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은님은 굶어 죽지 않았다
(구조론닷컴 / 김동렬 / 2011-02-09)
최고은님은 굶어 죽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딴 건 의사들이 둘러대는 소리에 불과하다. 사람이 사흘 정도 굶었다고 죽지는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 때도 영화계는 어려웠다. 2000년에 스태프의 평균수입이 년 300만 원대, 2009년은 600만 원대라고 한다. 어렵기는 그때가 더 어려웠다.
이명박 정부 들어 계속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다. 전직 대통령도, 추기경도, 탤런트도, 작가도, 학생도, 노동자도, 어떤 재벌의 자식도, 군인도, 시민도 죽어나가고 있다. 3년 내내 부고만 듣고 있는 느낌이다. 앞으로도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컴컴한 터널 속을 걷는 느낌이다.
그 죽음들 중에는 자살도 있고, 타살도 있고, 병사도 있고, 사고사도 있고, 전사도 있다. 명목은 자살이고, 병사고, 타살이고, 사고사고, 전사이나 본질은 같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라면 그분들은 살았거나, 혹은 조금이라도 죽음이 미뤄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만 죽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소들도 죽고 있다. 돼지도 죽고 있다. 닭들도 죽고 있다. 도처에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덮치고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만 죽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도 죽어가고 있다. 사대강도 죽어가고 있다. 도시도 죽어가고 있다. 사방이 온통 파헤쳐져 죽어가고 있다. 남한만 죽는 것이 아니다. 북한 주민도 죽어가고 있다. 인간의 양심이 먼저 죽어가고 있다. 인격이 죽고, 존엄이 죽고, 자유가 죽고, 사랑이 죽어가고 있다. 모든 것이 생기를 잃고 시들해졌다. 온통 죽음의 홍수에 파묻혀서 점차 죽음에 익숙해지고 있다. 다들 죽음에 중독되어가고 있다. 점차 죽음이 당연시되고 있다. 삶이 스스로 뒷걸음질쳐서 죽음 속으로 물러나고 있다. 온통 퇴행하고 있다.
왜 나는 최고은님이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필자가 이러한 사태를 진작에 예견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앞으로 영화 볼 일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한 지도 오래되었다. 이명박 당선 직후, 유인촌이 완장을 찬 후, 충무로는 사실상 끝장이 났다고 필자는 말했었다. 예견대로 되었다.
이는 스크린 쿼터 때문도 아니고, 불경기 때문도 아니고, 이명박 때문도 아니고, 누구 때문도 아니고, 정확히는 ‘희망의 부재’ 때문이다. 희망의 부재 때문에 어떤 이는 자살하고, 어떤 이는 타살되고, 어떤 이는 병사하고, 어떤 이는 사고사로 죽고, 어떤 이는 전사한다. 사람이 죽기 전에 하늘이 먼저 죽었다. 하늘이 죽어버렸으니 사람이 하늘 쳐다볼 일이 없어졌다. 더 이상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줄이어 무덤 속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진보도 죽고 보수도 죽는다. 다들 죽는 판이다.
온통 죽음의 공기로 가득 찬 검은 하늘 아래에서 최고은님은 그야말로 죽어야만 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지금 영화노조가 타살 운운하며 정부에 항의하고 있지만 오히려 영화노조야말로 최고은님의 죽음에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리플이 많다. 그 주변의 친지와 가족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다. 먹을 게 없어서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살아야 할 그 무엇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님은 죽은 것이다. 이전부터 줄곧 죽음과 죽음 사이에 서 있었기에 죽은 것이다. 죽음의 공기가 가득 찬 광산 속에서 카나리아가 먼저 죽듯이 죽은 것이다. 세상이 온통 검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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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가족과도 멀어지고, 친구와도 멀어지고, 우리 사회의 소통은 전방위적으로 질식되었다. 정부와 국민 간의 소통만 막힌 게 아니다. 도처에서 꽁꽁 막혀버렸다. 필자도 연락하는 사람 숫자가 줄었다. 거리에서도 말을 조심하게 되었다. 수구꼴통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에서 생명은 전방위적으로 위축되어 있다. 사람의 생명도, 가축의 생명도, 자연의 생명도, 남한의 생명도, 북한의 생명도 총체적으로 위축되고 있다. 생명 그 자체가 위축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노무현 대통령은 예견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왜? 사람 좀 살려보려고. 죽음으로 가는 열차를 멈추어 보려고. 당신은 몸을 던졌지만 죽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개혁세력은 앞장서서 길을 여는 역할이고 수구꼴통은 뒤에서 궁시렁거리는 역할인데, 지금 개혁세력이 하 기가 막혀 일제히 침묵모드로 들어가니 수구꼴통들도 뻘쭘해져서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극장에 히트하는 대박영화도 없고, 젊은 청춘들 영화 보러 갈 의욕도 없어졌다. TV에서는 코미디프로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웃을 일이 없어지니 웃길 사람도 없어졌다. 필자 역시 영화에 관한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영화는 희망의 메신저인데 절망이가 희망이를 죽여버렸으니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무겁고 칙칙한 공기가 한국을 뒤덮고 있다.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살아야 할 그 무엇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한국인은 자부심을 다쳤다. 민주화의 자부심, 외세극복의 자부심을 잃었다. 젊은이는 도전할 용기를 잃었고, 노인들은 말을 걸 대상을 잃었다. 그들은 모두 조용하게 희미해졌다. 요즘은 택시기사도 통 말을 걸지 않더라. 노무현 욕도 이명박 욕도 안 하더라. 옛날에는 택시만 타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았는데 요즘은 뉴스를 통 모르겠더라.
최고은님은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 조금씩 희미해져서, 그만 빛이 바래어져서, 생명이 바래어져서 그렇게 사라져간 것이다. 광산에서는 카나리아가 먼저 죽는다. 독한 공기 아래서 최고은님은 가장 앞줄에 서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전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먼저 떠나게 되었을 뿐이다.
묻고 싶다. 이명박 너는 영원히 살 것 같은가? 다 죽고 없는 판에 무엇을 하려는가?
이 땅에서 꺼져가는 생명의 불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모두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할 때 생명의 불은 다시 일어난다. 먼저 희망이를 살려내야 한다. 우리가 다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납득시켜 주어야 한다. 누구라도 나서서 말을 해야 한다. 작은 말 말고 큰 말을 해야 한다. 하늘까지 닿는 쩌렁쩌렁한 말을.
김동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