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경선 결과에 대해 '승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상황인식이 제로에 가까운 단세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문제는 '승복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마치 '승복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번 까발려 드리겠습니다.
1. 끝까지 경선을 벌였던 후보들
끝까지 경선에 임했던 후보들은 승복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동영 후보 측의 불법 부정행위에 대한 사법적 처리 결과'이고 그것을 지켜보는 것 외엔 별도리가 없습니다.
이미 느끼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후보나 캠프 별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따져보겠다는 의지도 약해 보이고 그냥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책임의식 때문입니다. 경선을 끝까지 마쳤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리고 손 후보나 이 후보나 그나마 책임감이 좀 더 나은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손 후보나 찬 후보가 경선 자체를 보이콧 할 수 있는 기회는 몇 번 있었습니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득이냐 실이냐 따지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고 논외로 합니다.)
첫째, 처음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하여 불공정한 경선 룰을 접했을 때, 객관적이고 공정한 룰이 만들어 지지 않으면 합류할 수 없음을 선포하고 발을 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큰 실수입니다.
둘째, 상상하지도 못한 박스떼기, 버스떼기가 드러났을 때, 판을 갈아 엎었어야 합니다. 경추위 및 지도부의 확실한 조사와 그에 상응하는 처벌(후보자격 박탈)을 강력하게 요구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큰 실수입니다.
셋째, 대통령 명의도용, 사망자 명의 등 병원환자명부 도용, 당원명부를 통째로 입력한 시의원의 구속 사건이 터졌을 때, 경선을 중단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큰 실수입니다.
손과 찬은 세 번의 기회를 다 놓치는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경선을 깬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고, 둘째는, 그래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이 판단은 총체적인 실수의 결정판인 셈입니다.
2. 실수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실수의 결과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경선을 깬다는 것이 가져올 부담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까지 경선을 마침으로써, 자신들 스스로를 결과에 승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으로 밀어 넣었고, 불법과 부정 투성이인 후보 정동영에게 자신들의 연명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둘째,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그 정신은 좋지만, 결과적으로 후보와 캠프 모두 오판을 했던 셈입니다. 예측 오판이요, 전략적 오판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활짝 펼쳐진 구도를 알면서도 오판했고, 더구나 상대방의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현실을 목도하면서까지 오판했습니다.
그 결과,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옳지 않은 일이다'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중단시키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이길지도 모른다는 오판과 기대 때문입니다. 경선중단이 가져올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커다란 오판은 모두가 대통합민주신당에 대책 없이, 생각 없이 합류한 것입니다. 그 사건은 2007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상징적이며 가장 바보 같은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잘못한 일입니다. 따라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옳고, 손, 이 후보는 그 결과에 승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검찰·경찰의 수사결과를 지켜보는 것과는 별개로, 그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것이 옳습니다.
비교할 수 있는 급은 다릅니다만, 정동영 후보가 이기기 위해 불법과 부정을 저지른 잘못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후보들이 대의를 저버리고 합류한 것과 합리적인 제도를 만드는 데 실패하여 경선을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잘못 역시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결과에 승복하는 게 옳습니다. 손학규, 이해찬 후보뿐만 아니라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하여 대통령 후보로서 명단에 올리신 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연대책임입니다. 모두 승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들 모두 대통합민주신당에 남아 계셔야 합니다. 그곳을 박차고 나올 명분도 없거니와,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 신세가 되는 겁니다. 냉혹하지만, 그게 정치적인 책임입니다. 제도가 잘못되었든 판단이 잘못되었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옳은 겁니다.
3. 한번 단추를 잘못 꿰면...
그분들은 그분들의 실수와 오판으로 인해 우리의 가장 큰 무기인 '도덕성'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보를 선출해 놓았습니다. 우리의 최종 승부 상대 이명박을 공격할 수 있는 필살의 무기인 '도덕성 우위 확보 신공'이 나약한 후보를 선발해 놓았습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후보를 만들어 내었다는 겁니다.
이제 정말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자랑스러웠던 전사들이 계급장도 떼어버린 패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서 '정동영 후보를 도와서 대통령을 만들자고 요청하는 상황' 바로 그것입니다.
이해찬, '민주개혁진영의 단 하나의 필승카드, 정동영...'
손학규, '손에 손잡고 정동영 후보를 대통령으로...'
유시민, '대한민국 개조, 정동영과 함께...'
한명숙, '정동영과 함께 행복한 세상으로...'
신기남, '정동영과 함께 복지국가건설...'
이런 슬로건을 우리가 봐야 합니까? 우리 앞에서 이런 말씀들을 하시렵니까? 정말 정동영과 함께 그것을 만들 수 있다고 우리 앞에서 그 사람의 이름 석 자를 올리시렵니까?
피눈물이 납니다.
.
.
.
.
4. 선한 사람, 착한 사람, 우리 후보들
정말 훌륭했던 사람들... 우리 후보들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말 이 나라를 훌륭하게 이끌어 가고 지난 10년간 모두가 함께 이룩한 성과를 온전하게 계승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어 갈 자질이 충분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동영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잘못 꿴 단추를 계속 꿰어나가자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고,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손을 이끄는 행위가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정동영 후보로는 이명박을 이길 수 없다고 했던 주장이 전혀 근거없는 말이 아니라면, 그것이 경선에서 상대방을 마타도어 하고 헐뜯기 위해 날조한 멘트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정동영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지 말아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가 우리의 자율적인 의지로 지난 10년의 민주과업을 계승할 적임자를 찾는 노력을 할 수 있도록 돕지는 못할지언정,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정말 정동영 후보가 이명박 후보와 경쟁하여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라는 판단이 자신의 모든 정치인생과 신념 그 모두를 걸고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그를 돕자고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5. 수렁에 빠진 우리 후보들을 구하러 갔던 우리들...
수렁 맞습니까? 그에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구하러 달려갔던 우리에게 무한 책임을 함께 져야 한다고 어느 누가 우리에게 요구할 수 있습니까? 그 요구를 우리가 들어야 합니까?
지지자들의 마음은 부모와 같습니다.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식을 구하려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달려간 부모에게 자식을 구하지 못한 책임을 지라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합니다. 수렁으로 들어간 것을 말리지 못한 죄만으로도 힘겨운 나날이니 말입니다.
바둑에서 고수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복기를 통한 학습입니다.
지금 만약 우리 후보들이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할 것을 결심하는 단계로 시간을 되돌려놓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지금 우리 앞에 닥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다시 잘못된 판단을 반복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단추를 잘못 꿰었던 탓입니다. 이것을 피하는 길은 단추를 모두 풀어버리는 것인데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잘못 꿰어진 단추는 내버려두고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꿰는 것이 옳습니다. 비록 옷매무새는 이상할지 몰라도 그래야 절반의 성공은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1) 우리와 아무런 교감 없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달려갔던 우리의 후보들이, 이번 경선 결과에 대해 우리와 아무런 교감 없이 정동영 후보를 돕자고 깃발들고 나서는 경우가 똑같은 상황입니다.
(2) 우리의 후보들이 그곳에 갔으니 우리도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했던 분들이, 이번의 결과를 보고서도 또 그것을 받아들이고 지지했던 후보와 함께 정동영을 돕자고 나서는 경우가 똑같은 상황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똑같은 상황 속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 독고탁
덧글
똑같은 상황을 반복했을 때의 결과는 '원칙마저 상실한 패배' 뿐입니다.
모두가 함께 수렁 속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책임을 나누어 져야 될 터이니 누가 누구를 비난할 일도 없어 마음이 편할까요?
이쯤 되면 꼭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대안이 무엇이냐고..
대안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분들, 지금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내 놓으라고 말씀하실 분들에게는,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단물만 빨아먹듯이' 정선된 결과물만 요구하는 행위가 언제나 일을 망쳐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원인과 과정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에 대한 현명한 평가와 인식을 공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장 대안이 무엇인가’ 찾는 어리석은 짓보다도, 대안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탄탄하게 만드는 작업에 몰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