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은 왜 패했나(2) - 하일, 히틀러!!
<이해찬은 "히틀러도 선거를 통해 당선됐지 쿠데타를 한 사람이 아니다. 히틀러가… 재앙을 가져왔듯 이명박도 그에 못지않은 재앙을 불러일으킬 사람"이라고 말했다.>
땅박의 웃지 못할 당선과 가장 흔히 비교되는 것이 히틀러, 즉 나치의 집권 과정이다. 서프에서도 이미 몇몇 논객들이 이를 언급한 바 있다. 확실히, 전혀 자격이 안 되는 인물이 국민의 '합법적' 동의 아래 권좌에 올랐다는 점, 그 국민은 '불안'과 '공포'에 '이끌려' 극단의 선택을 했다는 점, 그리고 뒤늦게 사람들이 그 선택을 후회했거나 후회하게 될 거라는 점에서 땅박과 히틀러는 꽤 닮았다. 좀 길더라도 비교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이마르의 추억
독일에 '공화국'이 도입된 것은 1919년 바이마르가 처음이다. 그전까지 독일은 지주계급, 융커의 지배하에 있는 왕정 또는 제정 체제였다. 프랑스가 1789년에 공화정을 도입했고 영국의 시민혁명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는데, 독일은 대 철학자 헤겔마저 융커 체제를 "이성적"이라고 평가했으니 독일의 정신이라는 게 얼마나 후진적이었나를 알 수 있다.
독일인들에게, 1차 대전 패전이라는 외생변수로 인한 혁명에 의해 탄생했고, 출범 후에도 공화정을 위협하는 왕정복고 세력이 여전했으며 토착적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 부족, 막대한 전쟁배상금이라는 빚 등 각종 한계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의 공화국은 새로운 정치적 실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대목에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떠오른다.)
바이마르 헌법은 "자유주의·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면서 20세기적 사회국가의 이념을 가미한 헌법으로, 현대 헌법상 처음으로 인간다운 생존권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선구적, 모범적 모델이다. 헌법 제1조는 "독일은 공화국이며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다. 수백 년간 반(半)봉건 체제 아래에 있던 독일인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낯설고 충격적일 것인가. 익숙한 것의 갑작스런 중단이었다. 이제 권력은 토지가 아니라 인민들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독일인들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이 공화국이, 더구나 아직 숱한 적들에 둘러싸인 갓 태어난 시대정신은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
공화국은 아직도 강력한 금권을 휘두르고 있는 극우파들이나 러시아 혁명으로 들떠있던 좌파 모두로부터 공격받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국민은 새로운 정치실험을 끈기 있게 지켜보고자 하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중산층과 하층민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빵'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비록 높은 이상과 가치를 가지고 있더라도, 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신속히 철회할 수 있다는 의사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어떤 조건이 주어지면 상황은 급속히 '위기'로 변하게 되고, 그 '위기' 상황에서는 상식과 원칙을 초월한 '과격'한 것이 끼어들어 '광신'적 지지를 받게 마련이다. 그럭저럭 버텨나가던 바이마르에 결정적 위기가 닥쳤다. 1920년대 후반 경제 대공황(우리의 IMF 사태 급)이 닥쳐온 것이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나치)이다. 과격하기로 이름난 나치가 묻지마 지지를 받아가는 이상, 바이마르의 소멸은 시간문제가 된다.
합법적으로 화려하게
나치즘은 국민의 동의를 받아 '합법적'으로 '민주주의의 꽃' 바이마르를 꺾고 집권했다. 일정한 법칙에 따르는 것처럼, 마치 되돌릴 수 없는 운명 또는 수순이라도 되는 듯 이루어졌다.
재밌는 것은, 나치는 바이마르의 경제가 안정적일 때 잠잠했고, 경제가 어려울 때 설쳐댔다는 점이다. 별 볼일 없던 나치당은 대공황이 터지자 화려하게 정치의 전면으로 부상한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국민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이마르는 졸지에 '저주' 받는 체제로 전락했다. 이럴 때는 가장 파괴적이고 행동력 있어 보이는 세력이 정권을 획득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물론 도덕성과 보편적 상식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히틀러는 다수의 지지만 있으면 '누구나' 집권 가능한 보통선거의 허점을 통해 '광기의 정통성'을 확보했고, 그것을 통해 결국 3 제국의 '총통'이 되었다. 민주주의가 그 '절차'에 의해 스스로 붕괴된 셈이다. '집권의 자격'이 전혀 검증되지 못했다. 국민이 아직 자격을 검증할 만한 수준을 갖추지 못했거나, 아니면 어떤 세력이 개입되어 국민에게 검증할 필요가 뭐 있겠냐고 선동했다.
독일 사람들은 새로운 현상인 바이마르를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있는 경험 또는 능력이 부족했다. 해석을 게을리했다. 그리하여 불안과 공포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편리하게 뒤집어씌우면서 위안을 삼고 싶어 했다. 누가 대신하여 자기 밥 먹여주기를 기대했다. '무능'해 보이는 진보 사회민주당 대신, '행동적' 나치가 자신의 '돈'을 더 잘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자본가, 은행가, 지주들은 나치즘을 공산주의와 맞설 유일한 보루로 여겼고, 중산층은 애써 모은 '재산'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으며, 실직자들과 서민들은 히틀러가 자신의 삶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히틀러-괴벨스의 궤변에 열광했고 집단 최면에 걸려 광기마저 용인했다.
나치의 언어들
나치 선동 선전의 핵심은, 단순한 언어들을 취사선택하여 그것들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불안과 두려움에 연계시키는 것에 있다. 그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언어는 계속적으로 재생되어야 한다. ('왜 하필 지금', '코드인사', '진보=무능', '민생파탄', '서민갱제', '세금폭탄', '좌파=빨갱이' 등등)
히틀러가 말했다던가.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다 보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무엇보다 한없는 증오를 활용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이게 누구 때문인가?" 대중들이 답한다. "무능한 바이마르 때문이다." 히틀러는 공포와 증오의 에너지를 흡수, 간단히 집권에 성공한다.
1930.9.14일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의석은 12석에서 107석으로 늘어났다. 1932.7월 선거에서 제1당이 된 이후 히틀러는 단독정부 구성권, 연방의회 해산권, (대통령 동의가 필요없는) 법률제정권을 얻었으며, 나치를 제외한 타정당 및 노동조합을 불법화했다. 1년 후 히틀러는 수상과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장악한다. 제국 탄생.
잠시 히틀러와 나치의 '성격'을 살펴보자. 히틀러는 "부랑자였으며 민주주의의 평생의 원수"였고, "거짓과 선전으로 총통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나치는 사병(돌격대) 양성, 테러, 폭력, 위장방화, 정적암살, 쿠데타(실패), 무력시위 및 봉기, 숙청 등등 온갖 짓을 일삼아왔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실은 국민이 선거를 통해 '표'를 몰아줌으로써 정당화되거나 잊혀졌다.
'영웅' 또는 '초인'
대중들에게 히틀러는 '빵'을 주는 '영웅'이었다. 실제로 히틀러만큼 철저하게 개인의 의지만으로 일국의 국민생활을 온통 뒤바꿔 놓은 정치가는 그 유례가 없다. 히틀러는 게르만족의 전설 <니벨룽겐의 노래>에 나오는 영웅 지크프리트였고,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모든 가치 전도'가 행해지고 '본능'에 최상위의 권위가 부여되는 <초인> 내지 <금발의 야수>였다.
게르만의 영웅들은 "선과 악의 테두리를 뛰어넘고", 비합리주의, 반도적주의, 반 민주주의적 특징을 가진다. 또 보기와는 달리 매우 귀족주의적이다. 나치 지도자들은 대부분 노동을 혐오하는 소시민 룸펜 출신들이었다. 독일인들은 디오니소스적 인물을 우상화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역사가 그랬고 경험하고 배운 환경이 그랬으니 당연하다. 독일은 극단과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계급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나치즘의 등장은, 히틀러 개인의 문제가 아닌, 독일의 후진성이 낳은 역사적, 사회적인 필연적 귀결이다.
나치즘은 '사상'이 아니라, 하나의 '행동'이었고 '슬로건'이었다. "니들 배고프지? 해결해줄 게 나에게 힘을 몰아줘", 이런 식이었다. 나치의 행동은 고유의 '정책'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정세 판단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들의 비전이란 <권력에의 의지>가 전부였다. 다른 말로 하면 정권 탈취다. 히틀러는 권력의 쟁취와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적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히틀러의 강렬한 저돌성과 비상한 계산능력이 그를 우두머리에 오르도록 도와줬다. '어떻게든 출세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의였다.
땅박의 등장
땅박이나 히틀러는 <인격>이나 <지성>은 모자라 보임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유능한' 지도자로 비쳤다. 사람들은 절단 난 '갱제'를 땅박과 히틀러가 "무조건 살릴 것"이라고 믿는다. 히틀러가 초인인 것처럼 땅박은 근육질의 영웅이다. 강남 부자들도 서민들도 찍었다. 재벌도 찍고 노조도 찍었다. 종부세를 내는 사람도 평생 내지 않을 사람도 찍었다. '청계천'이라는 신화와 전설은, 땅박을 모든 것 뛰어넘는 영웅으로 만들었다. 정책, 이념, 역사 등등은 여기서 전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 땅박이 마이다스의 손을 대면, 교육 및 의보 민영화 하에서도 사교육비와 보험료가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1차 대전이 '바이마르'를 만들어냈다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만들어낸 것은 IMF 위기 때문이었다. 국민은 그때, 강권통치 수단 없이는 수구들은, 실제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무능'할 뿐 아니라 더더군다나 매우 '부패'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 교체를 단행한다. 사람들은 기댈 지역주의가 없는 단기필마의 노무현마저 밀어주기로 결심했다. 상식과 원칙을 견지하는 개혁세력이 수구들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매우 비관적일지 모르지만, IMF 금융위기가 없었다면 과연 국민은 DJ, 노무현을 선택했을까. 마찬가지로 강경대나 이한열의 희생이 없었다면 6월 혁명은 있었을 것인가. 기득권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여론의 조작은,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얼마 전 입증되지 않았는가. '조작'을 허용치 않을 정도로 명백한 위기(1차 대전 패전, IMF)가 닥치지 않았더래도 참여정부와 바이마르 정부는 순리적으로 자연스레 등장했을 것인가. 역사는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 노무현을 택했던 사람들이, 바이마르 헌법을 만들어냈던 사람들이 똑같이 땅박과 히틀러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결정적 차이점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분명 대공황 쓰나미가 닥쳐왔다. 실제로 민생은 파탄 직전이었다. 참여정부에도 거대한 해일이 몰려왔다. 바로 '민생 파탄'. 먹고살기 힘들고 취직 안 되는 데 웬 세금 폭탄, 웬 북한 퍼주기냐는 분노와 절망, '노무현 탓'의 쓰나미. 무능보다는 부패한 것이 훨씬 낫다는 자기 최면의 쓰나미, 진보개혁에 쏟아지는 '철없는 선무당'이라는 저주의 쓰나미. 쓰나미에 독일과 한국의 중산층과 서민들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갔다. 히틀러가 땅박이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랐다. 작심하고 묻지마 지지를 선언한다. 히틀러와 땅박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정권교체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단, 양자 간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여 극단의 선택을 하게 한 것은 하나는 진짜였고 하나는 가짜였다. 바이마르가 경제위기에 빠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지만, 참여정부는 역대 정부 중 가장 멀쩡하고 건전한 정부였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다.
수구들은 반격을 시도했다. 히틀러를 앞세운 구체제파들에게 다행인 것은 독일인들은 바이마르를 끝까지 지지할 준비를 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신생 공화국은 숱한 난제와 적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력을 제거하는데 당연히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들은 이를 '혼란'과 '무능'이라고 공격했다.
독일 사람들은 바이마르 헌법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았건만, 그것을 한번 제대로 향유해보지도 못하고 불과 '15년만'에 반납했다.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가 엄격한 바이마르 체제는 귀찮은 존재였다. 그들에게 결국 바이마르는 '잃어버린 15년'이었다. 영웅이 나타나 '상처' 받은 자신들을 보듬어 주기를 바랐다. '혼란'해 보이는 세상을 '정리정돈' 해 줄 것을 고대했다.
정동영의 패인
참여정부에 대해서도 그랬다. 지역주의와 보스-가신 정치, 권력집중과 권위주의에 길들어 있던 한국 사람들에게 노무현의 정부의 등장은 일대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은 대신, 조중동의 참여정부에 대한 해석에 점차로 동의해 가기 시작했다. 참여정부는 '말만 많았지 능력도 없이 혼란만 부추기는 아마추어'였다. 조중동과 딴당들에게, 수구적 지배 질서를 까발리려는 참여정부는 무조건 실패해야만 했다. 그들은 참여정부의 이질성과 불편함을 선동했다. 국민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할 때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특히 '갱제' 가지고 장난 많이 쳤다. 갱제는 코드와 포퓰리즘으로 참여정부의 출범과 함께 일찌감치 '절단' 난 것으로 미리 규정됐다. 먹고사니즘은 불안으로 직결된다. 그것을 이용했다. 분명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제 '돈'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부패함을 커버할 수 있는, '돈'에 대한 대단한 능력을 갖추셨다고 선전됐다. 까짓 도덕이 뭔 대수냐, "일하다 보면 실수 좀 할 수 있다"는 말은 딴당이 아니라 국민들 입에서 오르내렸다. 땅박은 부패 면허를 합법적으로 부여받았다.
정동영이 헤맨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이 묻지마 논리를 막아내야 했다. 참여정부는 성공했다고 선언해야 했다. 딴당과 조중동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상생'했다. 이용만 당할 것을 알면서도 '자리'에 눈이 멀어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인 줄 알았다. 최소한, 경제는 망하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말했어야 했다. DJ와 노무현은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언론과 싸웠다. 정동영은 조중동과 인터뷰했다. 그게 패인이다.
히틀러는 중산층과 서민의 대변자로 자처했지만, 결국에는 자본가 및 지주와 손을 잡고 중산계급을 몰락시키고 총알받이로 내몰았듯이, 재벌당 출신이면서 서민과 민생을 팔아먹고 있는 땅박도 결국 국민들을 토사구팽 취급할 것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히틀러가 '교육은 궁극적으로 병역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고 했듯이, 땅박은 '경제의 완성'을 위해 '대운하 삽질'로 국민들을 괴롭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어야 했다. 히틀러가 독일을 말아먹은 것은 채 10년도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렸어야 했다.
정동영은 대중이 (여론) 조작되는 것을 방치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게 패인이다.
※ 정리해보자
구분 |
바이마르 정부 |
참여정부 |
성향 |
중도 |
중도 |
안티체제 |
융커 - 제정 - 토지권력 |
수구 - 지역주의 - 권위주의 |
핵심 등장요인 |
제1차 대전 패배 - 구체제 모순의 폭발 |
IMF 위기 - 수구는 무능할 뿐 아니라 부패하다는 증거 |
핵심 지지층 |
지식인 및 일부 중산층 |
고학력 사무직, 20~40대 |
성격 |
한 세대를 앞서가는 '혁명적' 민주주의
- 현대 헌법의 롤 모델
|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수평적 정권 교체
- 자발적 참여, 토론 민주주의 - 정책과 비전 |
한계 |
전쟁 패배, 국민들의 신체제에 대한 낯설음과 인내 부족
- 시민계급 미성숙 - 경제 대공황(외생변수) - 좌우로부터의 공격 - 리더의 부재 |
적대적 수구적 여론시장
- 과도한 낙관주의 - 실질적 민주주의 미성숙 - 진보개혁 특유의 '분열' - 우로부터는 빨갱이, 좌로부터는 신자유주의로 공격받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