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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의 눈 장하준의 눈 노무현의 눈

순수한 남자 2010. 11. 23. 10:52

반기문의 눈 장하준의 눈 노무현의 눈
번호 214809  글쓴이 개곰 (raccoon)  조회 2304  누리 711 (711-0, 33:101:0)  등록일 2010-11-22 22:35
대문 53


반기문의 눈 장하준의 눈 노무현의 눈
(서프라이즈 / 개곰 / 2010-11-22)


반기문의 눈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걸고 언젠가 한국 대통령이 되려는 꿈을 꾸는지 몰라도 국제 외교가의 평가는 싸늘하다. 영어가 서툴기도 하지만 자기를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아 카메라 앞에서 아직도 어색한 장면이 연출될 때가 많다. 겸손함과 점잖음을 높이 사는 동양인의 윤리 감각을 적절한 유머 감각과 친근한 사교 감각이라는 어떻게 보면 피상적일 수도 있는 구미인의 일방적 행동 규범을 잣대로 삼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반기문이 비교적 중립적이고 열린 사람한테서조차 자신에게 버거운 자리를 맡았다고 혹평을 듣는 것은 단지 영어가 서툴다거나 동양적 처신이 몸에 배서만은 아니다. 그가 비판받는 것은 이 세상의 불의와 정의를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가슴에 와 닿는 어휘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크게 모자라서다. 그것은 반기문이 자기의 시각에서 세상의 불의와 정의를 근본적으로 사유해본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수밖에 없고 한국의 이른바 주류 엘리트가 공통적으로 가진 한계기도 하다.

유엔이라는 기구는 물론 유엔의 물주 노릇을 하고 자본주의의 맹주 노릇을 하는 미국의 꼭두각시 내지 거수기 노릇을 할 때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라면 일국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를 위한 정의의 목소리를 내는 척이라도 내야 한다. 이라크전에 반대의 목소리를 낸 과거의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그래서 지금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아무리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나라와 국민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인류 보편의 정의 감각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눈물을 머금고 내려야 할 때도 있다. 참여정부 당시의 이라크 비전투원 파병이 그런 예다. 자본주의라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국이라는 돛단배의 번영은 옳건 그르건 수출에 절대적으로 기대는 구조로 굴러왔고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는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그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안전 운항을 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유엔 사무총장은 다르다. 유엔 사무총장이 자기 소신을 밝혔다가 미국에게 밉보여서 설령 미국이 거액의 분담금을 못 내겠다고 버티든가 아니면 유엔을 탈퇴한다 하더라도 그 피해는 기껏해야 수천 명의 유엔 직원이 일자리를 잃는 데 그칠 뿐이다. 그래서 유엔 사무총장은 정의로운 길을 추구할 수 있는 여지가 한 나라의 대통령보다 훨씬 넓다. 물론 정의로운 길이 무엇인지를 알 때만 그렇다.

반기문의 문제는 그가 생각하는 정의가 미국이 생각하는 정의와 너무나 일치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 한국인 외교관을 유엔 사무총장으로 추대하는 데 적극 협력한 것은 한국의 주류 엘리트는 미국의 정의관에서 벗어나는 생각을 할 리가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반기문은 미국의 기대에 충실히 부응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북의 핵무기 개발은 자위의 성격이 강하다면서 북을 악당으로 몰아가려는 미국의 일방주의에 제동을 걸었지만 반기문은 수천 수만 기의 핵무기를 보유했고 지금도 틈만 나면 핵실험을 하는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같은 핵무기 보유국들이 북의 핵무기 실험을 규탄하는 위선과 적반하장을 한 번도 지적한 적이 없다. 아니, 도리어 더 앞장서서 북을 준엄하게 질타한다. 반기문에게는 강대국의 위선을 짚어낼 만한 눈이 없다. 그는 늘 현재에 살기 때문이다. 현재의 강자만을 절대선으로 받아들이고 추종하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반기문의 눈은 미국의 눈이다. 반기문이 유엔 사무총장 자리에 적역인 이유도 그래서고 반기문이 유엔 사무총장감이 아닌 이유도 그래서다.


장하준의 눈

<나쁜 사마리아인>을 쓴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학자 장하준이 선진 부국의 자유무역 신봉론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은 지금은 자유무역을 부르짖는 나라들이 옛날에는 보호무역을 오래도록 고수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얄밉도록 정확하게 꼬집어서였다. 18세기 초반부터 죽 보호무역을 고수한 영국이 자유무역으로 돌아선 것은 공업 경쟁력에서 확고한 우위에 올라섰다고 판단한 19세기 중반 이후였다. 18세기 말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미국도 제조업 강국인 영국에게는 상당 기간 보호무역으로 맞섰지만 자기보다 공업력이 한참 떨어지는 중남미에 대해서는 자유무역을 19세기 말부터 들이밀었다.

자유무역의 폐해를 비판하는 학자는 장하준 말고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장하준의 강점은 자신의 머리에 든 반자유무역 이론으로 원론적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유무역을 부르짖는 나라가 과거에는 보호무역으로 컸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여 상대방의 일구이언과 자기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자기 나라가 경쟁력이 없던 시절에는 열심히 보호무역을 하면서 자국 산업을 키워놓고서 경쟁력이 생긴 지금은 자국 산업을 키우려는 가난한 나라들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면서 새싹을 짓밟는 위선을 장하준은 드러낸다.

지금 자유무역을 부르짖는 나라들은 그럼 당신들이 약소국이던 시절에는 왜 보호무역에 매달렸느냐는 장하준의 지적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가장 설득력 있는 반론은 상대방의 논리로 상대방의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축을 가로지르며 오늘과 어제를 견주는 역사적 비교는 이렇게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인 척 꾸미고 나타나는 자유무역론이 사실은 특수한 시공간 조건의 산물임을 밝혀낸다.

장하준이 최근에 낸 <그들이 말하는 23가지>라는 책은 마치 순수한 자유경쟁시장이라는 것이 있기라도 한 듯, 마치 지금의 선진 공업국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유무역을 떠들어오기라도 한 듯, 지금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열심히 설파해온 자본주의에 대한 엉터리 사실을 까발린다.

장하준이 반기문과 다른 것은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장하준은 날카로운 비유력과 냉소적 반어 의식이 돋보인다. 그러나 장하준이 반기문과 정말로 다른 점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만 현혹되지 않고 지금과는 달랐던 과거의 모습을 꿰뚫어보는 역사 감각을 가졌다는 것이다. 역사 감각을 가진 사람은 지금의 강자가 휘두르는 논리에 잘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지금의 강자는 어제의 약자였고 지금의 약자는 내일의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 감각은 놓치지 않는다.

장하준은 요즘 영국의 진보 진영에서 인기가 좋다. 강연을 하면 강연장이 메워지고 책도 잘 팔린다. 얼마 전 영국의 진보 정론지 가디언지는 사설에서 에드 밀리반드 노동당 당수에게 경제학자 장하준과 점심이라도 같이하면서 그의 조언을 귀담아들으라고 농반 진반으로 훈수를 두었다.

장하준은 아프리카 같은 저발전국가는 물론이고 브라질, 인도 같은 발전도상국에서도 호평을 받는다. 하지만 왜 서양의 진보 진영에서까지도 장하준에게 호평을 보내는 것일까? 선진 자본주의 체제가 부르짖어온 자유무역론의 역사적 위선을 통렬하게 까발린 동양인 학자가 너무나 멋져 보여서는 물론 아닐 것이다. 장하준이 호평을 받는 것은 무분별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역사적 맥락에서 비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국 산업의 경쟁력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보호무역을 취하는 것이 왜 옳은지 강력한 논거를 제공해서다.

독일 정도는 아직 자신감이 남았는지 몰라도 이탈리아나 스페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국도, 프랑스도, 스웨덴도 이제는 자국의 산업 경쟁력이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양 각국은 예외 없이 아시아에 조만간 추월당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보호주의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티파티 세력이 공화당 안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미국도 보호주의로 돌아설 가능성이 농후하다. 산업자본가를 지지 기반으로 하는 공화당은 지금은 자유무역을 부르짖지만 미국의 산업 경쟁력이 약했던 19세기 말까지는 보호주의로 일관했다. 산업 경쟁력이 약해졌을 때 보호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미국 공화당의 참모습이다. 노동자 지지층이 많은 미국 민주당은 지금은 자유무역에 약간 유보적인 입장이지만 농업 종사자가 주된 지지 기반이었던 19세기 말에는 자유무역을 부르짖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꾼다.

약자가 보호주의에 솔깃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장하준은 보호주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아직도 약자인 중남미와 아프리카에게도, 강자에서 약자로 되어가는 유럽과 미국에게도 제공한다. 장하준은 반기문보다 유능한 유엔 사무총장이 되었을 것이다. 장하준의 눈은 미국의 눈이 아니라 세계의 눈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눈

유엔 사무총장, 학자와 대통령이 다른 점은 유엔 사무총장과 학자는 세계인을 상대로 보편의 이야기만 잘 해도(반기문은 그마저도 못했지만) 칭송받지만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자기 나라의 특수한 현실을 가장 앞에 두고서 자기 현실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한국 경제는 저발전 단계인가 발전 도상 단계인가 아니면 웬만큼 발전한 단계인가. 제도와 관행에서는 낙후된 점이 있을지 몰라도 한국의 제조업은 저발전 단계는 결코 아니고 발전 도상 단계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어떤 선진 공업국보다도 더 양질의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단계에 왔다.

무분별한 무한 성장을 유한한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 있겠지만 일단 자본주의를 축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살아남자면 경제 성장을 안 할 수가 없고 기술력이 고만고만할 때는 결국 안정된 시장의 확보가 안정된 성장의 관건이다. 그래서 자유무역협정을 맺는다.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한 자국 산업이 경쟁력을 확보한 시점에 가서는 시장 확대를 위해 무역 장벽을 낮출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공급 과잉으로 바로 불황에 직면한다. 더구나 한국처럼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에서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려면 타국에서 자원을 들여와서 만든 물건을 타국에서 팔아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고, 그러자면 경제 개방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노무현이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런데 요즘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는 장하준이 외국에서도 각광을 받으니까 봐라, 보호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장하준이 이렇게 밖에서도 인정받지 않느냐, 역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노무현의 닭짓이었다며 열을 올린다. 어느 나라든 한때는 보호주의로 자국 산업을 지킨 역사가 있다는 보편적 사실과 과연 지금 우리나라가 보호주의로 무역 장벽을 쌓아야 할 때인가 개방주의로 무역 장벽을 내려야 할 때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상황은 전혀 별개의 것인데도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학자가 세계인을 상대로 보호주의를 옹호하는 논리를 펼쳐보였으니 그 논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장하준은 한국은 생산성에서 미국보다 뒤지므로 아직은 자유무역협정을 맺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미 한국의 서민과 노동자는 살인적인 무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비정규직의 고혈을 빨면서 유지되는 대기업 강성 노조 정규직의 턱없는 고임금이야말로 한국 기업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주범일 수 있다. 장하준은 세계의 차원에서는 보호주의의 정당성을 웅변하면서 약자를 옹호하는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진정으로 약자를 옹호하지 못한다. 장하준은 한국이 가진 문제의 핵심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가 한국이 가진 만악의 근본인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는 이유도 그래서다. 그는 한국을 잘 모른다. 그가 가진 것은 세계의 눈이지 한국의 눈이 아니다.

발전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의 이기적인 욕망을 잣대로 삼을 때가 많다.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중국에서는 이미 현실화되었지만 인도에서도, 언젠가는 아프리카에서도 모두가 미국까지는 안 가더라도 한국 수준의 소비를 한다고 할 때 과연 지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도 거부하고픈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발전이라는 관념 자체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맺는다고 그렇게 욕을 먹었던 노무현은 낙향해서 1년 만에 무공해 생태농업을 성공시켰다. 유기농 쌀이라고 해서 값이 턱없이 비싼 것도 아니다. 반면에 농업은 국민의 젖줄이라면서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한 다수의 농민은 오늘도 국민 건강을 위해 농작물에다 농약으로 떡칠을 하고 있다.

노무현은 소박하게 살고 싶었지만, 소박하게 살아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국민의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노무현의 눈은 미국의 눈도 아니고 세계의 눈도 아니고 한국의 눈이었다. 노무현은 농사를 지은 오리들마저도 잡아먹을 수 없다며 놓아준 사람이었다. 노무현의 눈은 미물인 오리의 운명까지 헤아려 살피는 눈이었다. 노무현의 눈은 사람사는 세상을 갈망한 참사람의 눈이었다.

 

개곰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14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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