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정희를 말해주마!
![]() ![]() 2007/04/09 00:29 |
블링크 :노무현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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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장난 공화국” 중에서
연작시리즈
1. 박정희를 말해주마.
2. 노무현을 알려주마.
3. 노무현의 업적은 경제성장에 있다.
4.
( 본인이 작성중인 책의 제목은 ‘말장난 공화국’이고 ‘말장난은 정신질환’이라는 주장이 핵심입니다. 그 증명은 여기 맹목적인 반대의 댓글들이 반증해줄 것입니다. )
1. 박정희를 말해주마!
( 간략설명 )
박정희의 유일한 업적은 경제발전에 있다. 그렇다면 박정희보다도 경제를 더욱 발전시킨 주체가 있다면 박정희보다도 우선 칭찬해야하는 것이다. 누가 있을까? 현재의 중국공산당이 있다. 세계 경기가 호황이었던 박정희시대보다도 불황이고 국가간의 경쟁이 그 당시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치열한 상황임에도 박정희 시절보다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공산당에게 ‘너 잘한다.’라고 칭찬해야 하는가?
국내에서도 박정희 시절보다도 더욱 앞서는 경제성장 시기가 있었다. 기분 나쁜 얘기지만 일제 강점기간 동안이었다. 박정희의 경제발전 업적 사례로 경부선 고속도로 건설을 말하지만 일제시대에 벌써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었고 현대 의미의 도로는 신작로라는 이름으로 대부분 일제시대에 건설되었다.
물론 우리를 위해 건설된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전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치루기 위한 착취의 수단으로 건설되었지만 수력발전소에 화력발전소에 각종 공장에 더해서 법원 만들고 학교 만들고 경찰서 만들고 박정희시대에 만들어진 한강다리는 일찌감치 무너졌지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제1한강교는 아직도 튼튼하게 남아있다. 전근대적 국가가 일순간에 근대화국가로 탈바꿈된 것은 세계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시설과 제도를 고스란히 남겨두고 패망하여 도주하였다. 더구나 당시 대다수 국민들은 일제가 들어온것을 환영하는 분위기 였다고 한다. 경제적인 측면만 고려한다면 일순간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일제에게 ‘고맙다’고 절해야 하는가?
여기서 경제의 본질을 언급해보자. 경제의 본질은 국민의 수준이다. 국민 수준이 20점짜리라면 그 국가의 모든 수준은 20점을 넘을 수가 없다. 다만 사회 각 분야의 발현의 시기가 다르기에 동시에 20점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들 20점짜리 우글대니까 정치인들을 수입하자는둥의 기막힌 말들을 쏟아내지만 그 20점짜리 누가 뽑아줬나? 20점짜리들이 스스로 당선되었는가? 무조건 정치인들 욕하는 자들의 수준이 20점이기에 20점짜리 정치인은 탄생하는 것이다. 선진국의 정치인들이 훌륭한 것은 정치인이 휼륭한게 아니라 그들을 뽑아낼 정도의 민중의 수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경제 역시 민중의 수준에 맞추어 화답하지만 정치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20점짜리 국민이 대다수이면 인위적으로 경제부양책을 사용하더라도 국민수준인 20점으로 다시금 추락하게 되어있다. 이 주장은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너무도 명확하게 증명되고 우리의 IMF도 좋은 사례가 된다. 인위적으로 경제를 살리더라도 민중의 수준을 동시에 상승시키지 않는다면 인위적인 성장은 다시금 추락으로 연결되게 마련인 것이다.
현재 세계의 모든 선진국들은 현재의 경제발전 이전에 산업혁명기를 거치고 그 이전에 개인의 자각의 수순을 밟는다. 개인의 자각이 있으므로 개인의 발전이 도모되기 시작하며 이의 총합이 경제의 발전으로 축적되는 것이다. 개인의 수준의 총합이 경제로서 나타나는데 다만 시기적으로 사회에 발현되기 위해서는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정치와는 다르게 30년 이상의 격차를 두고서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제아무리 경제발전을 가져다주었더라도 일제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좀 먹고살기 좋아지면 뭐하나? 개 돼지에게 먹을것 던져준다고 개 돼지가 행복할것이라는 발상과도 같은 생각이다. 더구나 인간에게 있어서 신체적 자유와 더불어 사고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보장되어 있어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최소한의 권리를 박탈한게 일제이고 공산당이고 박정희정권인 것이다.
‘어떻하든 경제만 발전하면 제일’이라는 말장난이 뒤따라오겠지만 그야말로 말장난에 불과하다. 민중과 지도부의 수준에 있어서 지도부의 수준이 높다면 문제는 적다. 하지만 민중의 수준이 높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프랑스 대혁명은 결국 높아진 민중의 수준을 무시한 지도부의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고 영국의 권리장전은 높아진 민중의 수준을 도입했기에 유혈충돌은 막을 수 있었다. 중국은 높아진 민중의 수준에 놀라서 민중의 수준 상승을 일부 허용하고 공산당 자체의 수준을 일부 높인게 일련의 천안문사태이다.
하지만 천안문 사태는 종결된 사건이 아니다. 중국은 향후 100년 이내에 세계최고수준에 도전할 것이고 이 상태에서 민중의 수준은 현재 미국민의 수준 정도에 도달할 것이지만 지도부는 공산당의 체제로서 그 수준까지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는 다시 한번의 충돌이 발생할 것이다. 20점짜리 민중과 지도부끼리 충돌한게 천안문 사태라면 국가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하지만 50점 60점의 상황에서 충돌한다면 양상은 간단해지지 않는다. 끝없는 추락만이 기다릴 뿐이다.
박정희가 무얼 했다고? 경제를 살렸으니까 고맙다고 생각하라고? 박정희를 인정하자고? 그러면 박정희보다도 훌륭한 중국 공산당은 더욱 칭찬해야하고 그보다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해준 일제는 더더욱 칭찬야야 하는 것인가?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고?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본인 스스로가 개 돼지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개 돼지였다면 행복한 나날들이었을 것’이라고 인정해주마!
( 상세설명 )
박정희는 평가가 상반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일 것 같다. 보릿고개의 처절한 아픔을 맛본 세대의 평가는 그야말로 구세주요 생명의 은인이었을 것이다. 굶어본 사람만이 그 고통을 안다고 했다. 그만큼 처절했던 당시의 아픔은 지금의 언어로는 형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고통이 컸던 만큼 그를 극복하게 해준 사람의 고마움도 크게 작용하는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반대파의 의견도 만만찮게 존재한다. 지금의 고질적 한국병을 잉태한 장본인이고 그 시대에 그가 아니고 그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그만한 일은 이루어냈을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지상의 목표는 먹고사는 것이고 근면성으로만 따진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민족 중에서 최고로 근면한 한민족을 대상으로 그것도 굶주림에 지친 한민족은 그야말로 투지의 화신이었을 것이다. 이런 국민을 대상으로 정치하는 정치가는 복 받은 정치가일 수밖에 없다. 실질적으로도 그 당시의 대결양상을 보였던 정치가들 역시 많은 기대를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 상반되는 의견에 한 가지 사례를 들어 필자의 의견을 말하고자 한다.
( 예를 들어 선진공업국이었던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300년 동안 식민지로 두고 지배했지만 프랑스가 떠난 뒤 인도차이나 지역에 남겨진 것은 여전히 가난한 식민지 농업경제 뿐이었다. 이점에 있어서는 오랜 기간동안 서구의 식민지를 경험했던 모든 지역이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식민 모국에 있어 식민지란 원료공급 기지와 공산품 판매시장으로의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영원한 착취를 뜻한다.
반면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단순한 식민지가 아니었다. 조선은 일본이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수백 년 동안 오매불망 점령하고자 했던 전략적인 지역이었다. 일본에게 있어 조선은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지역이었고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을 점령한 일본은 꿈에도 나중에라도 시간이 흘러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선을 식민지로서가 아니라 일본의 일부로서 생각하면서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점은 대만과 조선을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대만은 일본에게 있어 사탕수수 농업을 통해 외화를 획득하는 전형적인 식민지였다. 따라서 대만에는 식민통치기간동안 변변한 공업시설은 하나도 들어서지 않았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일차적인 농업생산성 향상과 교육 및 사회제도 개선이 완료되자 본격적으로 공업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전쟁 말기에는 일본의 핵심적인 중공업시설들을 대부분 조선반도에 건설했던 것이다.
조선을 점령한 일본은 이듬해부터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 지주와 왕족의 땅을 소작농들에게 분배해주었다. 이것은 오랜 세월 자기 땅을 갖지 못한 채 지배층의 노예로만 살아왔던 농민들에게는 새 세상이 열렸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그리고 일본의 지배가 시작된 이후 비로소 개화가 시작되어 학교가 설치되고 경찰서와 법원이 만들어져 법치주의가 시작되었으며 경제시스템이 정비되어 조선은 본격적인 산업혁명기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인민들이 새 지배자인 일본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는 점은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잘 나타나 있다.
비록 식민통치 말기에는 일본이 총력을 기울인 전쟁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많은 고통을 당해야만 했지만, 일본의 식민지였던 기간이 조선의 실질적인 산업 혁명기였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그 정도는 우리도 할 수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시절 조선반도는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일본의 일부였던 것이다. )
윗글은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었으니 일본은 우리의 은혜국이라는 한 칼럼리스트의 주장이다. 일본을 미워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한걸음 후퇴하여 냉철히 평가해보자. 단지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었다.’는 하나의 사실만으로 일본을 평가한다면 위 주장은 사실이 된다. 경제발전의 공로로 박정희정권의 잘못을 호도내지는 상쇄시켜야 한다면 일본의 경제발전에 대한 공로로 일본을 공로국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위 논리도 옳은 주장이 된다. 박정희정권이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고 그로인해 다소간의 인권유린과 강압통치가 용인된다면 비록 그 행위가 좀더 잔혹하다는 정도의 차이만이 있고 외국인에 의해서 저질러졌다는 점 외에는 일본의 행위도 인정받아야 정당할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모두들 할말이 많을 것이다. “어떻게 일본과 박정권을 비교하느냐”는 등의 감정대응은 잠시 접어두고 논리로서 답해야하겠지만 필자는 둘을 구별하여 평가해야할 하등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백번을 양보하여 일제의 통치로 인해서 많은 경제의 발전이 있었다고 인정해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행위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일제가 비판받아야하는 가장 큰 잘못은 우리의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단절시킨데에 있다. 일제가 강점한 36년으로 인하여 역사의 흐름상 당연히 나타났어야할 것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시민의식 발전의 중단이다.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그 구분의 가장 큰 특징은 물질 면에서 ‘산업혁명’과 정신면에서 ‘개인의 자각’을 들 수 있다. 산업혁명은 인력을 대신해서 기계가 생산해내는 시대를 일컫지만 그 단순하게 설명되는 이면에는 수백 년의 준비과정이 필요해진다. 단순히 과학자 기술자 몇몇이 새로운 기계를 만든 것으로 산업혁명은 촉발되지 않는다. 그 몇몇의 과학자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사회의 인식이 바뀌어야하고 이 변환의 과정은 자발적이거나 인위적일 수 없기에 그 계기가 되는 개인의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개인의 자각으로 인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부단의 노력은 가일수되고 이 노력이 조선 중기처럼 정부에 의해서 탄압받지 않는 사회가 구현되어 있어야 하고
조선 말기의 상황은 암울함만이 존재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암울함을 극복키위한 적절의 노력들은 시작되고 역설적으로 이 노력들은 암울함의 바탕위에 세워지는 것이고 여기서 파생된 노력들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까지는 수많은 절망들의 결집이 필요하게 된다.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는 말은 이 속성을 비유한 말로서 이 영웅들이 사회를 변혁시킨것처럼 인식되겠지만 그 영웅을 탄생시킨 것은 그 영웅이 사회의 부조리를 발견하고 그 부조리를 바로잡을 대안을 인식시키는 역할을 하는 모순된 사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회를 변모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모순된 사회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이고 도래된 ‘모순의 사회’는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으로 이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전의 원동력은 갖춰지는 것이다. 모순을 인식하는 개인의 자각으로 인하여 민주주의가 싹틀 수 있었고 그로인해 우리가 가져야할 당연적 발전이 지연된 것이다. 일찍이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들이 지금의 선진국임은 시사하는바 크다. 즉, 정치든 사회든 문화든 일단 그 국가의 구성원 개개인의 자아의식이 있는 때에만이 발전의 기틀은 마련되는 것이다.
조선말기 민중봉기가 잇따르고 사회는 극도의 혼란기가 찾아오지만 이것은 민중의 자각이 가져오는 일종의 수순이었다. 세계사의 흐름을 보더라도 민주주의는 어느 날 저절로 이루어진게 아니었다. 절대왕권에 반하는 시민운동이 줄을 잇고 그 투쟁 속에서 얻은 결과물이 민주주의이고 이렇게 발전된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바탕으로 유연한 사고와 합리적인 결정을 특징으로 한다. 모든 투쟁의 승리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논공행상이 있지만 그 시민운동의 승리의 세력이 어느 특정집단이 아니고 수많은 민중들이었기에 그 많은 승리자들의 논공행상에 있어서 그들에게 적절한 배당을 해야 했기에 자연발생적으로 다양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 대목을 옹호하는 글을 인용해보자.
( 흔히들 나라가 망했다거나 나라를 잃었다고 할 때 우리는 암묵적으로 이것은 잘못된 일이고 불행한 일이어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배운다. 한국의 어린 학생들은 날마다 국기를 보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라고 듣기에도 섬뜩한 전체주의의 서약식을 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이 같은 전체주의 충동은 장기적으로 한국인들을 집단 파시스트로 만들어가고 있으며 모든 일에 비판 없이 맹종하는 쥐 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잘난 체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 개성이라면 한국인들은 개성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사물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스스로의 가치관으로 수용해 남과 다른 행동과 사고방식으로 갖는 것을 개성이라고 본다면 한국인들은 개성이 없는 사람들이다. 한국인은 모난 돌이 정맞는다 두루뭉실하게 살자 좋은게 좋은거다 는 식의 뜬구름 잡는 말들을 창피한 줄 모르고 아무렇게나 내뱉고 이것이 실제로 삶의 기준이 되는 사람들이다. 우리 스스로가 미개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모든 사안에 대한 바른 인식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허황된 개념들은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한국은 여러 통계와 여론조사가 보여주듯이 세계에서 가장 국수주의가 강한 나라이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구소련과 같은 국가들에서는 연방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국가주의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이들이 수많은 이질적인 민족과 사실상의 작은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는 연방체라는 점에서 충분히 수긍할만한 정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게라도 일체감을 조장하지 않으면 그같은 연방체는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처럼 조그만 지역에서 균질한 집단으로 구성된 국가에서 국수주의는 위험할 뿐이다. )
윗글은 유연성과 다양성이 부족 되면서 나타나는 우리의 모습을 지적한 것이다. 고정된 사고방식과 과장된 유교사상에 익숙해진 우리는 이 글을 처음 접했을 때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느낌이 다소 껄끄럽더라도 다음 장에서 본격 논의하기로하고 일단은 넘어가자. 선진국이 선진국인 이유는 경제의 규모만이 크다고 선진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군사 시민의식 제도 교육 종교 등등 사회제반의 모습에 있어서 나름의 합리성을 갖고 있을 때 선진국이라 한다. 한국을 말할 때 선진국이라 칭하기에는 아직 낯간지러운 면이 있다.
경제규모로는 세계 10위권에 육박하고 군사력 역시 강대국의 반열에 있으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민족이라지만 후진국으로 분류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바로 시민의식이다. 앞의 열거대상은 돈으로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출 수 있지만 정치수준이나 시민의식등은 인위적 조작이 불가능하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속의 문화를 말하겠지만 다음 세대에 넘겨줄 이 시대만의 독특한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도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분위기라기보다는 제도의 정착단계에 있는 과도기적 시기라고 규정해야 옳을 것이다.
박정권은 사회의 불안을 일소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는 선택었다고 말한다. 당시는 혼란스러웠다. 4.19 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을 종식시켰다는 흥분은 논공행상을 원하는 다수의 승리자가 흥분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이 혼란이야 말로 우리가 민주주의로 가는 중요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이 혼란을 대화를 통해 극복하고 그 대화 속에 많은 가치관들을 수용하며 그 극복의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다양성과 유연성의 사회구현을 지금에서야 시작하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들어와서의 각종 시위와 혼란 등이 어쩌면 60년 전 아니 조선 말기에 있어야할 수순이 이제야 진행되는 것이다.
이 소중함을 한 순간에 날려버린 장본인이 박정희요 전두환 노태우이고 일제인 것이다. 돈 몇 푼 쥐어줬다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유린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자유 속에는 미래의 가치와 희망이 내재되어있다면 자유만이 유린된 것이 아니라 미래까지도 유린된 것이다. 지금 경제의 어려움으로 모든 잘못을 현재의 대통령에게 뒤집어 씌우고 심지어는 전두환시절이 좋았다는 망언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지만 불과 몇 년 전에 자유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열사들의 온기마저 식지 않았다. 자유의 소중함이 벌써 사그라지지는 않았을 것인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어떠한 가치관이라도 자유민주주의와 맞바꿀 가치관은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중함이 수십 년간 단절되었다면 바로 그 단절점부터 거슬러 올라간 시점부터 역사 발전은 다시 시작되어야하지만 그 단절점이 온전히 보전될리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단절의 역사는 단순한 ‘시간의 문제’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말하는 우리에게 그 유구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고 단순히 역사발전이 더디게 이뤄지는게 아니라 수많은 가치관들이 사라져버린 것이고 이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소중함은 더더욱 가치 큰
일제의 강압으로 산업혁명이 일찍 들어왔다거나 박정희에 의해서 산업발전이 더욱 앞당겨졌다는 주장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조금 늦게 시작했더라도 우리의 갈길을 걸어갔어야 옳았다. 빨리 시작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일찍 시작한다고 멀리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20세기 초까지 선진국의 대열이었던 아르헨티나를 생각하면 된다. 너무 멀리 떨어진 나라라서 현실감이 덜하다면 우리를 관찰해보면 된다. 중국보다 일찍 시작한 우리이지만 이제는 그 추월을 염려하는게 아니고 그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눈치를 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박정희를 인정한다면 박정희 이상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일궈내는 중국 공산당도 칭찬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고 중국 공산당을 칭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빨갱이라서가 아니라 좀 더 가치있는 발전들의 장애물이 될 것이라는 명확한 사실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의 잘못 정도는 용인될 것으로 판단했고 그렇기에 쿠테타라는 극악무도를 감행한 것이다. 대한민국이 1~20 년만 영위하고 문 닫을 국가라면 그의 판단은 옳은 판단이 된다. 하지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아 없어지고도 영속적으로 영위되어야하고 그보다 먼저 백년 이백년 후를 생각해야하고 그보다 먼저 4~50 년 후를 견뎌야하는 국가임을 인식하다면, 최소한 20년 후를 내다볼 안목이라면 그토록 무식하고 미련한 판단은 없었을 것이다.
일제보다도 박정희가 더욱 비판받아야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상 너무도 중요한 시기의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사실이다. 한 국가가 전성기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건국 이후 100년 이내에 발전의 기틀을 다지기 전에는 그 이후의 발전은 불가능해진다. 초기의 어수선함은 발전의 소중한 거름이 되는 것이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장년기 노년기의 과정은 국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성장기때 제대로 영양섭취 못하고 술 담배 마약에 찌든 인생이라면 장년이후의 옳은 삶으로 복귀하더라도 시기적으로 늦은 현실이 된다. 그 어수선함이 싫다고 어린이에게 강제로 성장촉진제 주사하고 키 작다고 인위적으로 늘리는 것으로 올바른 성장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 역시 건국 당시의 어수선함을 극복하면 발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이 시기에 내면의 충실함이 도모되었다면 지속 발전의 기틀은 마련된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최고 전성기는 도래되게 되어 있다. 인생의 성장기만 중요한게 아니라 국가의 성장기 역시 그 이상의 중요성을 내포한다는 뜻이 된다. 최고의 전성기는 외적인 국력 발산이 아니라 내적인 역량 축적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지금의 이 어수선함이 싫다고 다시금 박정희 전두환이 나설때의 국가운명을 생각해보면 결과는 확실해진다. 이 확실함이 25년전, 45년전이라고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국가 부흥의 개혁은 자발적인 개혁과 인위적인 개혁으로 나눠지는데 인위적인 개혁은 개혁의 마인드를 갖춘 선구자의 지휘 속에 이뤄지지만 대부분 기득권과의 투쟁으로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광범위한 개혁보다는 ‘의미 있는 시도’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자발적인 개혁은 대다수 구성원의 인식이 개혁을 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혁은 가속에 탄력을 받게 된다. 자발적인 개혁이 대안이지만 몇 가지 조건이 맞춰져야 자발성은 발현된다.
대다수 구성원이 인식을 같이하는 계기는 인위적인 경우는 불가능하고 시대상황이 이를 만들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의 건국 초기나 한 정권의 장기집권 붕괴 후처럼 변화가 자연스레 발생한 상태라면 ‘한번 바꿔보자.’ 라는 인식은 대다수 국민들의 희망사항이 된다. 이 절호의 기회에 올바른 개혁 리더가 있다면 개혁의 성공 가능성은 무궁해지는 것이다. 너무도 소중한 이 시기를 날려버린 주체가 일제이고 이승만이고 박정희이고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인 것이다.
어린 것이 굶어보지 않아서 철없는 소리한다고 노인 분들은 말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평가는 후대에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결과는 자명하다. 지금의 굶은 세대들도 가고 철없는 젊은 세대도 가고 많은 세월이 흐른 뒤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 배고픔의 단순논리로서 역사를 들여다보는게 아닐 것이다. 하나의 현상이 후대에 얼마나 많은 밑거름이 되었는가를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의 이 비참함은, 그를 초래한 장본인에게 책임조차 묻지못하는것으로 더욱 초라하게 한다.
역사상 많은 침략과 침입이 있었다. 이 행태 중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문화민족이 침략했을 때는 피침략국가의 문화를 이해하고 가치를 인정하며 보존하려한다. 독일 나치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에펠탑이, 개선문이 건재한 이유이다. 하지만 야만족이 침입했을 때는 다르다. 침략으로 끝이 아니고 문화적 열등감으로 피침략국의 모든 문화재를 부수고 불태운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이지만 그 자랑스러움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까닭이다.
이 야만민족에게 당했기에 일제 강점기간이 더욱 치욕스럽고, 위에서 인용한 글처럼 영양가 있는것도 아닌 것이다. 문화국민으로서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것이다. 군대가 총칼을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힘과 무력으로 수많은 가치관의 다양성의 사회를 ‘안정시킨다.’는 허울 하나로 깔아 뭉개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라도 용서받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국민을 이등병 정도로 생각하며 명령불복종하면 무력을 사용하는 등의 폭력정치의 그 폐해가 수십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나타나는 것이다.
제아무리 경제발전을 가져다주었더라도 일제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좀 먹고살기 좋아지면 뭐하나? 개 돼지에게 먹을것 던져준다고 개 돼지가 행복해 할 것이라는 발상과도 같은 생각이다. 더구나 인간에게 있어서 신체적 자유와 더불어 사고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보장되어 있어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최소한의 권리를 박탈한게 일제이고 중국공산당이고 박정희정권인 것이다.
말장난 : 경부선고속도로개설, 새마을운동, 열거하기도 벅찬 업적들은 전부 보이지 않는건가?
= 박정희만 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는데, 개혁편에서 다시 언급되지만 개혁은 아무나하는게 아니다. 짝퉁의 개혁으로 세상이 올바르게 발전하리라는 환상은 수준 낮은 안목에서 바라보기에 그렇게 착각되는 것이다.
말장난 :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박정희에 의해서 산업발전이 빨랐던 것은 사실이쟎느냐?
= 제발 그러자. 박정희가 나쁜 놈이었다는 것만 인정된다면 역사발전은 좀더 빨리 이뤄진다. 위에 자세히 설명하쟎냐? 그 잘못들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박정희의 아류작들이 만들어지쟎느냐? 그게 산업발전이냐? 전두환때가 오히려 좋았다구? 말장난이 왜 정신병인지는 증명되는 것 아닌가?
박정희가 무얼 했다고? 경제를 살렸으니까 고맙다고 생각하라고? 박정희를 인정하자고? 그러면 박정희보다도 훌륭한 중국 공산당은 더욱 칭찬해야하고 그보다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해준 일제는 더더욱 칭찬야야 하는 것인가?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고?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본인 스스로가 개 돼지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개 돼지였다면 행복한 나날들이었을 것’이라고 인정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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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드립니다. |
박정희를 까면 개소리이고 쓰레기라면, 진실을 말해도 무시하고 알아먹기 쉽도록 설명해도 진실이 안통하고 자신말만 하는 놈들은 뭐하는 놈들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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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드립니다. |
글을 거꾸로 해석하셨습니다. 윗 글 역시 박정희가 말아먹은 경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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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드립니다. |
"공허한 메아리같아 안타깝다." 고 말씀 하시는 분들 계십니다. 노무현! 단 한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벌써 이만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미약한 시작은 의미있는 몸짓에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천천히 내딛다보면 목표는 가까워지고 아무것도 안하는 상태보다도 분명 급속한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를 꼭 내가 봐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못보면 아들이 손자가 그리고 이땅에 살아갈 우리의 후배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 이 길을 걸어갔던 수많았던 선배들이 있고 그들과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확신만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것은 어떨런지요. 자주 찾아주시고 따끔한 질책의 말씀도 아끼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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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드립니다. |
역시 기대를 저 버리지 않는군요. 김일성은 나쁜놈, 이완용은 더더욱 나쁜놈, 그래도 이놈들은 지위와 권력이 있기에 생각없이 살아도 되는 놈들입니다. 생각없는 놈은 더더더욱 나쁜 놈, 댁같은 부류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본문 어디에 김정일이 김일성이 좋은 놈이라고 써 있습니까? 북한은 내재적, 남한은 자학적? 어느 부분에 그런 글이 써 있습니까? 빨갱이는 분명 나쁜놈이고 생각없는 놈은 그보다 못한 놈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한글 정도는 읽고 해석할 정도 이후에 비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짧은 댓글에서 오류로 점철된 문장들은 오류로 뒤범벅된 수준을 의미합니다. 왜 댁들은 한결같이 그 수준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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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드립니다. |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사전 양해없이 귀하의 글을 이곳에 옮기고 마침표와 문단나누기 정도만 수정했습니다.
연세가 많으신분 같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과 의견대립으로 몇자 적는게 상당히 조심스럽고 고통스럽지만 진실에 나이 대접해서는 안될것입니다. 이것 저것에 모두 양보한다면 진실은 진실이 아니라 왜곡에 불과해집니다. 이것을 전제하고 몇글자 올리겠습니다.
귀하의 글에서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는 마음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 고치던가 노력하라고 하셨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정의와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한 다음의 일입니다. 정의와 진실이 선행되지않는 의욕의 위험함은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을것이지만 간단한 하나의 사례를 든다면 히틀러의 생각일것입니다. 히틀러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은것은 아닙니다. 국가와 민족을 생각했지만 잘못된 생각이었기에 엄청난 결과는 초래된 것입니다. 그 유형의 잘못들이 지금도 반복하고 있기에 이 글은 작성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판단한 이후에 행동은 시작됩니다. 여기서의 행동은 본인 혼자의 행동이 아니라 국민전체의 행동을 의미하게되고 그렇기에 교육이 존재할 것입니다. 말로만 떠들지말고 실천에 옮기라고 훈계하셨습니다. 실천이라는게 땅파고 땀흘리는 피상적인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본인이 행동을 안하는게 아니라 그 행동을 유발할 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옳음과 그릇됨의 구분이 있어야만이 옳음의 추구는 이뤄집니다. 이 구분작업이 본인의 행동입니다. 그게 대수냐고 반문하실지 모르지만 현재의 어려움이 그 판단없이 행해진 행위들때문에 귀결된 결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박정희에 대한 무조건의 향수가 잘못을 부추기고 있다고 본인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위 본문글뿐만 아니라 본인의 다른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합니다. 본인 주장이 틀렸다면 귀하께서 지적하시듯 '정신 나간 놈'의 주장에 불과해지지만 본인 주장이 맞다면 상황은 아주 심각해집니다. 진실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현재의 사회가 됩니다. 이 중차대한 문제제기가 미미하다고 폄하하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한강에 돌던지기처럼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그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를 살아보지 않았기에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나간 세월에 대해서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직접 살아봐야 모든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모든 역사는 당시 살아본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그들의 기록과 유물을 토대로 재해석한것들입니다. 귀하의 주장대로라면 현존하는 모든 역사는 직접관찰된게 아니라서 의미없다는 주장과도 같아집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삐딱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사실을 근거에 입각하여 주장하는데도 그 반론의 근거도 없이 이토록 매도하고 계십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대하며 진실에 대해서는 이렇게 외면하고 계십니다. 근거도없이 자신이 믿고싶은 사항만을 주장한다면 그것이 말장난입니다. 왜 진실이 말장난에 가려야 합니까? 진실이 말장난에 가리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자의 노력입니다. 판단의 근거는 많습니다. 문제는 그 판단의 근거를 무시하고 온갖 말장난으로 진실을 호도하고 왜곡하는데 있습니다.
모든 근거들 들이대며 이토록 자세하게 설명하는데도 진실은 통하지 않습니다. 귀하께서 주장하시는 실천의 일환으로 이글은 작성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없고 근거도 없는 비난을 우선하고 계십니다. 귀하의 주장처럼 남을 비난하고 욕하는데 주안점이 주어진게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는데 진실에 대한 평가없이 무조건 비난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시는 귀하의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습니다. 본인 역시도 그 범주에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옳은지에 대한 연구는 한두번의 짧은 관념으로 이뤄질 성질이 아닙니다. 우스워보이는 졸필이지만 20년 이상을 고민하고 10년 이상을 가다듬은 글들입니다.
다시 한번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기존에 믿었고 믿고 싶은 관념을 벗어나 냉철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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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되면 평가하지 맙시다. |
본인 글을 거꾸로 해석할것같아서 "간략설명/상세설명"으로 나눠놨는데도 대충 거꾸로 해석하고 이해가 안간다면 할 말 없어집니다. 이해가 안된다며 거침없이 비난하는것은 무슨 만용입니까? 현봉 님/ 글 읽어봤습니다. 위 말장난족들과는 좀 달라야하지않습니까? 서프에 많은 글 올리며 높은 점수 획득하신 분이 본인의 글마다 이런 정도로 밖에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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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은 수정하지 않습니다. |
본문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근거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본인글을 반대하는 모든 글들이 근거없이 비난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잘못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한다면 수용하겠습니다. 하지만 근거없는 비난은 말장난일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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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 할 수 있습니다. |
인생을 살아가며 말장난없이 진솔하게만 살아가는게 정답은 아닐것입니다. 오히려 정직을 강요하는 자들이 보수주의자들임은 조금의 관찰로도 발견되어질 것입니다. 말장난은 살아가는 인생에서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때와 장소는 가려져야 합니다. 말장난의 대상이 학문이고 역사이고 정치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정의와 진실이 말장난에 가려집니다. 정의와 진실의 추구는 몇천번 몇만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진실과 정의보다도 말장난이 인정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내가 살고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면 상황은 심각해집니다.
본인의 일방적인 주장에 하실 말씀들은 많을겁니다. 모든 반론을 적극적으로 환영합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반드시 근거에 의해서 말씀하셔야 합니다. 아무런 근거없이 말꼬리잡고 트집잡는 행위를 말장난이라고 칭했습니다. 이 말장난을 진실로 믿는 상태를 정신질환이라는 표현 이외에 달리 규정할 단어가 없습니다. 정신질환의 미치광이들이 날뛰는 국가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그 놈은 정말로 나쁜놈입니다. 그점만은 인정되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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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 |
정리되지 않은 졸필을 성심껏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댓글을 남기신 모든 분들께도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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