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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택시 6년차의 소고 - 2

순수한 남자 2008. 1. 8. 23:23
밤 택시 6년차의 소고 - 2
번호 197344  글쓴이 nightowl (inmotion11)  조회 4723  누리 1071 (1071/0)  등록일 2008-1-8 10:18 대문 43 톡톡


밤 택시 6년차 nightowl입니다.

노무현이 옳았다는 걸 느껴갈 것


연말에 액셀러레이터를 너무 밟고 다녀서인지 새해 들어 맥을 못 추고 있다. 일만 끝나면 졸음이 밀려와 지하철 안에서 졸다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치질 않나, 글 좀 써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을라치면 졸음이 밀려와 글쓰기를 포기하곤 했다.

운전하고 밥 먹고 졸다가 자 버리는 반복되는 일상과 함께 새해를 맞이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버렸다. 글이란 게 적절한 시의성을 담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이야기들을 다시 끄집어낸다는 게 여간 멋쩍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메모지에 기록된 깨알 같은 글씨들이 그냥 버리긴 너무도 아깝고 소중하다. 그래서 다시금 '대선, 연말, 새해 - 밤 택시 6년차의 소고'란 거창한 제목이 걸린 그 후편을 시작해 보려 한다.

고등학교 3학년 수학시간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헤르만 헷세가 고등학교시절을 지배했던 3년이었기에 졸음이 밀려오는 수학이나 물리 등등의 시간이면 교과서 사이에 문학 책을 끼고 살았는데 그날은 '오만과 편견'을 탐독하고 있었다. 너무도 열중하여 책을 읽는 사이 그만 선생님에게 딱 걸리고 말았는데, 그 작은 사건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까지 번지고야 말았다.

"오만과 편견! 좋아하시네. 문제 하나 더 풀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오만과 편견이 대학 보내준다냐 이놈아!"

읽던 책은 이미 선생님의 손에 들려있었고, 애지중지하던 책은 그 모서리로 사정없이 나의 머리를 내리찍고 있었다. 상하로 반복되는 선생님의 팔운동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싸가지없는 토를 단 게 그만 더 큰 화를 자초하고야 말았다.

"공부해서 남 주냐고~ 대학가서 남 주냐고~ 이놈아!" (이 대목에선 팔운동의 파워가 장난이 아니었다.)

"공부해서 남 줘야죠."

애지중지하던 문학책으로 머리를 두들겨 맞는 것이 무척이나 억울했었나? 아니면 어릴 적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온 '공부해서 남 주나~'란 말씀에 대한 가치관의 전복이었나?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엉? 다시 한 번 얘기해봐!"

"...."

"빨리 얘기 안 해!"

머뭇거리며 땅바닥만 내려다보던 나를 다그치며 머리 위로 내동댕이쳐진 책과 함께 그만 나도 이성을 잃고 말았다.

"공부해서 남 준다고 그랬습니다. 수업시간에 딴 짓 한 건 제가 잘못했…."

"이놈의 새끼가 어디서 눈을 치켜뜨고." 번개같이 날아온 손바닥에 그만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교무실로 불려간 나에게 선생은('님' 자는 정중히 생략하겠다.) 반성문을 쓰게 했고, 담임에게 학생과 주임에게 불려다니며 혼쭐이 나고 있었는데, 반성문 때문에 또 한 번 홍역을 치러야 했다. 반성문에는 수업시간에 딴 짓 한 것만 잘못했다고 적었으니까.

얻어터지면서도 반성문 내용은 한 줄도 바꿀 수 없다며 무릎 꿇고 손들고 무언의 침묵시위를 하고 있던 나에게 국사와 세계사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다가와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갔을 때, 소리없이 흘러내리던 굵은 눈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국사선생님은 전교조활동으로 해고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대선 이후 손님들을 만나면서 민심과 여론의 추이를 따라가다 보니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학창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낸 이유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공부해서 너만 잘되라는 우리 교육의 두 얼굴과 같이 우리 삶과 생활 속에 깊숙이 내재되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중성'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2007년 12월 26일 : 직장 간부로 보이는 50대 손님과.

"특검요? 그거 꼭 해야 합니까? 이미 끝난 일인데.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이 기회에 다 털고 가면 더 좋지 않을까요?"

"명색이 대통령인데 취임 전부터 특검 받는다는 게 좀.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서도 모양새가 좋지 않잖아요."

"대통령 할아버지라도 범죄에 대한 의혹은 밝혀내야지요. 범죄사실이 명백하다면 재선거해야 되는 거고."

"재선거요?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뽑은 사람을 재선걸 해요? 그래서 벌어질 국가적 혼란을 책임이라도 지실 겁니까?"

"혼란이 아니죠 손님. 잘못된 거를 바로잡는 거죠. 대통령 당선자가 죄가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한 거 아닌가요? 죄가 있다면 당연히 나랏법에 의해 처벌받아야 마땅하고요. 특검해서 무죄다 그러면 떳떳하게 대통령직 수행하면 되는 거고. 제 말씀이 틀렸습니까?"

"이미 검찰조사로 무죄다 나온 걸 가지고 또 특검이네 뭐 네 해서 대선판 엎으려고 그런 거 아닙니까?"

"손님! 그때 국민여론 60% 이상이 검찰수사로는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검해야 된다 그랬거든요. 당선됐으니 좀 봐주자고 하는 건 이중적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국민이 당신을 믿고 지지했으니 속 시원하게 특검 받아라 이래야 되는 거 아니냐고요."

"도덕군자 나셨네요." (이하생략)


2007년 12월 27일 : 9시 뉴스를 듣다가 30대 직장인과.

(뉴스내용 : "한국경제학회는 재건축 규제완화, 양도세·종부세 감면, 용적률 완화, 도심재개발 활성화, 분양가 규제완화 등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동산 시장이 벌써부터 예민해져 있다"면서 "새 정부 초기부터 새로운 정책 하나에도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부동산정책은 참여정부의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 기억나는 대로 써 보지만 거의 맞을 거라 확신함.)

"이 자식들은 노무현정부 내내 아무 소리 안 하고 있다가 이제야 참여정부 기조가 바람직하다고 하네. 그렇지 않습니까?"

"노무현이 부동산만 잘 잡았어도 욕먹진 않았을 텐데."

"정책적 실수도 분명히 있었죠. 부동산정책 내놓을 때마다 언론과 투기세력이 뭐라 그런 줄 아십니까? 부동산은 시장에 맡겨야 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코웃음 쳤죠. 강남불패는 깨지지 않는다고요. 종부세 도입해서 이제 다 잡아놓으니 또 뭐라는 줄 아십니까? 부동산경기가 안 돌아 서민경제가 망했다고 그럽니다. 그래놓고 노무현이 땅값, 집값 죄 올려놨다고 하니 정작 부동산 폭등을 일으킨 세력들은 쏙 빠지고 노무현만 독박 쓴 꼴 아니면 뭐겠습니까? 그래놓고 이제 와서 노무현정책이 맞았다. 참 우스운 세상이네요."

"글쎄요. 전 뭐라고 할 말이…."


2007년 12월 28일 : 40대 자영업자와.

"이명박이 일은 참 잘할 거 같네요. 공무원 수 줄인다는 거 하나만 봐도 알 수 있거든요. 그놈들 앉아서 세금만 축내지 뭐 하는 일이 있어야지.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손님! 혹시 노무현정부 들어서 늘어난 공무원 내역에 대해 아시는 거 있습니까?"

"아시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맨 놀고먹는 수만 늘려놨지."

"손님! 그건 사실과 다른 말씀인데요. 늘어난 국가공무원 절반이 교원이고요. 우리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 아시죠? 그래서 옛날처럼 한 반에 60명씩 하던 게 이젠 30명선으로 줄었습니다. 경찰, 교도관이 10%가 넘고요. 우편 집배원도 5%나 됩니다. 이래도 놀고먹는 공무원만 늘려놨다고 하시면 참 곤란하네요."

"왜 있잖아요. 뭐냐 그 뭔 위원회다 뭐다 해서. 인권위니 또 과거사 머시기니 해서 자기 사람들 앉혀놓고. 그게 다 그런 거 아니냐고요. 지들끼리 해먹으려고.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과거사는 무슨~"

"공무원 조직이 국민 위에 군림해왔던 게 무려 수십 년입니다.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요즘 많이 좋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잘못된 과거를 청산…."

"그만 합시다. 빨리나 가주세요. 약속이 늦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오는 대통령직인수위의 소식은 언젠가 대통령이 말씀하신 바대로 '끔찍한 현실'이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같이 뉴스를 경청하던 어느 손님의 말대로 '정책이 다른 생각의 차이를 인정해야죠?'라고 하기엔 앞으로 전개될 상황이 막막하고 답답하다.


2008년 1월 4일 : 9시 뉴스를 듣다가 강남에서 태운 40대 주부들과.

(뉴스내용 : "참여정부의 국장들이 인수위에 불려가서 호통을 당합니다. 그리고 지난 5년 정책에 대해 평가서를 내라고 한다는데 그거 여러분 반성문 써오라 이말 아닙니까? 인수위가 월권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노무현 정부거든요.")

이 대목에서 갑자기 "푸훗!"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계속해서 뉴스가 이어진다.

(뉴스내용 : "지시하고 명령하고 새 정부의 정책을 지금부터 준비하라 이렇게 지시하는 것은 인수위 권한이 아니거든요. 부동산이나 교육 정책 등 인수위의 정책이 지나치게 속전속결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라며 우려도 나타냈습니다. "참여정부 정책과 차별화하면 무조건 선이다 이건 포퓰리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참여정부의 정책을 매도하는 상황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참나~ 웃기지도 않네. 아직은 노무현정부랜다.~"
"그러게 말이야~푸훗!"

웬만하면 참아보려고 했지만 끝내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고 말았다.

"그렇게 우스우세요.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식으로 비웃으시면 듣는 사람 기분 나쁘죠~ 배울 만큼 배우신분들 같은데 대통령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십니까? 아직 노무현정부란 말이 틀린 말입니까? 그럼 지금이 이명박 정부냐고요."

"이 아저씨가 왜 이래~"

"그렇게 비난하고 야유해서 얻는 것이 있으시면 마음껏 그리하세요. 전 그런 사람들 더 비난하고 조롱할 거니까."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야 내리자 내려. 뭐 이런 택시가 다 있어!"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요금은 됐고요. 택시기사들 중에서도 노무현 대통령 잘했고 존경하는 사람 있으니까 말씀 함부로 하고 다니지 마세요."

천 원짜리 3장이 운전석으로 날라온다.

"다 못 모셔드리니 돈은 받을 수 없고요. 돈을 날리려면 잘 날리셔야죠. 이렇게~"

차창 밖으로 천 원짜리가 '풀~풀~' 날아간다.

첨단무기로 무장한 전쟁터에서 소총 한 자루 들고 육박전을 감행하고 있는 초라한 나를 발견한다. '참여정부의 정책을 매도하는 상황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들으며 그것이 육박전이든 고공전이든 다시금 그와 함께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다듬는다. 차별화된 정책이 가져올 폐해가 현실화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노무현이 옳았다는 걸 느껴갈 테니까.


2008년 1월 2일 아침이 밝아올 무렵 : 새해 첫 출근하는 직장인과

강남구 수서동에 손님을 내려주고 차고지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외마디 괴성이 들려왔다.

"택! 시!"

가방을 들고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40대 남자가 도토리를 문 다람쥐처럼 아파트 낮은 담벼락을 '폴짝!' 뛰어 넘어온다. 차창 문을 닫아놓은 내 귀에도 쩌렁쩌렁하게 들렸으니 아마도 이 아파트 사람들은 새해부터 잠에 설쳤으리라.

"아이고. 고맙습니다. 새해부터 해외출장이라 인천공항 가는 리무진 타야하는데 잠실역 아시죠? 공항버스 타는데."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한 10분쯤. 버스 놓치면 공항까지 좀 데려다 주셔야 하고요."

"제가 교대시간이라 공항까지는 못 가고요. 10분이면 충분합니다. 손님!"

이제부턴 영화 한번 찍어볼까! 새해 첫 출근, 그것도 해외출장 가는 손님을 위한 음악이 뭐가 있을까. MP3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선곡을 했다. 기타소리가 심금을 울리며 새벽공기를 가른다. 교차로 빨간 신호. 지나는 차 없으니 통과. 빨간색 횡단보도. 지나는 사람 없으니 통과. 조금 전 괴성을 지르며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던 손님은 눈을 감고 기타소리의 리듬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8분짜리 음악이 거의 끝나갈 때쯤 막 떠날 것만 같은 공항 리무진버스 뒤에 차를 댔다.

"캬~좋다. 거의 10년 만에 들어보는 음악이네요. 그것도 라이브로. 바쁘게 살다 보니 음악들을 마음의 여유도 없고. 덕분에 새해엔 뭔가 잘 될 거 같네요. 고맙습니다."

"출장 잘 다녀오시고 새해소망 꼭 이루시길~"

"기사님도 돈 많이 버는 한해 되세요. 안전운행 하시고요."

버스에 오르면서도 나에게 시선을 놓지 않는 그를 뒤로하고 차를 돌렸다. 창문을 열어보았다. 연말과 새해를 관통하며 온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매서운 겨울바람은 이미 그 기세를 상실하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따뜻한 기운과 함께.


손님과 함께 들었던 음악 듣기 http://blog.naver.com/night_tax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