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12월 구로항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돌속에 갇힌 말]...
이 영화를 감독한 동기 아줌마 지금은 뭐하는지???
진압 당시에 있어서 옥상에서 싸움이 거의 마무리될 때, 해가 떠올랐을 때를 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건물 위로 어둠을 뚫고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떠오르는 태양이 우리를 비출 때 어느 학생이 '야 저것을 봐라, 우리는 이제 이겼다. 승리했다'고 외쳤습니다. 모두 다 싸우던 손을 멈추고 그 태양을 바라보았습니다. 나에게는 온몸을 불사르고 도시의 어둠을 가르는, 저멀리 저편에서 떠오르는 태양, 그것은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모두 다 그 태양을 바라보는 눈에 눈물이 흐름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것은 최루탄에 맞아서 나는 눈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학생 하나가 애국가를 선창했습니다. 최루탄이 계속 터지는 속에서도 모두 다 싸움을 멈추고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애국가!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 아닙니까? 그들이 그렇게 싸운 것은 사회의 혼란을 위해서 싸운것이 아니라 이땅의 정의, 또 이 사외의 불신을 없애기 위해 피터지게 싸운 것입니다."
-당시 대책위원 가운데 일인인 윤덕규씨의 최후진술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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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김철관 |
지난 87년 12월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농성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돌 속에 갇힌 말- 87년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농성사건>(이하 돌 속에 갇힌 말)을 제작한 나루(38) 감독의 첫 마디다.
지난 87년 12월 16일부터 18일까지 2박3일간 일어났던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농성 사건. 시민과 학생들의 항의 농성 중 공권력이 투입된 사건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다큐멘터리 영화 <돌 속에 갇힌 말>(70분).
이 영화는 2005년 제1회 안양변방영화축제(5월 22일)에서 서울, 부산, 대전, 원주, 광주 등 대도시 시민사회단체들의 '특별전'에 초청돼 각광을 받기도 했다. 또 6월 6일까지 열리는 인디포럼영화제에서도 많은 관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6월 2일 상영).
또 지난 2004년 수원인권영화제와 10월 30일 서울선재아트센터에서 열린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또 지난 2005년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와 인권영화제에 출품 공모를 통해서 심사위원들로부터 선정돼 상영되기도 했다.
지난 87년 6월 민중항쟁의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 등의 내용을 담은 6·29 선언이 있었고 이후 12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당시 투표를 앞두고 구로구청에서는 부정투표함 밀반출 시도가 있었고 이에 대한 항의농성이 벌어진다. 나루씨는 대학생(87학번, 대학 1학년) 신분으로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하다 그곳에 합류해 현장을 생생히 목격했다.
"16일 오전 11시경 '부정투표함'이 구로구청 현관 앞에서 반출되고 있다'고 어느 아주머니의 제보가 왔어요. 당시 여의도 평민당사로 여러 차례 전화 제보가 왔다고 합니다. 당시 평민당원이던 박영환씨와 수명이 구로구청으로 달려갔지요. 이미 다른 두 대가 도주한 상태에서 봉고 트럭(서울 7다 7870)을 발견해 시민과 공정선거감시단원 등 40~50여명이 합세, 부정투표함 반출을 저지하면서 사건이 시작됐습니다. 구청 앞에서 줄을 지어 투표 차례를 기다리던 주민들도 자발적으로 시위에 합세했지요."
당시 구로구청 3층 사무실에서 투표 위조 여부를 조사했던 시민, 학생들에 의해 투표함 1개, 투표 용지 1506개, 붓두껍 60개, 인주 70개, 손장갑 6켤레가 발견된다. 이 사실을 알려지자 항의 시위대는 계속 늘어 갔고 여론 확산을 막기 위해 군사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군사독재 정권이 부정투표함 항의농성에 대해 최루탄, 지랄탄, 백골단 등을 앞세워 폭력적이고 무자비하게 진압했어요. 인권을 무차별적으로 유린했지요. 그런데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문, 방송 등 미디어에서는 사실 그 자체를 조명하지 않고 있고 '돌 속에 묻힌 말'들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영상을 통해 인권 탄압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알려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루 감독이 17년 전에 쓴 일기장에는 이 사건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일기장에 "후에 이 사건을 영상으로 반드시 남기겠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 농성 사건이 있은 직후부터 94년까지 구로 지역에 대한 심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2호선 구로구청역(현재 대림역)에 내리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그 사건이 뇌리에 스쳐 오랫동안 후유증으로 남았어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경찰만 보면 무척 놀랐고 창문이 없는 공간을 못 들어갔어요. 낯선 공간에 오면 비상구부터 찾게 됐어요. 구로라는 지역 자체에 대한 후유증인 셈이지요."
이것이 영화를 만들게 된 개인적인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사건 당시 공권력의 인권 유린에 대해 알리고 싶다는 의지도 이 영화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경찰과 백골단이 시위대를 에워싸고 집단적 폭력을 행사했어요. 울분이 치밀었어요. 그 사건을 방송이나 신문이 보도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알리지 않았지요. 지금도 잘 알려지지 않았구요. 다큐멘터리를 통해 정확한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나루 감독은 17년 전 일기장에 적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는 99년 12월부터 2004년 9월까지 5년간에 걸쳐 촬영을 했다. 이 기간 동안 백방의 노력으로 자료를 수집했고 6mm 캠코더를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관련자를 인터뷰했다.
"당시 뿔뿔이 흩어져 있는 관련자를 만나기 위해 전국을 돌아 다녔습니다. 기차와 고속버스, 마을버스를 번갈아 타며 오지까지도 찾아가 사람들을 만났지요."
우여곡절도 많았다.
"당시 보도됐던 뉴스를 방송국에서 개별적으로 돈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방송국에서 촬영해 놓고 방송하지 않았던 부분을 구하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당시 서울대생인 이상빈씨가 그 현장을 촬영했는데 막상 그를 만나 보니 촬영한 테이프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노력 끝에 80년부터 독립영화를 제작해 온 '서울영상집단'에서 그 테이프를 구할 수 있었지요."
87년 12월 한달 동안 방송국에서 보도한 분량만 테이프 40개를 샀다. 나루 감독이 촬영한 테이프만 170개가 넘는다.
"작업 과정에서 20살 때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당시 무서운 현장의 생생한 기억들이 일기장에 잘 표현되어 있더군요. 글보다 영상으로 표현해야 사람들이 구체적이고 더 직접적으로 와 닿기 때문에 영화를 촬영하게 됐지요. 일기장도 많은 참고가 됐어요."
그는 영화 촬영을 하면서 제작비가 없어 프리랜서 방송작가(2002년까지)로 일하면서 신문, 잡지, 인터넷에 글을 기고해 원고료로 제작비를 마련해야 했다. 심지어 반전단체나 결혼식까지 찾아다니며 비디오 촬영을 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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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돌 속에 갇힌 말>의 제작 일지를 인터넷 커뮤니티(www.freechal.com/87goolo)에 구체적으로 기술해 놓았다.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 <돌 속에 갇힌 말>에서 구성과 편집은 혼자서 소화했지만 촬영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분들의 이름은 영화 엔딩 타이틀에 밝혀 놓았다. 영어자막 작업을 해서 외국 영화제에도 출품할 거라고 밝힌 그는 앞으로는 여성 인권을 주제로 한 영화를 구상 중이라고 했다.
< 나루 감독 >
제13대 선거를 앞두고 터진 KAL기 폭파 사건. 폭파범인 김현희의 정체를 비롯해 너무나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국민들의 불안한 심리를 부추겼고, 전두환 정권의 적자에 불과한 노태우 후보의 지지율을 높여주었다. 노태우와 김영삼, 김대중의 치열한 경쟁에서 애초에 김영삼이 앞질러 나가고 있었지만, 영남지역의 보수표가 김영삼에서 노태우로 옮아가면서 선거 판세는 바뀌고 말았다.
노태우의 당선. 4.19가 그랬듯 6월항쟁은 또다시 미완의 혁명으로 남았다. 그런데, 과연 노태우는 민주 선거로 당선되었는가? 13대 대선은 이전의 대선과는 달리 최초로 민주적이고 투명하며 공정하게 치러진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민주세력이 패배한 원인은 양김의 분열일 뿐, 투·개표 과정의 공작이 자행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가. 우리는 어떤 특정한 기억을 모르거나 묻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민주화의 부푼 꿈을 안고 개표방송을 유심히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이상한 사실을 발견한다. 김대중 후보의 표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줄어드는 현상이 목격되었다. 독재는 타도되지 않았고, 타도되지 않을 수 있다! 순식간에 위기의식이 번져 나간다. 오전 11시경. 여의도 평화민주당사(김대중 후보의 당)로 제보전화가 들어온다. ‘부정투표함’이 구로구청 현관 앞에서 반출되고 있다’는 어느 아주머니의 제보였다. 제보는 하나가 아니었다. 계속해서 평민당사로 전화 제보가 빗발쳤고, 박영환 씨를 비롯한 평민당원들은 구로구청으로 달려갔다.
서울 73다 7870 봉고트럭. 이미 두 대는 도주했고, 시민과 공정선거감시단원 등 50여명이 부정투표함 막아섰다. 그러자 구청 앞에서 투표할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섰던 사람들도 함께했다. 시민들은 구로구청 3층 사무실에서 투표위조 여부를 조사하다가 투표함 1개, 투표용지 1506개, 붓두껍 60개, 인주 70개, 손장갑 6켤레가 발견했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부정선거. 항의 시위대는 계속해서 불어났고 급기야 군사정권은 공권력을 투입했다.
<돌 속에 갇힌 말>의 나루 감독은 당시 대학교 1학년으로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하다 현장에 있었다. 부상(혹은 사망)까지 낳은 무차별적 공권력 진압을 겪으면서 그는 일기장에 “이 사건을 반드시 영상으로 남기겠다”고 기록했다. 1994년까지 구로구청 지하철역에도 내리지 못할 만치 후유증은 엄청났다.
그후 17년동안 미디어에서 사건을 조명하지 않자 그는 손수 영화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제목은 <돌 속에 갇힌 말>.
나루 감독은 1999년 12월부터 2004년 9월까지 5년동안 6mm 캠코더를 들고 촬영을 하면서 온갖 자료들을 수집했다. 그러다 발견된 것이 서울대생인 이상빈 씨가 촬영한 영상을 1980년부터 독립영화를 제작한 ‘서울영상집단’을 통해 구하면서 <돌 속에 갇힌 말>의 자료화면을 구성하게 된다. 이 작업을 위해 그 외에도 40여개의 방송보도 테잎을 구입했고, 170개의 촬영테잎을 썼다.
사실 <돌 속에 갇힌 말>로 데뷔한 나루 감독은 늦깎이로 영화에 입문한 셈이다. 그는 원래 프리랜서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었고, 여러 미디어에 기고를 하는 자유기고가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한겨레문화센터 VJ 과정 등을 거치며 영화학습을 한 끝에 예전에 받은 원고료들을 털어가면서 영화를 제작했다. 김동원 감독이 소속된 ‘푸른 영상’처럼 부업으로 결혼식 비디오 촬영일까지 했다. 여느 다큐멘터리처럼 극장에서 흥행을 몰이하지는 않았으니 이 영화에 대한 영화계와 매니아의 관심은 각별했다.
<돌 속에 갇힌 말>은 2004년 수원인권영화제와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상영된 데 이어, 2005년 제1회 안양변방영화축제(5월 22일)에서 서울, 부산, 원주, 광주 등의 시민사회단체들의 '특별전'에 초청되어 성황리에 상영되었다. 인디포럼영화제,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등에서도 잇따라 공개되었다.
그런가 하면 2005년 6월에는 방송 직전까지 갔다 무산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KBS '독립영화관'측은 <돌 속에 갇힌 말>을 6월 9일자로 방영하기로 하고 홍보까지 들어갔지만, 방영예정일 오전 나루 감독에게 취소하겠다고 알려 오면서 홈페이지에 "축구방송 관계로 방송을 쉰다"고 공지했다. 구로구청에서 나온 투표함처럼 수상한 행동이었다. 거듭되는 항의에 방송사측은 "해당 작품에 대해 서울시 선관위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명예훼손 및 방송금지가처분 등이 예상되어 방용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선관위에서는 "부정투표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문제가 된 투표함은 부정투표함이 아니고, 사무실이 협소하여 이를 개표장으로 옮겼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관해 유력한 증거로 든 것은 공정히 진행되었을 리 없는 1989년의 대법원 재판을 받은 판례였다. 선관위의 주장은 해당 사건 당일 선관위의 변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영화에서는 당시 구로구청의 농성을 지휘하던 김희선 씨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현재 여당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의 진실은 투표함에 갇힌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 과거사청산 작업이 진행되고, 장준하 최종길 선생의 죽음이 규명되기 시작하고, 인혁당사건, 동백림사건 등 정보기관의 조작사건들의 전모가 파헤쳐졌다. 그럼에도 13대 대선의 부정을 증명할 수도 있는 구로구청사건은 좀처럼 규명되지 않는다. 공권력의 진압으로 휠체어에 앉게 된 김병오 씨는 민주화운동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의 규명이다.
13대 대선 당일에 일어난 구로구청사건은 선거 전에 터진 KAL기폭파사건과 함께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이 일들이 일제시대나 박정희시대 벌어진 사건들이 조명되는 과정에서도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것은 너무 가까운 역사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 진실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오늘날 살아 숨쉬고 있다는 이야기일까. 시위대가 증거보존을 위해 그대로 놔둔 투표함은,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은 채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1987년의 그 열정과 분노 역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이제 ‘안에 든 것’을 꺼낼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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