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일본 제국의 협력과 베트남 친일 협력집단 |
번호 199895 글쓴이 정의의 단칼 조회 38 누리 10 (10/0) 등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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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일본 제국의 협력과 베트남 친일 협력집단 노영순 I. 머리말 1940년 9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북부로 진입해 들어갔으며, 1941년 4월 인도차이나 남부까지 점령했다. 각 국면에서 프랑스는 일본에 가능한 최대의 협력(Collaboration)1)을 했는데, 이는 1945년 3월 일본이 프랑스 식민행정을 완전히 접수하고 현지인 ‘독립정권’을 인정하게 되는 시점까지 계속되었다. 이렇듯 인도차이나에서 1940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전개된 기이하고 예외적인 프랑스와 일본 제국의 협력을 규명하는 것이 본 연구의 한 목적이다. 기이하다는 의미는 유럽 구 제국협력체제의 일원인 프랑스와 신흥 제국이면서 ‘새로운’ 의미의 제국협력을 이용하고 있던 일본의 만남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예외적이란 의미는 ‘제국주의 세력간의 협력’이 한 영토(이 경우에는 인도차이나) 안에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과 프랑스 제국의 협력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가 정치와 행정 주권을 보전하는 대신 일본이 경제와 군사 우선권을 갖는다는 것에 기반한다. 이것이 베트남인, 특히 친일세력에게 의미하는 바를 밝히는 작업이 본문에서 수행될 것이다. 1930년대 말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관심을 보이자, 이 기회를 이용해 프랑스 식민정권을 몰아내고자 의도했던 베트남인들의 세력이 모양새를 갖추어갔다. 일본이 서구 식민 세력인 프랑스의 타도에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러일전쟁 이후 일부 베트남인의 오래된 기대 때문에 1937년 중일전쟁 이래 일본이 중국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일본군이 국경을 넘어 인도차이나를 점령하려는 시점은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기대와 인식을 가진 베트남인이 친일세력으로 전화되어갔으며, 이들의 초기 친일의 동기는 프랑스 식민정권의 타도에 있었다는 점에서 다른 민족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목도한 상황은 일본의 선택이 자신들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사실이었다. 앞서 말한 프랑스와 일본의 협력은 제국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요소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베트남의 친일 요인과 집단의 활동과 성격을 규정지은 중요한 맥락이었다. 바로 이 역사적 환경 하에서 일본점령 시기 가장 일관성 있게 친일협력의 양상을 보였으며 친일세력의 확산과 조직화에 커다란 역할을 한 끄엉데와 복국동맹회의 활동을 규명하고 평가하는 작업이 본 논문의 두 번째 목적이다. 이들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구국영웅’과 ‘애국주의자’에서 ‘친일민족주의자’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의 꼭두각시’, ‘친일매국노’, ‘친일월간’(親日越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는 사실은 그야 말로 베트남에서 친일문제가 가지고 있는 복잡다단한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II. 베트남인 친일협력의 맥락: 프랑스와 일본 제국의 ‘협력’ 과정 1940년 6월 프랑스 국토의 절반 이상이 나치독일의 점령 하에 놓이고, 비시에 수도를 둔 페땅(Henry-Philipe Petain)정부가 독일과의 협력을 선언하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정세에도 변화가 왔다. 이 변화를 주도한 세력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중국 침략 이래 오랜 숙원을 이 기회에 해결하고자 했다. 일본은 “대중국 작전 기지를 설정함과 동시에 중국측 보급연락로 차단 작전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1940년 6월 27일 인도차이나를 통과하는 장개석 원조물자 수송 금지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정부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중국-베트남 국경을 감시하기 위해 일본 대본영에서 파견된 니시하라(西原一策)를 장으로 한 상주소를 개설했다.2) 인도차이나총독이 이러한 일본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서 두 제국간의 협력관계가 설정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었다. 얼마 안 있어 일본은 프랑스에 군사적인 요구를 했다. 이는 북부인도차이나에 일정 일본군 병력이 주둔할 수 있고 이 지역을 통과할 수 있는 권리와 이에 수반하여 필요한 시설과 편의 제공을 내용으로 했다. 일본의 요구사항이 점증하게 된 이면에는 몇 가지 판단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프랑스 식민정부가 인도차이나의 장개석 원조루트를 차단시키겠다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지 않았으며, 일본측 상주소의 파견 인원이 너무 적어 그 근절을 감시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둘째, 영국이 버마루트 차단을 거부한 결과 곤명(昆明) 방면에 대한 항공작전 수행의 근거지를 북부인도차이나에서 찾아야 했다. 장개석 원조루트의 차단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일본은 영국에도 버마를 통과하는 장개석 원조물자 수송 금지를 요구했으나 영국은 이를 거부했다. 셋째, 중경(中京)의 장개석군과의 교전 후에 당시 광서성 남녕(南寧) 서쪽 지역에 있던 제5사단을 속히 상해지역으로 집결시키기 위해서도 북부 인도차이나를 경유지로 삼아야 했다.3) 이러한 일본의 군사적인 요구는 일본외상 마쯔오카(松岡洋右)와 비시정부의 앙리(Henry Martin) 프랑스대사가 1940년 8월 30일에 서명한 ‘마쯔오카-앙리 협정’으로 원칙적으로 수용되었으며, 그 대가로 일본은 프랑스의 식민지 주권과 영토를 확약했다. 협정에 근거하여 9월 22일 일본군 상주소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병력주둔에 관한 현지 세목 사항’에 대해서도 최종 합의를 보았다.4) 그 주요 내용은 일본이 북부 인도차이나 4개 비행장을 사용하고, 6,000며 규모의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으며, 군사를 25,000명까지의 북부를 통과해 중국 운남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9월 22일부터 26일까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북부인도차이나에 주둔했다.5) 22일 밤 일본군 제5사단이 랑선(Lang Son) 부근 국경을 넘어 동당(Dong Dang)에 있는 프랑스군 진지로 진군하기 시작하면서, 협정에 따라 평화적으로 진행됐어야 할 일본군의 주둔과정에서 프랑스군과의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25일 제5사단은 랑선을 포위하고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평화적인 진주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프랑스가 극력 항의하자 일본 천황은 비시와 드꾸(Decoux) 식민행정부에 공식 사과를 전달하고, 책임 사령관을 해임하고 랑선 등 점령지를 프랑스에 즉시 반환케 하여 사태를 수습했다.6) 마무리는 되었지만 이 사건의 전개 과정은 베트남에 중요한 몇 가지 의미들이 담겨있다. 첫째, 제5사단장을 비롯한 남지나방면군 사령관들은 도쿄의 육군참모부 작전처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에 프랑스 식민행정을 그대로 유지시키기보다는 완전히 군사점령을 하거나 중국 왕정위정권과 비슷한 현지인 독립정권을 세우기 위한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믿는 소수파들이었다. 이들이 보기에 일본의 프랑스와의 협력 정책은 유럽 식민통치로부터 아시아인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아시아해방론이나 대동아공영권 구상과도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이들은 또한 베트남이 ‘독립국’이 된다면 일본은 베트남에서 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친베트남 일본인’이라고 볼 수 있는 이들은 프랑스어나 베트남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군대나 관계에서는 중하급의 지위를 가지거나 인도차이나진출기업이나 일본문화센터와 같은 곳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베트남의 독립이라는 면에서 베트남 민족주의자들과 정서적 혹은 실질적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7) 베트남 친일파의 대표자인 끄엉데 왕자가 일본의 베트남 진출 시점을 전후하여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일본인 인사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들 소수파의 ‘이상’은 번번이 좌절되었지만 이들은 베트남친일파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셈이다. 둘째, 문제의 이 제5사단이 전 해부터 베트남인 지원군을 모집하고 훈련시켰다는 점이다. 이들은 끄엉데가 설립한 복국동맹회(Viet Nam Phuc Quoc Dong Minh Hoi) 산하 건국군(일반적으로는 복국군으로 알려져 있음)으로, 제5사단에 참가하여 프랑스 식민 지배를 종결하고자 전투했던 이들이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게 될 이들 시도의 좌절은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이 프랑스와 협력 방침을 굳건히 했음을 의미하며, 일본에 의지해 프랑스와 싸우겠다고 결심한 베트남인이 상당히 모순되고 어려운 입장에 놓였음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제5사단을 문책함과 동시에 일본 군대 내에서 베트남민족주의자들을 보호하고 옹호하는 행동을 금한다는 천황의 명령8)도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일본이 프랑스와 협력을 선택한 이상 베트남을 돕는 행위는 협력파트너인 프랑스를 배신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일본의 협력 관계는 경제부문에서도 긴밀해졌다. 당시 쌀, 고무, 주석을 포함해 콩, 황마, 기름, 석탄, 아연 등 전략물자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확보하는 일은 일본에게 중요한 과제였다. 일본이 프랑스와 협력하게 된 동기 중 하나도 이들 물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있었다. 1940년 5월 ‘일본-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경제협정’이 성립되었다. 협정체결 직후 쌀수출계약량 등이 다 채워지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일본은 이에 대해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드골파 및 인도차이나 화교의 책동 때문이라고 인식하기도 했다.9) 그러나 1941년 5월 관세, 무역, 통화에 대한 협의를 비롯한 포괄적인 경제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과 프랑스의 경제 협력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인도차이나는 최대 무역상대인 프랑스와의 상업관계가 약화되었으며 곧이어 다른 서구 무역 상대국과의 관계도 끊어져 버렸다. 이 틈에서 일본이라는 바이어는 그 공백을 대신했다. 일본도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엠바고로 일시 과잉된 상품을 인도차이나에서 교환할 수 있었으며, 영국과 미국을 대신하여 중요 자원을 인도차이나를 비롯한 동남아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 쌀을 예로 든다면 경제협력의 결과 일본은 370만 톤 가량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갔으며, 약 100만 톤의 쌀을 동남아시아 각지의 일본군대에 공급할 수 있었다.10) 프랑스와 일본의 경제협력이 베트남에 의미하는 바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프랑스 식민당국이 생계용 쌀을 일본에 수출함으로써 1944년 말과 1945년 초에 걸쳐 베트남 중ㆍ북부에서는 200만 명이 아사하게 되었다.11) 베트남을 희생으로 한 프랑스와 일본의 협력이 군사ㆍ경제적 부문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이는 인도차이나 영토의 재조정이라는 사안까지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실지회복을 요구함에 따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태국 간에 국경분쟁이 발생하면서 생겼다. 사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에 장개석 원조루트의 차단을 요구하던 시기를 즈음하여 ‘우호화친조약’과 ‘군사협정’을 체결한 일본과 태국 피분정권과의 관계는 긴밀해져 있었다.12) 1940년 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태국이 국경 전쟁으로 나아가자 일본은 인도차이나 북부의 육군을 강화시키고 사이공 부근에 전함을 파견하여 페땅과 인도차이나 총독 드꾸를 상대로 태국에 일정 영토를 반환하지 않는다면 인도차이나 남부를 점령하겠다는 압력을 가했다. 할 수 없이 드꾸는 1941년 1월 말 정전에 합의했으며, 3월 일본의 강압적인 중재로 1904년에 획득한 라오스의 두 개 지방과 1907년에 취한 캄보디아의 세 개 지방을 태국에 되돌려 주었다.13) 이 사건은 외견상 베트남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태국의 국경분쟁과 해결과정의 이면에는 베트남에 상당한 의미를 갖는 두 개의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인도차이나를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프랑스 식민정부가 베트남인을 전쟁에 동원하면서 생겼다. 징집명령에 반발하여 생긴 저항분위기를 혁명으로 전화시키고자 인도차이나공산당 남부지부가 관여함으로서 1940년 말 유명한 남끼기의가 발발했다. 남끼기의의 탄압을 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일본과 태국에 양보한 프랑스나, 반프랑스 민족해방투쟁을 하고 있다고 믿는 기의 참여자들에게 관심도 지지도 해주지 않는 일본이나 베트남인에게는 같은 종류의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사건은 국경분쟁을 태국에 유리하도록 조정하여 태국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일본이 1941년 4월 독일이 소련을 침략하자 인도차이나 남부에 병력을 주둔시키기로 결정하면서 발생했다. 7월 14일부터 가토(加藤外松) 주프랑스 일본대사는 비시정부의 부원수이자 내무ㆍ외무ㆍ해군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던 다르랑(Francois Darlan)과 협상에 들어갔다. 7월 21일 프랑스 식민당국이 일정 조건14) 하에서 일본의 요구를 수락함으로서 비시에서 7월 29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공동방위에 관한 프랑스-일본 의정서’(Darlan-Kato Accord)가 조인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근거하여 인도차이나 남부로 진주하기 위해 새로이 편성된 제25군은 해남도를 출항하여 7월 25일 인도차이나 남부에 상륙했다. 이는 프랑스와 일본의 군사적 협력이 공동방위라는 형태로 완전해졌음을 의미하며 일본에 의한 동남아시아 점령의 시작을 뜻한다.15) 위에서 보았듯이 1940년 6월에 시작하여 약 1년 만인 1941년 7월에 일단락된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와 일본 제국의 협력과정을 보면 일본의 요구와 이에 대한 프랑스의 양보라는 측면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식민세력으로서의 프랑스의 건재성과 일본의 ‘전능성’을 가정한 위에서 발생하는 착시현상에 불과하다. 일본과의 협력 없이 프랑스 식민세력의 생존은 어려웠으며, 프랑스와의 협력이 일본에게도 가능하고 필요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프랑스와 일본이 협력을 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에 따른 이익을 상론할 필요가 있다. 페탕처럼 나치정권에 ‘협력’하겠다는 공식적인 천명은 없었지만 실제로 군사ㆍ경제 방면에서의 여러 조약과 협정을 통해 프랑스가 일본과 단계적으로 협력 관계를 만들어 나간 배경에는 프랑스 본국과 인도차이나가 처한 불가피한 상황도 존재했지만,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비시의 페땅 정권은 인도차이나가 가진 무력으로는 일본에 저항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시도한다면 일본에 의한 인도차이나의 완전한 합병만을 초래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1940년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육군은 9~10만으로 수적으로 적었으며, 그 중 약 8만 명은 ‘충성이 의심스러운’ 베트남인 병사였고, 약 6,000명은 유럽인 용병으로 전투능력과 의지를 믿을 수 없는 상태이었다. 전함이 한 대도 없는 해군과 전투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 몇 십대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있었을 뿐이었다.16)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식민정부가 행정과 군대를 유지하고 프랑스 민간인도 보호할 수 있는 길은 일본과의 협력밖에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과의 협력은 궁지에 몰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경제 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었다. 1940년 당시 무역의 50% 이상이 식민본국과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무역의존도가 높았던 인도차이나 경제구조는 프랑스의 패전과 환란, 그리고 영국해군의 해상 봉쇄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프랑스는 독일로 하여금 일본의 인도차이나 침입을 저지하고 그 수위를 조정하도록 설득시킬 여지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서 일본과의 협력을 수용했다.17) 비시의 일본과의 협력은 이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로도 해석된다. 이는 비시의 독일과의 협력이 갖는 의미와 같은 선상에 위치한다. 대전 후 세계질서가 나치가 주장하는 유럽신질서, 일본이 주장하는 대동아공영권으로 될 경우, 식민지와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가 더욱 명예스러울 뿐만 아니라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때문에 비시정부는 독일 점령기 동안 국가를 프랑스뿐만 아니라 제국을 포용하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서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강대국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했다.18) 제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로서는 군사ㆍ경제적으로 파정 상태에 있었던 인도차이나를 잃지 않아야 했으며 이 때문에 일본과의 협력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여기에다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와 일본의 협력이 성립되고 유지되는 데 나치독일이 한 역할을 언급해야 한다. 독일은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와 일본 세력이 모두 기대하는 대상이었으며, 프랑스와 일본이 협력하게 되는 각 단계마다 ‘조용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 특히 도조(東條英機)수상으로 대표되는 고위관료와 군관계자는 프랑스 비시정권과의 불화나 독일 나치와 긴장관계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도 인도차이나를 직접 점령하기보다는 프랑스와 협력하는 안을 선호했다. 이외에도 프랑스와의 협력은 인도차이나를 직접 점령함으로서 초래할 비용과 불확실성을 덜어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 덜 호의적인 식민정권이 차지하고 있는 여타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아끼는 효과도 있었다. 일본의 시각에서 본다면 프랑스는 열정적으로 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라 하더라도 인도차이나에서 유용한 행정 청부업자 정도의 역할은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19) 또한 프랑스 식민정부는 인도차이나 내부의 안보, 특히 저항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제어하고 중국과의 국경지대도 책임질 것이었다. 협력을 통해 프랑스와 일본은 위와 같은 자기충족적기대에 못지 않은 실익을 얻었다. 실제로 일본은 군사면에서 기지ㆍ숙영지ㆍ병사(兵舍)를 제공받았으며, 주둔경비를 부담시키고 장개석 원조루트의 차단으로 남겨진 물자를 취득했으며 선박을 징용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ㆍ중국 국경 부근의 중경군ㆍ운남군의 동향을 비롯한 군사정보를 제공받았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전략물자 획득과 함께, 인도차이나의 자원을 조사하고 개발하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프랑스는 국경수비를 일본과 분담함으로서 부담을 줄이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으며, 양국 군대의 협동작전에도 참여하여 군대교류도 활성화시켰다.20) 그러나 무엇보다도 프랑스가 일본과 협력함으로서 얻은 가장 중요한 실익은 인도차이나에서의 주권과 영토 보전, 경제의 보전, 프랑스인의 보호, 내치를 위한 안정 확보 등이었다. 이렇게 안착된 프랑스-일본 제국협력 체제하에서 프랑스와 일본이 인도차이나인, 주요하게는 베트남인을 다루는 방식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와 일본 모두 자신들이 취한 ‘제국의 협력’은 일시적이고 방편적인 선택이며 전황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불안정한 선택임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베트남인과 그 세력을 제거함과 동시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분위기와 세력을 고무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애국주의”와 “노동-가족-조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일본은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와 “대동아공영권”을 선전했으며 베트남인을 협력으로 끌고 올 수 있는 여러 방책과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21) 그러나 이들의 대베트남인 정책은 제국의 협력이라는 대전제를 수용하고 있는 한 절대 필요하지도 적극적일 수도 효과적일 수도 없었다. 베트남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프랑스와 일본은 힘을 합해 베트남인에게 ‘이중의’ 정치ㆍ경제ㆍ사회적 압력을 가하고 있는 형상이었다. 1940년 7월 비시가 인도차이나 총독으로 파견한 드꾸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한 후 11월 인도차이나의 반일조직체를 해산시킨 예는 프랑스의 일본과의 협력이 베트남인에게 의미하는 바를 보여준다. 1941년 말부터 프랑스 식민정부하의 하노이라디오와 사이공라디오가 보르네오, 말라야, 필리핀, 싱가포르, 수마트라, 자바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계속 축하하는 방송을 내보낸 것도 또 다른 예에 속한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일본이 협력했다는 의미는 그 어느 제국국가도 인도차이나에서 전권을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힘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고 보아 두 힘의 틈새를 이용하여 민족해방의 과제를 실현하고자 한 이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선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권력을 제약하면서 세력을 확장 중에 있던 일본에 기대어 프랑스를 내몰 수 있는 기회로 본 이들도 있었다. III. 베트남인 친일협력의 계보: 끄엉데와 복국동맹회 일본의 인도차이나 진입을 전후하여 베트남에서는 친일 요인들과 단체들이 흥기했다. 이들은 일본을 이용하여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극복하고 베트남의 독립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 중심에 놓인 인물과 단체는 끄엉데 왕자(Cuong De, 1885~1951, 일본명 Kazuo Minami, 南一雄)와 복국동맹회이다. 끄엉데는 1937년 중일전쟁을 “동아시아가 커다란 변화”를 시작하는 시점으로 그리고 “동아시아의 피억압민족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러일전쟁 후 진행되었던 동유운동을 인연으로 일본에 머물러왔던 끄엉데는 이 ‘변화의 기회’를 이용하고자 했다. 먼저 그는 남중국에 흩어져 있는 망명베트남인 지사들을 모아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고자 1937년 11월 홍콩을 방문했다.23) 끄엉데가 다시 상해로 오게 된 1939년 2월까지는 별다른 활동이 눈에 띠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시도는 실패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기 끄엉데는 일본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물리치고 독립을 확보하는 데 동의하는 국내외의 여러 인사들과 단체들을 묶여 하나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국외활동가들을 하나로 묶어 베트남의 독립과 혁명의 동력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를 한 이는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1920년대 말 응우옌 아이 꾸옥(Nguyen Ai Quoc, 즉 호치민)이나 1930년대 중반 레 홍 퐁(Le Hong Phong)의 활동도 여기에 중점이 있었다. 이들이 반제와 반봉건 문제를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고자 했던 국외 통일전선이었던 데 반해 끄엉데의 노력은 반불문제를 일본의 도움에 기대어 해결하고자 했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끄엉데는 중국에 있는 망명 지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곧 일본이 남지나해로 진출할 것이고 이는 베트남의 ‘복국’(復國)을 위해 상당히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니, 일본과 손을 잡아 이 기회를 이용해야 한다고 썼다.24) 일본이 상해를 점령하자, 1939년 3월 끄엉데는 상해에서 남중국 활동가들의 회의를 주재했다. 바로 이 회의에서 복국동맹회가 탄생했다. 이는 판 보이 쩌우가 1912년 중국 광주에서 유신회를 개조하여 창립한 베트남광복회를 다시 개조한 것으로, 끄엉데에 따르면 “프랑스 보호정권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 회복을 목적으로 한 국내외 모든 당들을 포괄하는 조직”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25) 끄엉데를 위원장으로 하는 복국동맹회 지도부는 외무 업무, 주로 일본 당국과의 협상과 연락을 맡은 쩐 히 타인(Tran Hy Thanh, Tran Van An, Tran Phuc An), 주로 샴에서의 선전을 책임진 쯔엉 아인 만(Trung Anh Man), 교육과 훈련을 책임진 호 혹 람(Ho Hoc Lam, Ho Ngoc Lam), 재정을 담당한 쩐 흐우 꽁(Tran Huu Cong, Nguyen Thuc Canh, Tran Trong Khac), 중국 내 조직사업을 맡은 호앙 남 흥(Hoang Nam Hung), 그리고 총무 당 흥우옌 훙(Dang Nguyen Hung)으로 구성되었다. 이외에도 부 하이 투(Vu Hai Thu, Nguyen Hai Than), 쩐 쭝 럽(Tran Trung Lap) 그리고 마이 반 통(Mai Van Thong)이 발기대회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26) 이들 면면으로부터 몇 가지 사실과 이 조직의 성격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 베트남 친일의 계보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의 근대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의 유학을 권장하면서 일어났으며, 상호 (식민지) 영토와 주권을 존중한다는 일불협정이 시행되면서 끝난 동유운동(東遊運動, 1905~1909)으로부터 시작되었다.27) 복국동맹회 발기대회에 참석한 10인 중에서 쯔엉 아인 만과 호앙 남 흥, 그리고 자료가 없어 파악하기 어려운 당 흥우옌 훙을 제외한 7인이 동유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쩐 히 타인은 동유운동 당시 9~10살 소년으로 끄엉데를 따라 일본에 갔으며,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본에 머물며 수학한 인물이다. 나머지는 원래 반불투쟁을 위해 일본의 물적지원을 얻고자 시작하여 유학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가, 일본의 베트남유학생 추방으로 맥없이 끝나버린 동유운동 좌절 이후, 중국 각지를 떠돌던 구일본유학생 집단의 일원으로 다시금 복국동맹회의 깃발 아래 모인 것이다. 이들을 끄엉데 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 1905년 판 보이 쩌우(Phan Boi Chau)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일본에 무기ㆍ군대의 원조를 요청했을 때 한 일본 고위관료는 지금은 아니지만 태평양에서 일본이 두 대륙의 제국주의 세력(영국과 미국)을 상대할 수 있는 날 베트남의 독립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1937년 중일전쟁과 그 이후의 일본의 선전 상황은 끄엉데 집단에게 바로 때가 왔음을 표시해 주었는지 모FMS다. 둘째, 끄엉데 집단에 더하여 복국동맹회는 광주에 기반을 둔 호앙 남 흥 집단(베트남중앙집행위원회, Viet Nam Trung Uong Chap Hanh Uy Vien Hoi), 남경에 있던 이전 베트남국민당 당원(베트남국민혁명당, Viet Nam Quoc Dan Cach Mang Dang), 쯔엉 아인 만으로 대표되는 태국집단이 참가했으며 이후 홍콩에 있는 베트남인도 일정 정도 여기에 합류했다.28) 이렇듯 복국동맹회가 해외 망명가 집단을 대거 포섭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군의 남중국 점령, 그리고 반불운동을 위해 이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는 끄엉데의 호소가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대표적으로 호앙 남 흥 집단은 일본이 우세한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친중국(광동, 광서 군벌) 노선을 버리고 친일로 태도를 바꾸었다. 끄엉데의 호소는 중국국민당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을 가지고 있던 구 베트남국민당 당원에게도 설득력을 가졌다. 베트남국민당 당원들은 1930년 옌바이병영 반란사건 이래 국내에서는 급격히 힘을 잃어 대다수가 감옥으로 들어가거나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 마지막 선택을 한 이들이 중국에서 베트남국민당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도자와 지역에 따라 수많은 파당으로 나누어져 있어 응집력은 별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반불 성향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으며 인도차이나공산당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바로 복국동맹회는 반불과, 반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의와 이념 문제를 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입장을 가진 중국과 샴에서의 베트남 민족주의 활동가들이 주축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복국동맹회는 응우옌왕조의 적장자 후손인 끄엉데를 중심에 두고 ‘복국’만을 공동의 목적으로 설정한 일종의 통일전선이었다. 이 통일전선은 민족해방을 ‘유일한’ 목적으로 선언한 베트민(Viet Minh, 베트남독립동맹회)전선과 유사하나, 그 성공의 주축이 끄엉데의 지도력과 일본의 지지에 달려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프랑스, 더 정확하게는 비시프랑스와 협력한다는 일본의 태도(즉 베트남의 민족해방이나 독립을 반대한다는 태도)는 일찍이 1940년 9월 건국군사건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이후 프랑스의 식민 주권과 영토를 확약한다는 조건 아래 여러 이권을 챙기는 과정에서 일본의 선택은 더욱 확실해졌다. 베트남인의 독립 노력을 지지한다거나 돕는 행위를 금지시키고, 혹은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을 피해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처럼 만든다거나, 베트남에 동정적인 태도를 가진 일부 일본인 장교와 군인 그리고 외교관을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낸다거나 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일본정부의 공식 입장과는 다른 태도를 가진 이들이 있기는 했다. 베트남의 완전 군사점령을 주장하거나, 베트남의 독립을 옹호하는 양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도 않았고, 영향력도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약간의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1943년 어느 시점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이 진정으로 베트남인 ‘협력자’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일본의 지지를 받고자 했던 끄엉데와 복국동맹회의 능력과 정치적 위상을 재고시키는 데에도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러한 조건들 때문에 끄엉데와 복국동맹회는 친일집단이기는 하지만 반민족이나 매국이라는 늪을 피해있을 수 있었다. IV. 국내에서의 친일집단의 조직과 활동 성립 이후 복국동맹회는 주로 세 방향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하나는 일본에 저항하는 국내외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친일선전이었다. 둘은 베트남건국군의 구성과 활동이었다. 마지막은 복국동맹회 통일전선의 국내로의 확대를 위한 제반활동이다. 1939년 9월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도 남진팽창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남경에서 왕정위 친일정권이 세워지던 1939년 10월(왕정위 친일정권의 공식 성립은 1940년 3월) 일본 당국과 타이완 총독부는 끄엉데에게 베트남어 방송팀을 조직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대다수의 복국동맹회 지도간부들이 타이페이로 향했으며, 본부도 동경에서 타이페이로 옮겨졌다.29) 매일 10시에 시작된 베트남어 방송을 통해 대동아공영권을 비롯한 일본의 대동남아시아 정책을 선전하고 독일과 일본의 선전상황을 전함으로서 일본에 호의적인 특히 인도차이나 점령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고자 했다. 때문에 끄엉데와 복국동맹회는 일본을 위한 전쟁선전의 도구가 되었으며 일본의 침략전쟁에 직접 참가함으로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30) 그러나 복국동맹회의 베트남어 방송 참가는 일본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끄엉데의 말대로 “베트남 국내에 있는 항일의 공기를 흐리게 해야만” 복국동맹회가 국내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31) 뿐만 아니라 일본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도 필요한 행동이었다. 타이페이에서의 방송 참여는 예정되어 있는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진공 시에 베트남인으로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한 포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어 방송팀의 중요성은 일본-프랑스와의 협력이 견고해지고 친동맹국, 친일 소식을 직접 식민당국을 통해 전할 수 있게 되면서 줄어든 것 같다. 총감독을 맡았던 끄엉데와 복국동맹회 본부는 1941년 5월 이 일에서 철수하고 도쿄로 다시 돌아갔다. 1940년 8월 광동에 있던 일본군이 베트남 북부로의 진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복국동맹회는 광주지역에서의 활동을 강화했다. 8월 12일 끄엉데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남지나방면군에 복무한 바 있던 쩐 히 타인을 파견해 일본군대와 교섭하도록 했다. 그 결과 일본군의 도움으로 쩐 쭝 럽과 호앙 르엉이 지휘하는 건국군(Kien Quoc Quan)이 조직되었다.32) 이는 베트남당사가 자랑하는 박선기의 직후 베트민의 첫 무장군대인 구국군이 조직되기 이전이다. 9월 22일 일본군 제5사단이 동당과 랑선의 프랑스 진지를 공격하던 날 이 사단과 함께 건국군은 국경을 넘었다. 건국군은 프랑스군이 퇴패하고 관리들이 달아나자 복국동맹회와 끄엉데의 이름으로 민중에게 정권을 장악하도록 호소하고 프랑스군대 소속 베트남인병사들에게 동참을 촉구했다. 동당 함락 하루 만에 그 수가 약 550명이 되었으며, 랑선이 함락되자 1,500명으로 늘어난 건국군은 9월 말 일본군이 포로를 풀어주고 프랑스군으로부터 몰수한 무기를 지급한 뒤 랑선에서 남진을 시작한 시점에는 거의 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진군 범위가 넓어질수록 건국군의 활동범위도 확대되었으며 각지에 복국동맹회의 임시정부도 세워졌다. 때로는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 밖에까지 영향력을 미쳐 하노이 근교에도 다다랐다고 한다.33) 뿐만 아니라 ‘동당-랑선기의’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간여하게 되는 9~10월의 박선기의와 10~12월의 남끼기의를 비롯하여 도르엉 병사반란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0월 말 제5사단은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라는 명을 받았으며, 프랑스 식민군대가 다시 들어오게 되자, 쩐 히 타인은 두 건국군 장수에게 중국으로 철수하도록 권고했다. 호앙 르엉은 이에 따랐으나, 쩐 쭝 럽은 계속 싸우다 룩빈(Loc Binh)에서 프랑스 식민군대에 잡혀 12월 26일 처형을 당함으로서 건국군의 에피소드는 끝났다.34) 호앙 남 흥의 기억에 따르면 3,000에 이르는 건국군은 일본군의 철수 이후에도 프랑스에 대한 저항전쟁을 그만두지 않고, 쩐 쭝 럽, 호앙 르엉 그리고 농 꾸옥 롱(Nong Quoc Long)이 이끄는 세 부대로 나뉘어 광서로 퇴각하면서 계속 프랑스군과 싸웠다고 한다. 호앙 르엉을 비롯해 중국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던 600여 명의 건국군은 광서에 들어서자마자 친일세력으로 간주되어 중국 당국에 의해 무장해제 되었다. 결국 이들은 친국민당 베트남 조직 혹은 베트민에 부속된 조직으로 흩어져 들어갔다.35) 어느 정도가 친중 진영으로 혹은 친베트민 조직으로 편입되었는지, 그리고 일본군에 잔류한 건국군의 숫자는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일본의 배신과 건국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복국동맹회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하노이의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것처럼 이러한 상황조차도 ‘친일매국노들’을 각오치 못하게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보기에 ‘복국’의 희망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는 단시일 내에 일본군 앞에서 무너지는 프랑스 식민군대를 보면서, 혹은 일본군을 환영하는 군중을 보면서, 혹은 일본의 ‘이상주의자’라고 표현되는 군인과 관료들로부터 받은 격려에 힘입어 고무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베트남 학자가 지적했듯이 일본의 건국군 방기와 2차세계대전기 프랑스와의 이기적인 협력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활동가들이 끄엉데의 복국동맹회에 가입한 이유는 나라를 빠져나갈 수도 없었으며, 프랑스 경찰에 �기고 있었고, 경제 압력 등으로 좌절한 이들이 보호와 쌀을 대가로 일본에 서비스를 제공했던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36) 어찌되었든 일본이 프랑스와의 협력관계를 공고히 한 초기에는 끄엉데와 복국동맹회 활동을 비롯한 친일집단의 조직과 활동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1943년을 기점으로 이들 단체의 움직임이 활발해졌으며, 활동무대도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국외나 국경지대가 아니라 베트남 국내에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국내에서 친일 집단들을 모으고 통일시키는 노력과 과정을 지역별로 기술하고, 이러한 변화가 왜 1943년을 기점으로 집중적으로 일어나게 되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랑선기의 이후 일본 헌병대의 보호를 받아 남부로 온 쩐 히 타인은 쩐 반 언(Tran Van An)과 함께 프랑스 식민정권에 불만을 품거나, 친일 성향이 있는 조직이나 분자들과 접촉하여 복국동맹회의 남부지부를 세웠다. 이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베트남의 여러 정치사회 단체들과 친일 개인들을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을 필요를 느끼고 있었던 일본의 요구와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쩐 히 타인은 끄엉데가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라고 선전하며 쩐 꽝 빈이 이끄는 까오다이교의 떠이선파와도 접촉하여 복국동맹회의 대오에 참가시켰다.37) 끄엉데가 “변화의 기회”를 주장하며 중국 남부에서 복국동맹회를 조직했던 즈음 베트남 남부에서는 다양한 여러 신비주의자 무당 영매가 공개적으로 프랑스 식민 지배의 종말과 베트남 독립에 대한 일본의 지지, 베트남의 재생과 번영을 예견했었다. 1938년부터 까오다이교 떠이닌파의 교황인 팜 꽁 딱은 전쟁 발발, 일본의 진입, 끄엉데 왕자의 귀국, 그리고 베트남의 독립에 대한 일본의 도움을 예언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38) 일본과 협력을 시작한 식민당국은 예견되는 일본의 인도차이나 진입이라는 상황을 이용하고 있었던 팜 꽁 딱을 비롯한 까오다이교 지도자들을 1940년 9월 체포하고 그 사원을 폐쇄했다. 이제 어떤 잠재적인 저항의 축도 묵인하기를 꺼렸던 프랑스 식민당국은 개혁불교 운동인 호아하오도 ‘종교 민족주의’(sacred nationalism)에 가깝다고 단정하고 그 지도자 후인 푸 소를 정신병원에 감금했다.39) 일본은 프랑스의 탄압에 직면한 남부 종교 지도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면서 이들을 ‘보호’했다. 그에 대한 대가로 특히 까오다이교의 경우 이들로부터 정기적인 첨보 정보 보고와 수천의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유배된 팜 꽁 딱을 이어 까오다이교도를 지도한 쩐 꽝 빈은 이 기회를 이용해 일본으로부터 군사훈련과 무기 제공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일본 헌병대의 보호 아래, 신도들을 재조직하고 “향후 봉기에 쓸 무기를 구입하기 위한” 기금마련 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지만 다수의 까오다이 교도들은 1942년에는 거의 모두 반불・친일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프랑스에 실망하고 공산주의도 해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까오다이 교리와 끄엉데라는 독립될 국가의 표상, 그리고 일본의 베트남 지지를 믿었던 듯하다. 이러다 결국 1943년 떠이닌파는 다른 까오다이 파벌들, 호아하오 종자들, 그리고 잘 알려진 정치 인물들과 함께 복국동맹회 산하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40) 이제 쩐 히 타인에게로 관심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동유운동 시 일본에 건너가 교육을 받았으며, 복국동맹회의 창당, 건국군의 구성, 랑선 진공의 선두에 서 있었다. 또한 그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으며, 국내 친일 집단을 규합했다. 때문에 끄엉데가 친일세력이 규합하는 중심점이고 복국동맹회를 이끈 명목상의 지도자였다면, 쩐 히 타인은 일본의 신임과 개인 지략을 기반으로 베트남의 친일세력을 움직인 실제 지도자이었다고 평가된다. 쩐 히 타인에게는 장래 독립국의 정통성 있는 왕으로서는 흠집이 없을지 몰라도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는 끄엉데의 명령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국내에는 자신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까닭에 끄엉데의 이름을 사용하여 활동기반을 넓혔다. 끄엉데의 이름으로 대월(Dai Viet)당을 만들고, 국내에 저명한 인사들 특히 북부의 쩐 쫑 낌(Tran Trong Kim), 드엉 바 짝(Duong Ba Trac), 중부의 응오 딘 지엠, 응우옌 짝(Nguyen Tranc) 그리고 남부의 응우옌 반 쌈(Nguyen Van Sam) 등에게 편지를 보내 동참을 요청한 이도 쩐 히 타인이었다.41) 북부에서는 대월국사당(Dai Viet Quoc xa Dang), 대월국민당(Dai Viet Quoc dan Dang), 베트남애국단(Viet Nam Ai quoc Doan)을 비롯해 1942년 말을 즈음하여 상당히 많은 친일 집단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 딘 지(Vu Kinh Dy)가 이끄는 베트남애국단의 친일성향은 현저했다. 부 딘 지는 저널리스트로 특히 중일전쟁이나 중국에서의 자치정부 논의가 벌어지기 이전인 1936년에 박끼(베트남 북부)에 동방자치당(Dong phuong Tu tri Dang)을 조직했으며, 일본의 동아시아담론(Chuyet Lien A)을 선전했었다.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자 그는 1941년 자신의 조직을 베트남애국단으로 재조직했다. 자치와 아시아주의를 내건 이 친일조직이 어느 정도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친일ㆍ반불성향으로 인해 프랑스 식민정권의 탄압을 받자, 일본군대는 그를 처음에는 해남도 주재 일본군대에 나중에는 사이공주재 일본군영에 머물게 했다는 점이다. 그는 1943년 초 도쿄에서 끄엉데를 만난 자리를 빌어 베트남애국단을 복국동맹회에 가입시켰다. 부 딘 지는 “특히 재정을 확보하는 재주가 있어” 끄엉데는 복국동맹회 본부의 재정을 담당하도록 했다고 한다.42) 북부에서는 여러 친일 집단의 대표들이 모여 1943년 말 혹은 1944년 초 대월국가연맹회(Dai viet quoc Gia Lien Minh Hoi)라는 통일된 조직을 만들었다고 하나 그 실제 조직이나 인원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대중에 기반 한 조직은 아니었던 듯하다. 부 딘 지와 베트남애국단이 이 조직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중끼에서 대표적인 친일인사는 응오 딘 지엠(Ngo Dinh Diem)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이 들어오기 전 프랑스 식민치하 베트남 중부의 꽝남(Quang Nam) 군수(tong doc)이었던 지엠은 1942년 여러 반프랑스 음모 사건에 연루되기 시작했으며, 1943년에는 대월부흥회(Dai Viet Phuc Hung Hoi)로 알려진 비밀 정당을 조직했다. 이 당은 지엠의 고향인 중부 베트남을 주요 무대로 했으며, 그 당원은 거의 전적으로 그와 같은 카톨릭교도이었다.43) 중부의 카톨릭교도를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규합한 지엠은 그해 중반 판 툭 응오(Phan Thuc Ngo)를 도쿄로 보내 끄엉데와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국내에서의 활동에 관해 조언과 지시를 해 주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일본에 기대어 프랑스를 치고, 바오다이를 대신해 끄엉데를 장래 독립국의 국왕으로 지지하는 것을 의미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지엠이 복국동맹회에 정식으로 가입했는지도 분명치 않다. 1944년 6월과 7월, 프랑스는 지엠의 대월부흥회를 적발해, 그의 종자 대다수를 체포하고, 지엠을 잡아가둘 방법을 찾았다. 이를 감지한 일본정보기관은 1944년 7월 말 지엠을 후에에서 빼내 사이공의 일본군 병영에 1945년 3월 9일까지 숨겨주었다. 1944년 말 일본이 프랑스와의 협력관계를 마무리하고 베트남에 현지인 정부를 구성해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고 느끼자 일부 일본인 정치가들과 관리들은 끄엉데와 지엠을 주축으로 하는 독립정부안을 제출하기도 했다.44)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베트남 북ㆍ중ㆍ남부에서 여러 친일 요인과 집단들이 끄엉데와 복국동맹회를 중심으로 결집하게 된 현상은 두 가지 힘이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한 힘은 위에서 보아왔듯이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식민세력의 약화 그리고 일본세력의 등장이라는 상황에서 생긴 복국에 대한 희망이었다. 또 다른 힘은 일본-프랑스 제국협력이 가지고 있는 불안정성과 이를 인식한 일본이 끄엉데를 주축으로 한 베트남 친일 집단의 통일을 고무한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친일요인과 집단의 조지기화가 활발해진 1943년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이 점이 확실해진다. 일본이 협력의 상대로 프랑스 식민당국을 선택했을 때조차도 복국동맹회를 지지한 베트남인들은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와 대동아주의 선전하고 “우리군주”(minh chu) 끄엉데가 돌아올 날을 꿈꿨다. 이는 1943년에 적극화된 일본의 움직임, 즉 베트남인 ‘친구들’에게 우호적인 정치 변화를 강행할 것처럼 보이는 제스처가 있었기에 근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끄엉데의 품위를 올려주기 시작했으며 베트남 내부에서 복국동맹회를 강화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1943년 2월 일본의 신임이 두터운 베트남애국당 창당자이자 복국동맹회 지도자이었던 부 딘 지가 끄엉데 하의 일종의 초기 정부인 건국위원회(Uy Ban Kien Quoc)를 조직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끄엉데를 만나 명명정부의 구성에 대해 논의했다.45) 1943년 7월 영향력 있는 일본인 마쯔이(松井石根) 장군은 사이공에서 끄엉데는 자신의 친구라고 선언하고, “프랑스 정부는 인도차이나에서 평화적으로 떠나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이 하려고 하는 결정이 어떤 것인지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은 대부분의 베트남 지지자들중 끄엉데 하에서, 그리고 응오 딘 지엠을 수상으로 하는 ‘독립’ 베트남을 경영하는 데에 쓰일 수 있는 이들을 정렬시키고 있는 듯 보였다.46) 1943년 프랑스에 대한 일본의 행동 개시가 임박했다는, 즉 일본이 프랑스와의 협력관계를 끝내려 한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펴져나갔다. 이러한 소문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 이 시점에 일본은 프랑스와의 협력관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일본과 프랑스의 협력관계는 기본적으로 2차대전의 전황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1943년부터 전황이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프랑스식민당국의 협력은 소극적이고 마지못한 것이 되어 갔다. 이렇듯 프랑스의 협력이 효율성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유럽인의 손아귀에서 베트남인을 해방시켜주어야 한다는 명분이 다시 힘을 얻으면서 베트남에서 친일단체와 지도자들의 활동이 눈에 띠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43년 3월 인도차이나에 있던 일단의 프랑스 군인이 모르당(Eugene Mordant)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일본에 저항하기로 결정했으며 드골정부와 계속 접촉하면서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10월에는 드꾸 또한 비밀리에 드골과 선을 대기 시작했다. 일본군도 이제까지 협력 파트너이었던 프랑스 식민행정부를 넘어뜨리는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1944년 말에 구상을 끝냈으며 1945년 3월이 가서야 실행되었다.47) 쿠데타를 통해 프랑스 식민정권과의 협력관계를 청산한 일본은 베트남에 ‘독립’을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이 일본표 베트남독립국에는 끄엉 데는 물론 복국동맹회 소속 친일협력인 그 누구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일본은 베트남에서 안정과 질서의 유지를 최우선으로 한 선택을 한 까닭에 프랑스 식민지배 하에서 협력한 바오 다이를 그대로 ‘독립국’의 수장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반불독립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주도적이고 자발적으로 친일협력을 했던 세력들은 사실상 베트남 정계에서 무장해제되었다. V. 맺음말 이 논문에서는 베트남 친일협력세력의 형성을 주로 맥락과 사건을 통해 설명했으며, 형성뿐만 아니라 발전과 소멸에 이르는 전과정 속에서 다루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베트남의 친일세력이 가진 협력의 동기나 논리, 그리고 개인적 혹은 사회ㆍ정치적 배경이 반불, 일본의 지원 기대, 그리고 끄엉데와의 개인적ㆍ정치적 관계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으며 일본점령기간이 단기였던 데다가 프랑스와의 협력이라는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 특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베트남에서 친일협력세력은 만들어진 것이며 이에는 환경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구체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또 하나의 과제를 부가한다. 즉 베트남 친일협력 세력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본문에서 논한 끄엉데를 비롯하여 친일베트남인 그리고 이들의 단체들은 일본의 힘을 빌리려고 했으며, 자의적이든 부득이하든 일본의 전쟁 노력에 협력했다는 의미에서 친일행위를 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뒤에 붙은 ‘애국구국’이니 ‘민족주의자’니 ‘매국월간’이니 하는 다양한 평가는 사실상 친일이 어떤 관계의 총합으로서 논의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관계를 규정짓는 요소는 국가, 혁명 그리고 민족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다. 끄엉데는 물론 복국동맹회, 건국군, 그리고 복국동맹회 전선 안에 포함되었던 단체나 개인은 모두 ‘복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과 해방을 친일의 목적으로 인식했다는 의미에서 매국과는 관계가 없었다. 혁명과의 관계는 이 보다 약간 더 복잡하다. 본 연구는 복국동맹회를 일종의 통일전선으로 간주했는데, 이 복국동맹회는 1941년 9월 성립된 인도차이나공산당 중심의 베트민 전선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었다(인도차이나공산당은 이미 1940년 11월 7차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복국동맹회를 일본의 ‘꼭두각시’라고 규정지었다). 특히 이들 전선은 친일과 항일로 극명하게 갈리면서 대립각을 세우며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독립 후의 정통성을 구축한 후자가 보기에 전자는 구체제의 회복을 그것도 군국주의 일본의 힘을 빌려 가져오려고 하는 반혁명 분자로 분명 혁명에 위해를 끼치는 요소였다. 복국동맹회의 입장에서 보면 끄엉데라는 군주는 베트남인을 통합시킬 수 있는 최대공약수이었다. 즉 끄엉데는 공산주의 이념을 거부했던 여러 종류의 ‘애국주의자들’ 혹은 ‘민족주의자들’이 상징적으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실체였다. 때문에 친일의 대열에 이들이 대거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자를 제외하면 당시 동아시아 반식민・식민 국가에서의 ‘민족주의’의 빈곤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하다. 민족구성원과의 관계는 더욱 더 복잡하다. 이용할 수 있는 자료를 통해서는 베트남 인민이 당시 일본이 주는 희망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는지 거듭되는 배신과 인적ㆍ물적 수탈을 강행한 일본의 실체에 어느 정도 환멸을 느꼈는지 알 수 없다. 건국군의 봉기 이래 1940~1941년을 장식했던 네 개의 기의 발발을 통해 보건데 일본군의 베트남 점령은 단지 소수의 친일협력인에게만 기대의 근원이 되지는 않은 것 같다. 베트민이 주장했던 것처럼 베트남 인민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거국적으로 베트남을 방어하는 운동을 했던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다수의 의견이나 원망이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민족구성원을 배신했다는 판단은 이들 다수의 의사와 이익을 무시하거나 곡해했다는 사실이 입증된 이후에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친일 세력이 이들 세 요소들과 갖는 관계의 총합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끄엉데와 복국동맹회를 보는 시각은 달라졌으며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다. 일본이 프랑스와의 ‘제국의 협력’을 선택함으로서 일본은 베트남인을 자신의 명분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오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1945년 일본은 프랑스를 내몰고 토착 ‘독립정권’을 인정한 시점에서도 이제까지 변함없이 일본을 후원자로 생각한 친일협력인을 뒤로 하고 프랑스 식민 통치 하에서 복무했던 바오 다이와 보수 역사학자 쩐 쫑 낌을 내세움으로써, 베트남인을 자신의 명분으로 끌어오지 않았다. 이를 끄엉데와 복국동맹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극악한 친일매국노가 될 상황에서 구제됨을 의미한다. 친일청산운동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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