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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되는 박정희, '찢어지는' 박정희.

순수한 남자 2008. 4. 5. 23:41
'영구' 되는 박정희, '찢어지는' 박정희.
번호 73883  글쓴이 내과의사   조회 3128  누리 888 (898/10)  등록일 2008-4-5 14:41 대문 57 추천


'영구'되는 박정희  

한나라당의 입장에서 보면, 지난 대선의 포지티브 마케팅은 '박정희 우상 팔아먹기'였다. (물론 그들의 주공은 멀쩡한 국정과 경제를 파탄났다고 구라치는 네가티브 공세였지만.) 당내 경선에서 맞붙은 이명박과 박근혜는 앞다투어 자신이 박정희의 신내림을 받았다고 우겼다. 이명박이 선그라스 낀 모습은 박정희 초상을 카피한 흔적이 역렸했고, 경제 살리기라는 간판도 유신제국의 유일한 업적이라는 고속 경제성장기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이템에 불과했다. 

반면 박근혜는 유전적 정통성으로 박정희 영혼의 빙의를 받은 자는 다름 아닌 자기라고 우겼다. 결과는 이명박의 승리였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박근혜의 승리라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불공정한 룰의 적용으로 박근혜가 졌다는 거다. 만약 박근혜가 남자였다면, 혹은 박지만에게 히로뽕 취미만 없었다면 박정희 신내림 트로피 따먹기 싸움에서 이명박은 박씨 가문 자손에게 이기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명박은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이 되었다. 현장의 중요성 운운하며 간혹 서민처럼 분장하고 홍길동 마냥 여기저기 출몰하는 이명박의 모습을 보면, 청와대에서는 대일본 제국 육군군복 입고 코스프레 놀이 즐기면서 젊은 여자 곁에 앉히고 시바스 리갈 양주를 마시다가, 벼베기 철만 되면 농민들 틈에 끼어 농부차림으로 막걸리 매니아인 척 안간힘을 쓰던 박정희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명박은 어쩌면 그가 믿고 바라는 것처럼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대통령인지도 모른다. 단,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지금이 21세기가 아니고 1960-70년대이어야 하고, 소위 그의 효율과 실용정신을 아무 이유없이 무조건적으로 뒷받침해 줄 유신제국 시스템이 대한민국에 인스톨 되어있어야 한다는 절대적 전제조건 말이다.

쉽게 말해 이명박은 유신제국 시대의 박정희 같은 인물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내가 이명박 대통령 나으리에게 바치는 최대의 찬사이다. 유신제국 초대이자 마지막 황제인 박정희 각하는 대동아 전쟁에서 육군장교로 미-영 제국주의의 아시아 진출 저지를 위해 한몫 하셨고, 해방 후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시다가 개과천선하여 빨갱이 때려잡는 일에 앞장 서셨으며, 이후 대한민국을 총칼로 접수하시어 화끈하게 제 맘대로 개조하셨던 풍운아이셨다.

인상적인 경력이라고는 BBK 사기꾼에게 넘어가 광고 모델료 한 푼도 안 받고 TV 화면도 아닌 대학원 강의실에서 광고모델 영업을 뛴 것이 전부인 이명박을 감히 박정희와 동격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현직 대통령에게 드리는 최고의 찬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취임 후 한 달 남짓, 이명박 대통령은 홍길동처럼 신출귀몰 하셨다. 그가 다녀가면 전봇대가 뽑히고, 유괴범이 잡히고, 경찰서가 새로 생긴다. 치솟는 라면 값, 자장면 값, 소주 값은 그가 '오르지 말지어다' 한마디 호령을 하면 대번에 주춤거린다. 이건 대박이다. 대박이 터지니 당연히 스케줄이 밀려서 그런지 오늘 뉴스를 보니 은행 이체 수수료 인하는 청와대 이름으로 공문 날리는 것으로 대신하는 모양이다.

대한민국은 드디어 슈퍼맨 대통령을 갖게 된 거다. 그가 나타나면 마치 예수가 재림한 듯 기적이 발생한다. 나는 오늘은 대통령이 어디에서 출현할지 기다려진다. 아니, 앞으로도 대통령은 임기를 마칠때까지 홍길동-슈퍼맨 놀이를 단 하루도 중단하면 안된다. 예컨대 아동 성추행 사건 발생 후 1주일이 지나도록 범인을 못 잡는다면 대통령은 반드시 해당 경찰서를 방문해서 '조져야' 한다. 그래야 범인이 잡히니 말이다.

취임 한 달만에 이명박은 대통령이 '뜨지 않으면' 대한민국 국가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도록 길들여 놓았다. 따라서 잘되면 대통령이 부지런한 탓이요, 안되면 대통령이 게을러서 미쳐 돌보지 못한 탓이 되는 거다. 그러니 잠도 자지 말고 쌀 샌드위치 열심히 드시면서 밤이고 낮이고 동사무소 한군데라도, 파출소 한군데에라도 더 출현하시길 잔뜩 기대하겠다.

죽은 박정희를 팔아서 후보를 따먹고, 박정희를 팔아 대통령이 되었으니 박정희처럼 대통령 짓을 해먹는다. 처음에는 박정희도 홍길동-슈퍼맨 놀이에 신이 나서 돌아다녔을 거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보이는 곳에서는 일이 돌아가는 듯 하다가 자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일이 개판으로 돌아감을 깨달았을 거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좁다하여도 대통령 혼자서 '올코트 프레싱'을 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 없어도 언제 어디서나 대통령이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답은 '유신제국'이었다.

이명박의 비극은 노무현을 경험한 대한민국, 87년 6월을 기억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 현실 정치인으로서 박정희를 재림시키려 하는 데에 있다. 그가 진정으로 박정희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그저 추억 속의 아름다운 영웅으로 남겨 두어야 했다. 하지만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명박은 유일한 장사 밑천인 박정희의 미이라를 꺼내서 재림 쇼를 강행한다. 결론은? '박정희 바보 영구 만들기'가 될 뿐이다. 21세기의 박정희 모델 돈키호테 시대착오라는 진실을 증명한다는 말이다.

이명박이 장사 밑천인 박정희를 지키고, 자신을 보호하려면 유신제국을 다시 불러와야 한다. 아무리 한나라당에 미쳐있는 바보 천치들의 나라인 대한민국이라도 그런 엄청난 퇴행을 묵인할 수는 없다. 결국 박정희는 그의 추종자임을 자부하는 이명박에 의해 바보 영구로 낙인찍힐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보편적 가치와 상식을 짓밟은 자를 응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찢어지는' 박정희

유신공주 박근혜를 사이에 두고 영남 땅에서는 점입가경의 블랙코미디가 벌어졌다. '친박 연대'의 교주님은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고, 한나라당은 친박연대의 교주님을 자기네 당 유세에 모시지 못해서 비굴하게 굽실거림을 반복 했다. 고진화를 단칼에 날려버린 서슬 퍼런 조직의 칼날은 박근혜 앞에서 '딸랑딸랑' 라이터 불 아부의 반짝임이 되어버렸다.

포커페이스 유신공주 박근혜에게 아양 떠는 아부가 먹히지 않자 한나라당은 또다시 기상천외한 변신 쇼의 막을 올린다. 박근령을 충북 선대위장으로 헤드헌팅해서 시장에 내놓는다. 한나라당의 메시지는 명쾌하다.

"까불지마, 박근혜. 너만 박정희 자식이냐?"

'아주 맛이 간' 수구꼴통이 아니라면 전두환은 부정하고, 박정희를 인정하는 것이 소위 보수들의 정치적 논리이다. 한나라당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박정희라는 존재에 뿌리가 얽혀있다. 적화통일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국민을 굶주림에서 구원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경제적 풍요의 근간을 이루었음에도 자신은 부정부패나 개인적 치부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이미지. 나는 이러한 평가에 단 1%도 동의하지 않지만 적지 않은 국민들에게 박정희는 위와 같은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고, 그것이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박정희를 부지런히 팔아먹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선거는 3김 시대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는 선거라고도 한다. 김종필, 김영삼은 말할 필요도 없이 거인 김대중의 정치적 영향력도 뚜렷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느리지만 부단히 나아가는데 공세적 지역주의의 원조라 할 박정희는 여전히 집권 여당이 몸부림치며 부여잡으려는 흥행 아이콘이 되어있다.

박정희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들은 박근혜를 잘라버리지 못할까. 박정희가 얼마나 위대하길래 그들은 친자매 간에 아비의 이미지를 찢어서라도 나누어 가지려 진흙탕 개싸움을 벌이는 상황을 강요하는 것일까.

박정희의 초상화. 어린시절 내가 유신제국의 국민학생이었을 때 가는 곳마다 걸려있던 근엄한 초상화. 그것은 아마도 한나라당과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하나의 부적같은 신물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가지는 자만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군림하는 자격을 얻는다고 그들은 믿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 그것을 독차지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내가 독차지 할 수 없으면 갈갈이 찢어서 한귀퉁이 조각이라도 차지하려고 발악을 한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진짜 어머니는 자식을 갈라서 가지느니 차라리 남의 자식이 될지라도 포기하겠다고 했건만, 박정희를 구국의 영웅이요, 위대한 민족 지도자라고 추앙하고 흠모한다는 무리들은 박정희 미이라의 퀴퀴하고 말라 비틀어진 조각 하나라도 몸에 걸치겠다고 니편 내편 안가리고 아귀다툼을 벌인다. 급기야 박정희의 자식들마저 서로 아비를 팔아먹겠다고 찢어먹는 사태가 벌어진다. 정말 골때리는 흠모와 존경이 아닐 수 없다. 졌다.

내일이면 혹시 박지만이 친박연대의 선거대책 본부장을 맡게 되지 않을까. 박지만의 아들은 세 살쯤 되었을 텐데 혹시 그 아이는 마지막 황제 부의처럼 허경영의 컴백에 모델이라도 서지 않을까. 내년이면 박정희를 시조로 하는 유신박씨 족보라도 하나 만들자는 인간이 나타나지 않을까. 앞 다투어 박정희를 팔아먹는 세상이 도래하야 박정희는 '갈갈이' 이빨 아래 무조각처럼 걸레가 되어간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식들과 추종자들의 손으로 말이다.

칼 세이건은 명저 '코스모스'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우주의 장구한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다. 하루살이 벌레의 눈으로 보자면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안하는 존재로 보일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우주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따분한 대상이지만 분명히 기나긴 시간을 통해 일정한 법칙에 따라 꾸준한 진화의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라고.

역사는 우주의 흐름처럼 꾸준히 진보한다.

박정희의 미이라가 무너지는 데 필요한 시간은 더디 가도 한세대였다. 다름 아닌 그 자식들과 추종자들의 손으로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