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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눈물

순수한 남자 2010. 4. 13. 10:03

폴란드의 눈물
번호 131976  글쓴이 개곰 (raccoon)  조회 927  누리 601 (601-0, 19:92:0)  등록일 2010-4-12 23:49
대문 38


1939년 9월 독소 밀약에 따라 독일과 소련은 각각 폴란드의 서쪽과 동쪽을 점령했다. 폴란드는 영국, 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맺은 상태였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돕지 않았다. 독일과 소련에게 폴란드는 20년 만에 되찾은 식민지였다. 폴란드는 18세기 말 러시아제국, 오스트리아제국, 프로이센에게 분할된 뒤 1차대전 종전과 함께 겨우 얻어낸 독립국의 지위를 다시 잃었다. 폴란드 군인은 독일과 소련의 포로가 되었다.


폴란드는 수많은 나라와 국경을 접했고 역사적으로 국경 변동이 잦은 다민족 국가라서 폴란드 군대 안에도 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었다. 소련은 생포한 폴란드 군인 중에서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 소수 민족은 그냥 풀어주었지만 폴란드 군인은 붙잡아두고 성분 조사에 들어가, 민족 의식이 강하다고 판단되는 폴란드 군인, 특히 장교는 따로 추려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스탈린은 비밀경찰 총수 베리아의 건의를 받아들여 2만명이 넘는 폴란드 군인을 학살하라고 지시했다. 학살당한 폴란드인 중에는 전시 상황을 맞아 징집된 과학자와 기자, 교수도 있었지만 절대 다수는 폴란드 군대의 장교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애국 의식이 강한 고급 간부가 대부분이었다. 소련은 폴란드 장교의 씨를 말릴 셈이었다.


러시아에게 폴란드 군인은 두려운 존재였다. 폴란드의 독립을 주도한 집단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군대에 몸담았던 폴란드 장교들이었다. 폴란드 장교들은 1차대전이 터지자 폴란드가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면밀한 전략을 세웠다. 일차 타도 대상은 무지막지한 황민화 정책을 밀어붙인 러시아제국이었다. 무인의 전통이 강한 폴란드 군인들은 오스트리아제국과 독일제국의 편에 서서 러시아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러시아는 결국 불리한 전세와 볼셰비키 혁명으로 촉발된 내전으로 항복을 선언하고 먼저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폴란드 장교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패전국 편에 섰다가는 폴란드의 독립이 위태로워진다고 보았다. 이미 개전 초부터 요제프 피우트스키 같은 폴란드군 지도자는 은밀하게 영국에 선을 대고 폴란드인들은 오직 러시아하고만 싸우지 영국, 프랑스하고는 싸울 뜻이 없다고 밝혔으니 독일, 오스트리아와 거리를 두려는 것은 당연했다. 1917년 폴란드인 장교들은 독일, 오스트리아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여 투옥되었다. 수감된 폴란드 장교들은 폴란드를 분할한 세 나라에 맞서는 상징적 존재로 폴란드인 사이에서 엄청난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항복을 선언한 1918년 11월 11일 폴란드는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한 폴란드를 이끈 주역은 당연히 폴란드를 분할한 세 나라에 맞서는 투쟁에 앞장선 폴란드 장교들이었다.


그러나 독소밀약을 맺고 폴란드를 사이좋게 나눠먹었던 소련과 독일은 히틀러가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하면서 다시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43년 4월 카틴에서 도로 공사를 하다가 폴란드 장교들의 집단 학살 현장을 발견한 독일은 소련이 폴란드 장교들을 학살했다고 전세계에 선전했다. 1939년 이후 런던에 둥지를 틀고 영국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반독 항쟁을 벌여온 폴란드 망명정부는 소련이 참전한 이후 같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소련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독일이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소련이 폴란드 장교를 학살했다고 주장하자 폴란드 망명정부 지도부는 영국, 미국, 소련에게 국제적십자사를 통한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소련은 펄쩍 뛰면서 폴란드와의 외교 관계를 끊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체 조사를 통해서 소련이 범인임을 알았지만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진상을 밝힐 것을 건의한 조사담당자를 사모아로 귀양보냈다. 영국의 처칠 총리도 소련의 소행임을 짐작했지만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동부 전선에서 독일을 막아주는 소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련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진상 조사 요구가 계속되자 독일에게 은밀하게 선을 대어 평화 교섭에 들어갔다. 독일과 소련이 전쟁을 중지할 경우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총공세를 펼칠 수 있었고 그것은 연합국에게는 재앙이었다.


폴란드 망명정부 수반으로 지중해 전선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던 폴란드 군대를 시찰하고 돌아가던 시코르스키 장군이 탄 비행기가 6월 4일 밤 말타 공항을 이륙한 지 16초 만에 추락하여 시코르스키를 비롯하여 딸, 비서실장, 군 간부 등 10명이 즉사했다. 연합국은 기체 고장으로 인한 사고였다고 밝혔지만 사체 부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코르스키의 사망에 이어 폴란드군의 핵심 지도자 두 명이 잇따라 나치에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폴란드 군 지도부의 동선을 정확히 아는 관계자가 찔렀다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정황이었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몇 달 동안 핵심 지도자를 세 명이나 잃었고 그 뒤로는 연합국 안에서 폴란드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기가 불가능해졌다.


폴란드군은 미군과 소련군이 참전하기 전까지는 연합국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다음으로 큰 군사력을 보유했고 프랑스가 함락된 뒤로는 영국 다음 가는 군사력으로 항독 전선에서 크게 기여했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어려운 상황에 몰렸으면서도 프랑스의 친독 비시 정부의 항복 요구를 거절했고 1940년 1월 처칠에게 폴란드는 끝까지 영국 편에서 싸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영국이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 속에서도 승리를 거둔 전설적인 영국전투의 공중전에서 독일 전투기를 가장 많이 떨어뜨린 것은 폴란드 비행중대였다. 그러나 소련과 미국이 참전하면서 폴란드는 영국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동맹국으로 격하되었다.


소련은 학살을 부인하다가 고르바초프 때 처음으로 시인했다. 그리고 이번에 학살 70주년을 맞아 학살 현장 카틴에서 치러지는 추모제에 참석하려고 폴란드의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이 군 고위 장성을 비롯하여 폴란드 정부의 최고위 각료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오다가 도착 직전 추락하여 98명이 모두 죽었다.


시코르스키가 죽었을 때 폴란드 망명정부의 군인들은 이제 폴란드는 끝났다면서 울었다. 실제로 시코르스키 사후 넉 달 만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 폴란드는 대표를 못 보냈고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은 전후 폴란드 동부를 소련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1944년 여름부터 소련은 런던의 망명정부를 무시하고 폴란드 안의 친소 세력을 폴란드 유일의 합법 정부로 선언했다. 1945년 포츠담 회의에서도 처칠과 스탈린은 폴란드 과도 정부 구성을 논의하면서 런던 망명정부는 홀대했다. 전후 폴란드에 수립된 친소 정권은 런던의 망명정부 요인을 탄압하고 심지어 처형까지 했다.


그러나 대통령을 포함하여 100명 가까운 최고 엘리트를 잃은 지금의 폴란드 국민이 흘리는 눈물은 애도의 눈물이지 70년 전처럼 망국의 설움에서 흘리는 눈물은 아니다. 폴란드는 유럽연합의 일원이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폴란드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은 시코르스키처럼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싸운 사람이다. 나라의 중심이 서 있다. 시코르스키 같은 폴란드 장교들은 오스트리아제국 밑에서도 폴란드사회주의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폴란드의 독립이었지 이념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렇다고 영국이나 미국에만 매달리지도 않았다. 폴란드 지도자들은 1차대전 이후 소련과 전쟁까지 벌였으면서도 그 뒤로는 소련과 관계 개선을 하려고 노력했다. 국제 관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벗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폴란드에서는 그런 인물들이 국부로 추앙받는다.


한국의 보수 세력이 국부로 추앙해야 한다고 떠드는 인물은 이승만이나 박정희 같은 사람이다. 이승만은 민주주의 국가 미국에 호소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끌어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미국에만 매달렸지만 그가 하와이에서 윌리엄 태프트 장관한테 얻은 소개장을 들고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1905년 8월에 만났을 때 미국은 이미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조선을 일본에 넘겨준 상태였다. 이승만은 그것도 모르고 미국 대통령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이승만은 국제 관계는 철저하게 힘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이승만에게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냉정한 균형 감각이 없었다. 박정희는 폴란드 장교들처럼 나라의 독립이 아니라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일본 군대에 들어간 사람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 좌익이 득세할 것 같으니까 공산주의자로 변신했다가 다시 공산주의자가 탄압을 받으니까 동료 조직원들을 불고 혼자서만 빠져나와서 이번에는 반공주의자로 둔갑한 변신의 귀재였다. 폴란드의 장교들은 일신의 영달이 아니라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반러에서 반독으로 돌아섰지만 박정희는 오직 자기만의 생존을 위해서 친일에서 친공으로 다시 친미로 멸공으로 돌아선 사람이었다. 한국의 보수 세력이 일본이나 미국의 바지자락만 붙들고 늘어지면서 공동체의 존속보다는 자신의 사익만을 챙기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그들이 섬기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바로 그렇게 살았다.


폴란드의 우국 지도자는 타국인의 손에 죽었지만 한국의 우국 지도자는 자국인의 손에 번번히 죽었다. 폴란드의 중심에 있는 것은 우국 세력이지만 한국의 중심에 있는 것은 망국 세력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망국 세력은 자기들이 사이비 보수라는 사실이 탄로날까봐 김구, 장준하 같은 진짜 보수 세력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어렵게 살아남은 우국 세력의 불씨가 확산되지 않도록 노무현을 죽였고, 한명숙, 유시민, 강기갑 같은 우국 지도자를 어떻게든 죽이려고 든다. 그 망국 세력을 물리적으로 죽일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죽일 수는 있다. 오는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한국의 망국 세력이 총집결된 한나라당을 박살내야 한다. 투표를 하고 지인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것이 후손이 두번 다시 망국의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책임 있는 어른이 떠맡아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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