자갈치시장 골목길을 누비며 기습적인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다시 16일 밤의 항쟁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시내 곳곳에서 시위 대열이 형성되고 맹렬한 접전이 벌어졌다 오늘도 경찰은 시민 모두를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새벽 1시 반까지 계속된 이 날의 항쟁에서도 21개의 파출소가 파손되었고 관공서와 언론기관 등이 습격당했다.
(3) 박정권의 무력진압과 부산지역 항쟁의 종결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박정권은 18일 밤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2개 여단의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유신체제 등장 7년만에 다시 발동된 비상계엄령이었다. 거리마다 계엄포고문과 함께 박정희의 담화문이 나붙었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각 대학교와 관공서 앞에 일제히 배치되었다. 부산대와 동아대 등의 운동장엔 군인들이 캠프를 치고 정문은 착검한 무장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여단장 박희도 준장이 이끌고 온 한 공수부대는 얼굴에 시꺼먼 위장 크림을 칠한 채 참나무로 깎아 만든 몽둥이로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였다. 길을 걷다가 그들과 마주친 20대 청년들은 그들이 이유도 없이 휘두르는 무차별 구타를 참아 내야만했다.
빗솟의 어둠이 깔린 18일 저녁 8시 경, 남포동 동명극장 앞에 모여있던 학생과 시민 300여명은 스크럼을 짜고 나아갔고 순식간에 2천여명으로 불어나며 시청으로 향해 전진했다. 하지만 공수부대가 최루탄 공세를 가하며 돌진해들어왔고 그들의 개머리판에 무많은 시민들이 부상당했다. 시위대는 비내리는 남포동, 광복동 거리로 뿔뿔이 흩어졌다. 부산시내는 다시금 강요된 침묵속으로 빠져들었고 연사흘에 걸친 부산 지역의 민두항쟁은 이렇게 끝이났다. 그러나 이날 항쟁의 불길은 이미 이웃 도시 마산으로 확산되어 맹렬히 타오르고 있던 중이었다. 경남대생과 마산대생을 선두로 시위에 나선 일반시민들은 여기서도 밤이 되자 공화당사ㆍ파출소ㆍ방송국을 습격하는 등 부산 이상으로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다음 날인 19일 저녁에는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상당수의 고교생까지 합세,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박정권은 이 역시 20일을 기해 마산ㆍ창원에 위수령을 선포, 강경무력진압을 폄으로써 마산항쟁도 막을 내리게 된다.
'5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잊지 말자 518 (0) | 2011.05.19 |
---|---|
[스크랩] 박 대통령 암살사건(10.26사건) (0) | 2011.05.17 |
[스크랩] 화려한 휴가의 진실 (0) | 2008.09.08 |
[스크랩] 80. 5 18 광주에 있던 독일 특파원 촬영한 영상 2 (0) | 2008.09.08 |
잊혀지는 5.18, 변하지 않는 5.18 (0) | 2008.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