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박스러움’을 보는 ‘상수생각’
언어의 경박함과 인격 없음에 대하여
(서프라이즈 / 명덕 / 2010-12-27)
이명박, 안상수는 온갖 잡다한 설화(舌禍)에 시달려 왔다. 신통하게도 그 둘(을 비롯한 그들을 포함하는 정치적 집단에 속한 자들)은 공통적으로 그 설화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혼을 스스로 파괴한 자들도 유유상종(類類相從)하는 법이다. 한 사람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주군인 이명박의 ‘못생긴 여자의 마사지가 서비스 최고’, ‘기다려라, 지금은 곤란하다’라는 발언부터 시작해서 식당 아줌마 가슴에 이르기까지, ‘성나라당’ 사람들의 설화를 일일이 기억한다는 것은 신경질적인 피곤함만을 가져올 뿐이다.
이명박의 그놈의 ‘혀’ 때문에 수없는 정치적 문제를 야기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니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안상수는 여성에 대해 왜 ‘자연산’이란 멋진 수사를 사용했을까? 어찌 생각해보면 안상수는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라는 속담에 충실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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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의 그림마당 |
혀의 기능이란 게 대체 무엇인가? ‘말하고, 사랑하고, 먹는 것’, 이 세 개 아닌가? 그러니 ‘말로써’ 설화를 일으키는 성나라당 사람들이 고기 ‘씹는’ 식당에 가서 ‘애무했다’는 것에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정작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물러나, ‘정신적 말’을 할 때와 ‘물질적 고기’를 씹어야 할 때와 ‘육체적 사랑’을 할 마땅할 장소를 구별하는 분별지를 상실했다는 것이 그 비난의 화살을 맞는 것이 아닌가.
이명박이나 안상수나 그 밖의 잡다한 ‘성나라당’의 잠재적으로 불온한 인간 나부랭이들을 깔끔하게 해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상수는 “이제 진중하고 간단하게 말하고 행동할 것”이란 반성을 했지만, 불과 며칠 가지 못할 것이다. 단언하건대 단적으로 이 자는 과거의 행적을 거울삼아 반성하면서 인생을 살아온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성하지 않는 자는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소크라테스 형님이 충고하지 않던가! 한 마디로 ‘죽어라’라는 충직한 충고의 말이다.
‘행불 상수’, ‘보온병’, 명진 스님과의 문제에서 드러나듯이 한 번도 양심에 따라 행동해 본 적이 없는 자로 생각된다. 결국 ‘좌파스님’ 운운하다가 코너에 몰리게 되자 마지못해 명진 스님에게 사과했지만 그의 내면은 ‘저 짜식 잡아다가 족쳐야 하는데 미치갔네’ 하면서 사법고시 답안지 쓰듯이 제 중추신경과는 무관한 소화 안 되는 사과문을 읽어내려 갔을 뿐이다. 사법고시 답안지에 무슨 인품이 묻어나고, 한 인간의 인간 됨됨이(morality)가 드러날 수 있겠는가? 달달 외운 육법전서만이 적혀 있는 것을!
‘명박스러움’ 삶과 ‘상수생각’에 젖어 살아온 부류들의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나는 너보다 부자다. 그래서 내 재산이 너의 것보다 더 낫다’거나, 아니면 ‘나는 너보다 말을 잘한다. 그래서 내 말솜씨가 너보다 낫다’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보다 법을 더 잘 안다. 그래서 내 법이 너의 것보다 더 낫다’고 모든 것을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해버린 외적 요인만으로 재단하고 판단하는 데 습관을 들인 자들이다.
그러니 독선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오만이 극에 치달아 넘쳐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어디에 가든지, “내가 왕년에 해봐서 아는데…… ”와 같은 허투에 찌든 말투를 습관처럼 해대는 것이다. 이건 못된 생각이 타락한 언어의 질병임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들은 자신이 ‘재산’도 ‘말솜씨’도 ‘법 지식’도 ‘경험’ 자체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간의 가치가 그런 외형적인 것에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는 인간에게 고유한 ‘인격’과 ‘이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마저도 포기하고 살아간다.
재산과 명예, 정치적 지위와 같은 외형적 재산에 매달려 살아온 인생이었기에 천박한 정신에 아무리 보랏빛 나는 빛나는 겉옷을 걸쳤다 해서 그들의 어긋난 병든 정신 자체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한다.
왜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산’이 ‘양식’보다 더 낫다고 여성에 빗대며 발언할 수 있는 저 무모함이 어디에서 생겨났겠는가? 룸에 가서 여성을 보았고, 사법고시에 패스해서 여성을 만났고, 출세해서 여성을 보았을 것이다. 한 번도 여성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라는 평등한 존재로 파악해 본 적이 없는 작자들이란 말이다. 다만 그간 ‘여성’을 두고 본 것이라곤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는 ‘어머니’라는 ‘여성’만을 보아 왔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자들에게는 ‘여성’하면 ‘어머니’ 말고는 다 육체적 쾌락을 위해 남자와 동침하고, 애 낳고, 남편을 위해 지극히 노예적으로 살아가고, 남성을 위해 아름답게 치장하고 화장하는 그런 ‘물질적 몸뚱이’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류의 작자들에게서는 여성들도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내면적 고상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길이 없다. ‘행불된 자식’을 위해서라면 남에게 무시되는 일자무식이 되어도 좋은 그 어머니는 그런 자식을 두어도 행복하실 것이다. 자식이 잘되는 일이라면 어떤 ‘거짓’이라도 진실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도 그 어머니는 행복하다. 그런 어머니들에겐 출세를 위해서라면 거짓을 범해도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라고 말로써 타이르고 기도하면 모든 게 청산된다는 아주 가벼운 생각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생각 뒤에서 양육된 자들에게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론적인 윤리라곤 전혀 자리 잡을 공간이 생겨날 수 없다.
이미 세속적으로 출세하고 난 후에는 진지하고 진중한 말과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기본적 상식에 입각한 인생관 따위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로 전락했다. 이런 자들은 외형적 재산이 마치 자신의 고유한 인격이 되는 듯이 살아온 자들이기 때문에 “혀가 생각보다 앞서 달리게 하는” 잘못을 늘 범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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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상수, ‘자연산’ 파문 대국민 사과… 사퇴는 안 해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당사에서 ‘룸살롱 자연산’ 발언 파동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하면 머리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
생각보다 혀가 앞서 나가니 뒷감당을 하지 못한다. 문제가 발생해야 비로소 깨닫지만 그 반성이라는 것은 잠시 잠깐이고 그 내면에 흐르는 생각의 강물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인 것이다. 그러니 ‘반성은 며칠간의 침묵’으로 끝나는 법이다.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 백날 불러야 그 모양 그 꼴이고 헛일일 뿐이다. 정치적 수사 몇 마디가 반성인 줄 알고 살아갈 뿐이다. 자신의 능력을 넘어 감당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한 자들에게 따라붙는 말의 실수라는 것은 그저 생겨난 우연이 아니다. 자멸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사태로 야기된 것이다.
이 행실은 ‘말 선생’을 옆에 붙여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미 습관이 천성으로 굳어져 고치려야 고칠 수 없는 고질병화 되어 체득화된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 지위를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팔아치운 자들이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부끄러움 포기했고, 인간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 기품마저 벌써 포기한 자들이고, 분별하는 능력은 애당초부터 잃어버린 자들이기 때문에 영원히 반성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우린 이들을 바라보면서 과연 이들이 국가에 무슨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인지를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명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