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 2010년 여름 3(완) |
|
사라진 신문지 식당에서 신문지를 볼 수가 없다. 식당을 한 스무 곳은 들어간 듯한데 신문지가 쌓여 있던 곳은 할머니가 하는 허름한 김밥집뿐이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어느 식당을 가도 신문지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한국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신문은 없다. 재래식 변소의 화장지로 쓰면 딱 좋을 신문지만 있을 뿐이다. 재래식 변소를 연상시키는 신문지가 식당에 사라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하다. 신문 시장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조중동류 신문지에 대해서 식당 손님들이 반감을 보였기 때문에 식당 주인이 겁이 나서 신문지를 끊은 것이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 희망적인 분석도 해보지만,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사람들이 종이로 된 신문지 자체를 잘 안 보는 것 같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종이 신문지를 보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하나같이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본다. 나만 하더라도 영국에서 종이 신문을 내 돈 주고 사서 읽은 기억이 최근에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손님들의 반발로 식당에서 신문지가 사라졌다는 해석을 굳이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신문사 입장에서는 광고 효과를 생각해서라도 무료로 식당에 신문지를 넣어줄 만하다. 그런데도 신문지를 넣지 못한다는 것은 식당 주인이 손님의 거부감에 대해서 느끼는 두려움이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되지 않을까. 단 한 명의 손님이라도 만약 이런 신문을 보는 식당에는 다시 발길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확신범이 아니고서야 웬만한 식당 주인은 간이 오그라들리라. 신문지를 보더라도 혼자서 몰래 보리라. 한 사람의 힘이 중요하다. 그러나 종이 신문지는 없어져야 마땅해도 여론을 주도할 종이 신문은 필요하다. 아니, 주도까지는 안 바라더라도 종이 신문지들의 망나니짓에 맞설 수 있는 종이 신문은 있어야 한다. 조오현 경찰청장 내정자가 경찰과 전경을 모아놓고 노무현 대통령이 작고하기 전날 “차명계좌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노무현이 뛰어내렸다”고 지껄인 데 대해 노무현재단은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번에는 노무현 지지자들의 “놈현 관장사”를 집어치우라는 삼류 소설가와 꼴진보 교수의 대담을 대문짝만하게 실은 한겨레신문지에 노무현재단에서 항의문을 보냈다. 언제까지 항의만 해야 하는지 답답하다. 사실과 진실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노무현 정신을 이어가는 신문이 없는 한 한국의 좌우 악질 신문지들은 틈만 나면 관 속의 노무현을 난자할 것이다. 지하철의 불한당 낮인데도 지하철에 사람이 많다. 임산부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가 서 있다. 그러나 노약자석에 앉은 노인들은 태연자약 앉아 있다. 노약자석은 노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몸이 멀쩡한 노인이 서 있기 더 불편할까 임산부가 더 서 있기 불편할까. 괘씸하다. 임산부에게 양보하지 않는 노인은 노약자석에 앉을 특권을 누릴 권리가 없다. 모든 윤리의 생명력은 긴장에서 나온다. 내가 받는 대접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윤리는 그 대접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짐이 되고 지옥이 된다. 그것은 윤리가 아니라 멍에다. 나는 꼭 이런 대접을 안 받아도 되는데도 이런 대접을 받으니 고맙다는 긴장감이 살아 있어야만 상대방도 나는 꼭 이런 대접을 안 해도 되지만 그래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쉽게 가질 수가 있다. 그때 그의 행위는 멍에나 굴레가 아니라 윤리가 된다. 허구일지언정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영화가 공산주의 집단 예술 영화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주인공이 꼭 나라를 위해서 안 싸워도 되는데 그래도 싸운다는 생각을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과 관객들이 한다는 전제조건 속에서만 그렇다. 당연시되는 것은 윤리와 감동이 아니라 속박으로 전락한다. 인륜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노약자석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노인한테서 호통을 듣는 젊은이가 아니라 임산부 앞에서도 말똥말똥 눈을 뜨고 앉아 있는 노인이다. 서울이 좋대요 지하철마다 버스마다 신문가판대마다 “서울이 좋아요”라는 홍보문구가 적혀 있다. 일자리도 구해준단다. 악질 댓글 다는 알바라도 뽑으려나? 저런 홍보비에 들어가는 돈만 아꼈어도 서울시가 파산지경에 몰리지는 않았으리라. 택시를 탄다. 양보를 잘 안 한다. 택시는 넘쳐나고 경쟁은 치열하고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절박한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래도 어차피 이쪽도 빨리 가지 못하는 도로가 꽉 막힌 상황에서는 한 대쯤 양보해도 좋을 거 같은데 여간해서는 양보를 안 한다. 양보해야 한다. 진공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양보를 받은 운전자도 다음에 진공을 만들어낼 확률이 높다. 도로에서 양보 운전을 하는 운전자만 늘어나도 서울이 좋다는 생각이 운전대를 잡은 서울 시민들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들 것이다. 양보하고픈 마음이 들려면 아무래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여유는 아무래도 생활의 여유에서 나온다. 없는 사람은 한푼이라도 더 쥐어짜려는 그악스러운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개인에게 그런 여유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다. 서울이 좋다고 한글로 서울 시민에게 쓸데없는 홍보를 하는 데 탕진할 돈으로 아이들을 안심하고 키울 수 있도록 복지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쓰면 서울이 좋다는 생각을 시민들 스스로 하게 될 텐데 좋다고 떠들어대는 서울은 일은 안 하고 일하는 척 생색만 내는 데 돈을 쏟아붓는다. 없는 사람은 먹고 사느라 나날이 힘들어지고 서울은 갈수록 삭막해진다. 황송한 공연 금요일 저녁. 선배와 함께 국악공연장을 찾는다. 선배는 마흔이 넘어서 우연히 국악에 접하고 푹 빠져들었단다. ‘들놀이’라는 놀이패의 공연이다. 반원형의 아담한 소극장을 쉰 명 남짓 되는 관객이 채웠지만 군데군데 빈 자리가 많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엄마도 꽤 눈에 띈다. 객석의 불이 꺼진다. 객석의 불이 꺼지면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밖에서 꽹과리 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공연이 무대 안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밖에서 시작된다. 한판 놀아볼까 하는 소리와 함께 징과 꽹과리, 북을 치고 두드리면서 공연단이 객석 사이를 통해 무대로 들어선다. 문외한이라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북춤도 추고 뱃노래도 뽑고 부채춤도 추고 웅장한 불교 음악도 들려준다. 연주자들이 신명이 나도록 관객도 장단을 맞춰줘야 할 거 같은데 장단의 문법을 모르겠다. 그래도 연주자들은 땀을 흘리며 온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뜯고 켜고 두드린다. 열 명이 넘는 젊은 연주자들의 신들린 듯한 공연을 지켜보는 쉰 명의 관객들. 황송한 공연이다. 마지막 연주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갑자기 연주자들이 관객석으로 들어온다. 앉아 있던 관객들은 연주자들을 따라서 서로서로의 어깨를 짚고 줄지어 무대를 빠져나가 로비로 들어간다. 연주자들은 로비를 맴돌면서 조금씩 가운데로 모여들고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연주자들을 에워싼다. 연주자들이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신나게 노니까 관객들도 차츰 어색함과 긴장에서 풀려나면서 어깨춤을 춘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깡총깡총 뛴다. 잠깐이지만 공연자들과 관객들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택시를 탈 때 느꼈던 삭막함이 잠시나마 가신다. 무대 밖에서 시작된 공연이 무대를 거쳐서 다시 무대 밖에서 끝났다. 현실에서 시작된 공연이 무대를 거쳐서 다시 현실에서 끝났다. 그리고 잠시나마 사람과 사람을 잇는 유대감을 현실 속에서 느끼게 해주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모르는 남남 속에서 느끼는 이런 유대감을 현실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 노무현, 진공을 견딘 지도자 토요일 오후 4시. 역촌오거리. 은평 보궐선거에 국민참여당 후보로 나온 천호선 후보의 주말 마지막 유세다. 이재정 국민참여당 대표, 이광철 최고위원, 유시민 당원, 천호선 후보가 작은 덤프트럭 위에 서서 손을 흔든다. 덤프트럭 앞에서는 노란 옷을 입은 선거운동원들이 율동에 맞춰 춤을 추면서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건널목에서는 머리가 희끗한 남자들이 지나가는 차들에게 구십도로 허리를 숙여 절을 한다. 그러나 보궐선거의 최대 관심지역으로 떠올라 주목을 받았기 때문일까, 운전자와 시민의 반응은 무덤덤해 보인다. 시간이 남아서 들어갔던 내의판매점의 주인 여자는 천호선 후보를 도와달라고 하니까 시끄러워서 빨리 선거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내뱉는다. 무심한 사람들 속에서 머리가 희끗한 국민참여당 당원이 이명박을 심판해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뙤약볕 아래 네거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까 속에서 북받친다. 눈물겹도록 고맙다. 정치인과 정당은 국민을 섬긴다고들 말한다. 국민도 그것이 빈말임을 알 뿐 아니라, 개별적 인격체로서의 국민 중에는 웬만한 정치인보다도 더 야비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까지도 자기들은 정치인으로부터 섬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위압적으로 나오는 구체적 존재로서의 권력자 앞에서는 끽 소리도 못하면서 추상적 존재로서의 정치인은 싸잡아 비웃고 침뱉고 욕한다. 과분한 지도자를, 황송한 지도자를 가졌음을 깨닫지 못했다. 노무현은 정치인은 밭을 탓해서는 안 된다면서 단 한 번도 국민의 심판을 원망하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였다. 모든 인간에게 “불성”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고 한 부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무한긍정의 믿음이었다. 참다운 불성이 없고서는 가질 수도 없고 실천에 옮길 수도 없는 믿음이었다. 노무현은 자신을 비웠다. 그리고 언젠가는 불성을 가진 국민이 그 빈 자리를 채우리라는 믿음으로, 한 줌 한 줌 흙을 옮겨서 언젠가는 산을 옮길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진공을 견뎌냈다. 노무현이 밭을 탓하지 않았듯이 국민참여당 당원들은 아직도 무심한 국민을 원망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다. 그들은 진공을 견딘 노무현의 불성이 만들어낸 또 다른 노무현들이었다. 노무현은 죽지 않았다. 노무현의 불성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있는 한 외롭지 않다. 국민을 섬기는 당원이 아니라 국민을 섬기는 당원을 섬기는 국민이 되고 싶다. 국민을 섬기는 지도자를 황송해하는 국민이 되고 싶다.
|
'서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명박의 아바타 조현오를 잡아라 (0) | 2010.08.17 |
---|---|
경찰청장 후보자의 강연 전체를 보았습니다. (0) | 2010.08.17 |
대한민국 깜깜하다 (0) | 2010.08.16 |
통일세 핑계로 서민 호주머니 털기 안 된다 (0) | 2010.08.16 |
이 정도였어 .......... 끝이 없다 (0) | 2010.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