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순미선

[스크랩]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며 - 고종석 선생의 편짓글

순수한 남자 2007. 6. 9. 14:21

모든 어른들의 딸 효순이에게,

모든 아이들의 친구이자 언니이자 누이 미선이에게

그 일이 없었다면 언젠가 우연히 만날 수도 있었을 너희에게, 그러나 이젠 만날 기약이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너희에게 편지를 쓰는 이 아저씨는 서울에 사는 샐러리맨이다. 너희들 또래의 사내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저씨는 하느님이 정말 계신지, 하늘나라가 과연 있는지 모른다. 사실은 지금까지 그런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렇지만 너희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이 계셨으면, 하늘나라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억누를 수 없다. 이 부끄러운 편지를 그래도 너희들이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하느님이 없다면, 하늘나라가 없다면, 너희들의 짧은 삶이, 그 어이없는 마지막이 더욱더 애통할 것 같아서다.

너희들의 잃어버린 미래를 생각한다


사진/ 미선(왼쪽)과 효순은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단짝 친구였다. 초등학교 1년 학교 교정에서.


효순아, 그리고 미선아.

어느새 반년이 지났구나. 그 일이 있기 며칠 전 너희들은 대구에서 열린 미국 팀과의 축구 경기를 친구들과 함께 응원하며 목이 쉬도록 ‘대한민국’을 외쳤을 것이고, 소리 높여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바로 다음날 인천에서 열릴 포르투갈 팀과의 경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마음이 들떠 있었을 것이다.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이 그랬듯 말이야. 그리고 그날 아침, 들뜬 마음으로 친구의 생일 잔치를 위해 가벼운 발걸음을 떼었을 것이다. 미국과의 경기를 응원하며 느낀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을 그 전날 밤에, 친구들과 나눌 수다 생각에 지레 마음이 들떠 집을 나서던 그날 아침에, 너희들은 곧바로 너희들에게 닥칠 일을 상상도 못 했겠지.

미선아, 그리고 효순아.

아저씨는 지금 너희들의 짧은 삶과 그 삶의 어이없는 끝을 생각하는 대신에 너희들이 잃어버린 미래를 생각한다. 그날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바로 너희들 것이었을 삶을 말이야. 아저씨는 고등학생이 된 효순이를 생각한다. 네 눈에는 더 깊은 지혜가 담겨 있을 것이고, 네 팔에는 더 큰 힘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대학 입학시험이 다가오면서 다소 힘겨워할지도 모를 네 얼굴을 아저씨는 떠올린다. 어쩌면 대학 공부에서 별다른 쓸모를 못 찾고 일찍 사회에 나와 일자리를 갖고 싶어할지도 모르지.

아저씨는 대학생이 된 미선이를 생각한다. 너는 뭘 공부했을까 간호학을 경영학을 국문학을 음악을 법학을 아저씨는 도서관의 미선이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영화관의, 수영장의, 호프집의, 노래방의, 볼링장의 건강하고 쾌활한 미선이를 생각한다. 아저씨는 농촌 봉사활동에 끼인 미선이를, 이주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다른 젊은이들과 어깨를 겯고 종로 거리를 행진하는 미선이를, 장애인 친구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미선이를 생각한다. 학교 신문사에서 공모하는 문학작품을 써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미선이를 생각한다. 네 곁에는 건장한 남자친구가 있겠지. 어쩌면 그 남자친구는 군대에 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강원도 고성으로, 또는 인천 강화도로 남자친구 면회를 가 대한민국 육군 일등병과 함께 환하게 웃는 네 모습을 아저씨는 상상한다.

아저씨는 막 결혼한 효순이를 생각한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을까 경주 제주도 설악산 금강산 타이의 파타야 괌섬 어쩌면 그때쯤이면 남북을 오가기가 쉬워져 묘향산이나 원산 갈마반도의 명사십리로 갔을지도 모르지. 아저씨는 효순이가 새신랑과 함께 걷는 원산 명사십리의 모래톱을 생각한다. 그 일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해당화를 상상한다. 그 붉은 꽃길을 걸으며 효순이 부부가 겪었을 황홀경을, 정겨운 입맞춤을, 오순도순 설계했을 너희들만의 미래를 생각한다. 너와 새신랑은 걷다가 뛰다가 하겠지. 그때가 여름이라면 근처의 송도원 해수욕장까지 걸어가 동해 바다에 몸을 담글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이나 일본 아이들이었다면…


사진/ 스러져 이 세성에 없는 너희의 존재감이 지난 보름 동안 하늘 아래를 그득 채워왔구나. (박승화 기자)


아저씨는 서른이 된 미선이를 생각한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을까 딸일까, 아들일까 걘 미선이를 닮았을까, 남편을 닮았을까 어쩌면 미선이는 결혼을 하지 않고 독립적 여성으로 살기로 했는지 모르지. 그러자면 직장이 있어야 할 텐데, 미선이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간호사 변호사 은행원 모교인 조양중학교의 국어 선생님으로 있을지도 모르지.

아저씨는 마흔이 된 효순이를 생각한다. 눈가에 주름이 지기 시작한 효순이를. 세월을 이길 수 있는 몸은 없다는 걸 그때쯤이면 너도 알겠지. 어쩌면 효순이는 불어나는 몸이 속상해 헬스클럽에 다니기 시작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그 세월만큼 자라난 네 아이를 너는 대견스러워할 것이다. 효순이를 꼭 닮은 딸아이는 그때쯤 막 중학교에 들어갔을까

아저씨는 쉰이 된 미선이를 생각한다. 아저씨의 손위누이 나이가 된 미선이를. 너는 조양중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돼 있을지 모르지. 지금 너희들 또래의 제자들에게 자상한 교장 선생님이. 어쩌면 국회의원이 돼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우리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아저씨는 회갑에 이른 효순이와 미선이를 생각한다. 한 갑년을 되돌아보고 또 다른 갑년을 내다보는 미선이와 효순이를. 그러나, 그날 그 일로 너희 둘의 이 모든 생애는 없던 일이 돼버렸구나. 그리고 정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구나.

효순아, 미선아, 우리 딸내미들아!

부질없는 일이다만, 너희들이 한국 아이들이 아니라 독일 아이들이거나 일본 아이들이었다면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혹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도 이내 정의가 이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너희들이 겪은 일에 정의가 세워지지 않고 있는 것은 분명히 나라가 못난 탓이고, 나라를 이렇게 못나게 가꾼 못난 어른들 탓이다. 그러나 미선아, 효순아. 너희들 일은 또 나라와 겨레붙이의 울타리를 넘어선 보편적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 하나하나에 대한 예의의 문제, 생명 하나하나에 대한 경외심의 문제 말이야.

살아남은 자들의 짐이 너무나 크구나

하늘의 미선아, 효순아.

이 땅의 어른으로서 차마 입 밖에 내기 부끄럽다만, 너희들은 지금 없음으로써 있다. 스러져 이 세상에 없는 너희들의 존재감은 지난 보름 동안 하늘 아래를 그득 채워왔다. 너희들의 부재가 당긴 촛불 하나하나가 무수한 샹들리에 무리를 이루어온 나라의 밤을 밝히고 있는 게 보이니 부끄러움으로 이 촛불을 든 우리들 하나하나의 작은 걸음은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우는 커다란 걸음이기도 하다. 그것조차 너희들에게 위로가 될 수는 없다는 걸, 너희들이 잃어버린 생애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걸 아는 아저씨의 마음은 참담하다.

너희들이 하늘나라에서라도 이 편지를 읽을 수 있다면, 너희들의 넋으로 밝게 타오른 이 촛불들의 행렬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라도 아저씨가 평소에 짐작하던 대로 하늘나라가 없다고 해도, 아니 외려 그럴수록, 살아 있는 우리들의 짐이 더 크다는 것을 아저씨는 알고 있다. 만약에 하늘나라가 없다면, 그날의 일은 너희들에게 곧 우주의 소멸이었을 테니 말이다.

효순아, 미선아.

평안하렴.

12월 셋째 일요일 새벽에

부끄러움을 억누르며 종석 아저씨가 쓴다.

고종석/ <한국일보> 편집위원

 

출전 : <한겨레21> (통권 439호 / 2002. 12.26)

출처 : 타임머신 2010c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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