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순미선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순수한 남자 2008. 6. 13. 19:54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번호 118372  글쓴이 그날이 오면  조회 13  누리 20 (20/0)  등록일 2008-6-12 22:37 대문 0 추천
 

 

지금 광화문에서 6년전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죽었던 효순이 미선을 생각합니다. 그때의 촛불시위를 생각하게 됩니다.


촛불시위를 촉발시켰던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

너무나도 억이 막혔던 재판의 과정


우리는 6년전의 그 자리에 또 촛불을 들고 나왔습니다.

뭔가 비슷한 점이 보입니다.


6년전이나 지금이나 모두 한-미관계에서 생긴 것입니다.

미국은 항상 힘센나라이면서 가해자측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우리의 촛불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촛불을 들고나가니 미국은 긴장하고 부시의 방한이 미뤄졌습니다....


내일은 효순이 미선이가 떠나간지 6년이 됩니다.

6년 전 그날들이 자꾸 떠오릅니다.

효순이, 미선이를 기억하며 작년 효순이, 미선이 5주기에 보았던 글을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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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올해로 효순이 미선이 추모 5돌을 맞이하고 있다.

효순, 미선 두 여중생의 죽음은 사건에 대한 분노뿐아니라 그때 터져 나왔던 촛불의 함성으로 사람들에게 잊혀질 수 없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국국민은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주한미군이 매일같이 군사훈련을 벌이고, 전쟁연습을 해 자신의 생존권과 범죄의 위험에 항상 놓여있었다. 매향리와 평택의 경우만 보더라도 주한미군이 얼마나 한국 국민들의 삶을 짓밟고,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인지 느낄 수 있다.


주한미군에 의해서 어린 두 여중생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두 여중생의 죽음은 주한미군과 한국정부의 은폐조작으로 진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더욱 가관인 것은 효선이 미선이를 죽인 미군 범죄자들은 무죄를 선고받고 미국으로 도망간 것이다. 이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한국사람을 죽여놓고 한국 법정에 세우지도 못하고 죄에 상응하는 처벌도 못하는지 전국민의 가슴은 울화통이 터질 노릇이다.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으로 인해 한국 국민들은 한미관계가 얼마나 불평등하고 종속적인 관계인지를 똑똑히 인식하였다.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은 그동안 대중적으로 알려지거나 인식하지 못했던 한국국민의 자주적 의사가 미국에 의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고, 그로 인해 온 국민을 분노하게 했으며, 거리로 거리로 촛불을 들고 나서게 했다.


효순 미선을 추모하는 주한미군철거운동은 전국곳곳에서, 사상과 종교를 막론하고, 나이를 막론하고, 공간을 막론하고 사이버상에서도, 해외동포들과 세계의 진보대중들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내었으며 2002년 한국대통령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역사적으로 기록될 투쟁이었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 5주기를 맞이하여 우리는 잊을 수 없는 2002년 6월 13일의 그날을 되돌아본다. 우리는 당시 효순이와 미선이에게 약속하고 각오했던 두 여중생의 한을 풀고 종속적인 한미관계를 끊어내는 투쟁을 실천으로 만들어야 한다.


새롭게 자라나는 세대들, 청소년과 새로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효순이와 미선이의 사건을 잘 알려주고 이들도 한국의 현실을 인식하고 민족의 자존을 지키는 일에 적극 떨쳐나서게 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은 효순 미선 사건의 진상과 역사적인 투쟁의 전개과정에 대해 서술하여 잊을 수 없는 그날들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1.사건의 진실


1>사건경위와 진상과정


2002년 6월 13일 친구 생일잔치를 가던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학생이 미군장갑차에 의해 희생당하였다. 갓길을 걷던 두 여중생이 대북군사훈련에 참가하던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숨을 거둔 것이다.


50톤 장갑차에 깔린 두 여중생은 전신 뼈마디가 으깨지고 뇌수가 터져 참혹하게 죽었다. 놀라운 사실은 일반인이 보행하는 길거리에서 어떻게 거대한 궤도전차가 안전표식 하나 없이 훈련을 벌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2002년 6월 13일은 미군의 고압선에 의해 처참하게 사지가 절단당하여 1년 가까운 시간동안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했던 전동록씨의 장례식을 치룬 이틀 뒤였다.


-사건 발생 다음날 6월 14일 미 제2사단은 사회단체를 배제하고 유족들만 참여시킨 채 현장브리핑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현장브리핑이란 것이 사건에 대한 기초조사도 하지 않고, 빠르게 사건을 덮어버리려고 하는 목적으로 요식행위로 진행하여 거센 항의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서 왜 훈련을 하기 전에 마을이장이나 관공서에 그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미군측은 훈련 사실을 미리 통보했다는 새빨간 거짓말로 주민들을 기만하였다. 결국 주한미군은 사람을 죽인 궤도전차에는 아무 잘못이 없고 궤도전차에 깔려죽은 두 학생이 잘못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주한미군은 이처럼 저들의 권력과 힘을 이용하여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고 획책하였다. 이들은 사건에 대한 사죄와 진상조사 등 최소한의 전제조건도 없이 유족들에게 군, 경, 공안기관을 압박하여 장례를 치루게 한 것이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의 범죄적 행각을 자세히 살펴보자.


-주한미군은 장례식 이전에는 일단 두 여중생의 장례식을 치르면 미2사단과 면담을 해주겠다고 약속하더니, 약속을 믿고 유족들이 장례식을 치르자 장례식 후 태도를 돌변하며 유족과의 면담을 거부하고 유족들에게 이 사건이 사회여론화가 되지 않는 조건으로 4억원을 주겠다고 매수를 시도하는 등 사건진상을 규명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사건을 은폐하려고만 하였다.


-6월 28일 미2사단 공보실장인 브라이언 메이커 소령은 여중생 죽음과 관련하여 ‘어느 누구의 과실도 없었다’ ‘궤도차량은 사고 당시 모든 안전수칙을 이행했다. 한미 합종조사 결과 누구도 힐책 받아야 할 사람이 없고 어느 누구의 과실도 아닌 것으로 결론났다’고 밝혔다. 주한미군은 사건의 진상에는 예초부터 관심이 없었고, 어차피 SOFA에 기대어 판결내리면 되니까 한국 국민의 여론은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7월 3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여중생 사망사건 진상조사 중간발표를 했다. 발표의 주요내용은 대한민국 검찰과 경찰이 참여시키지 않은 조사는 한미합동조사라고 볼 수 없으며, 운전병이 여중생들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30미터 가량의 거리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시야가 확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또 사고차량의 선임탑승자는 제때 운전자에게 경고할 수 없었다고 하고 운전자는 소음이 심해서 경고를 듣지 못한 것처럼 조사결과에서 기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민변은 반론을 제기하였다. 다시 말해 사건 가해자들이 전방의 여중생을 파악하였을 때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되고 더불어 하필이면 그때 무선통신의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은 더욱 의구심이 가는 일이기에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등의 미 2사단의 조사결과 발표에 대한 의문사항 7가지를 발표한 것이다.


-이처럼 사건에 대한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져가자 주한미군은 허겁지겁 사건을 얼버무리려고 시도하였다. 사건발생 보름께인 7월 4일 주한미군의 총대장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리언 러포트 당시 주한미사령관은 여중생사망과 관련하여 ‘미 육군이 이 비극적인 사고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음을 안정한다. 사고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통감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며 지금까지 주한미군의 과실은 없다는 공식입장을 뒤집어엎고, ‘그동안 여러 가지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은 한국군과 한국 경찰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주한미군의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라 일단 위기를 벗어나려는 가증스러운 기만술책임이 드러났다. 이후 사건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자.


-7월 8일 여중생사망사건과 관련하여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이 주한미군들을 상대로 사고경위들을 조사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미군의 공무집행 중 일어난 사건이 경우 1차적 재판관할권은 미군에 있으나, 법무부는 미군들에 대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미군측의 자체조사 결과의 타당성을 판단하여 11일까지 재판권 포기요청여부를 결정1)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주한미군은 주한미군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한 조항을 십분 활용하여 두 여중생사건의 책임을 회피하여 얼버무리려고 시도하였다.


-첫째, 주한미군은 한국 법무부의 사건조사에 불성실하게 응하였다. 주한미군은 7월 8일 신변위협을 이유로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의 소환을 취소시켰고, 10일에는 출석은 하였으나 신변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며 조사를 거부하고 돌아갔고, 7월 29일에야 마지못해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다.


-둘째, 주한미군은 형사재판권 관할권 포기요청을 거부하였다.


7월 10일 한국 법무부는 SOFA의 규정에 의해 미행정부에 여중생을 숨지게 한 미군장갑차 운전자 ‘마크 워크’병장, 선입탑승자 ‘페르난도 니노’병장 등 2명에 대한 ‘형사재판 관할권 포기요청’을 보냈다.


11일 주한미군사령부는 한국법무부의 형사재판 포기요청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는 거짓임이 드러났다. 7월 27일 주한미군사령부는 재판권이양 거부의 뜻이 담긴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주한미군은 “자국 군인이 공식적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발생한 사건에 대해 군이 재판권을 보유하는 전통은 미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고와 관련된 미군들은 깊이 뉘우치고 있다” 는 등의 발언을 하면서 사실상 주한미군측이 재판권 이양의사가 없음을 비췄다. 8월 7일 주한미군 사령부는 ‘주한미군은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미군들은 동맹국의 준비태세에 필요한 인가된 연합작전에 참가하여 그들의 공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사실과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재판관할권을 유지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내용의 뻔뻔한 공문을 법무부에 보낸 것이다. 이같은 주한미군의 무례한 행동은 한미간의 불평등 조약인 SOFA가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결과다. 결국 주한미군은 결코 한국의 이익과 한국 국민들의 목숨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오로지 저들을 위해 살아가는 침략적 존재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같은 주한미군의 철면피같은 행동에 한국군도 동조하였다는 것이다. 한국 국방부는 7월 16일과 20일, 미8군 사령관과 대책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22일은 국방부 황의돈 대변인이 브리핑을 통해 “현재 우려할만한 수준의 반미감정 때문에 미군이 사건대응에 어려워하고 있어서 국방부가 대신 나서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건을 적당히 은폐, 무마하려는 주한미군의 의도를 국방부가 대신하겠다는 것으로 자기나라 국민의 목숨보다 주한미군의 압력에 두말하지 못하고 굴복하는 한국정부의 대미예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8월 5일 의정부지청은 여중생 사망사고의 주된 원인은 운전병과 선입탑승자 사이의 통신에 장애가 있었던 때문이라고 발표하였다. 의정부지청은 이에 기초하여 미군측이 재판권을 포기할 경우 사고장갑차의 운전병과 선입탑승자를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기소하겠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했으나 주한미군의 반대로 결국에는 재판장에 가해자를 세우지도 못했다.


-이러한 주한미군의 무례한 태도가 극치를 보인 것은 사건발생 5개월 뒤인 11월 20일, 사건전반에 대한 재판결과가 공개되면서였다. 11월 20일 주한미군 군사법정은 두 여중생 사망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던 장갑차 선입탑승자 페르난도 니노 병장에게 무죄, 22일 운전병 마크워커 병장에게도 무죄를 선고했다.


미국 형사재판 절차에 따르면 1심 평결에 대해 변호사는 항고할 수 있지만 검사는 항고할 수가 없다. 결국 재판은 여기서 무죄로 모든 절차가 끝난 셈이다.


배심원단의 무죄평결이 발표되자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페르난도 니노 병장은 한숨을 크게쉰 뒤 웃는 모습으로 부인과 포옹하고 변호인단과 악수를 하며 기뻐하였다. 재판이 끝나자마자 켐벨 주한미군사령관은 “법적으로는 잘못이 없다는 판단이다”고 기자회견에서 발표하였다. 결국 주한미군의 뻔뻔스런 태도에 의해 여중생의 죽음은 가해자 없는 죽음이 된 것이다.


나아가 미대사관은 유족들의 항의서한마저 수령하기를 거부했다. 언제는 유족에게 사과하더니 언제는 유족의 항의서한마저 거부하다니 이제 재판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를 통해 볼 때 지금까지 주한미군의 사과는 늑대의 탈을 쓴 양의 행동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5년 6월에는 의정부지청의 수사기록이 공개되었다. 의정부 지방검찰청 수사기록은 2005년 5월 27일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2년 6개월만에 공개가 결정된 것이다. 수사기록은 1천여쪽에 이르는 분량으로, 미 육군범죄수사대의 조사보고와 수사보고를 비롯해 피의자 진술서, 미 교통사고전담반의 자료, 한국 검찰이 미 2사단에 보낸 수사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수사기록들을 검토한 결과 당시의 장갑차의 운전병은 두 여중생을 볼 수 있었으며, 운전병과 선입탑승자 사이의 통신장애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검찰이 9월 3일 보낸 검토 의견서에서는 당시 이동행렬의 지휘관이었던 메이슨 중대장은 여중생들이 협소한 도로의 우측 가장자리를 이용해 보행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으면서도 뒤따라오는 장갑차 대열에게 “주의를 촉구했어야 함에도 이를 게을리 한 사실은 인정되었다”고 서술됐으나 11월 5일자로 미 2사단에 보낸 의견서에는 메이슨 중대장과 관련된 부분을 삭제함으로써 지휘체계상의 책임을 면책시켜줬다.


이것은 한국검찰은 미국의 압박에 굴욕적으로 은폐조작 하여 미군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미관계의 현주소인 것이다.


이후 워커의 변호사 가이워맥도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진실을 공개한다”며 “재판이 적절하게 진행됐다면 선입탑승자 니노의 과실은 명백한 유죄이며 중대장도 지휘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실토한 바 있다.


2>사건의 진실


운전병과 탑승자는 효순이 미선이가 앞에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선도차량도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사건발생 전이나 직전, 운행시작 전과 운행중에도 통신은 정상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수사기록의 공개로 밝혀졌다.


주한미군은 사실을 은폐시키기 위해서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이고 대응하였다. 주한미군은 SOFA에 기대어 재판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미군법정에서 통신장애의 문제점으로 돌리면서 무죄판결을 내리고 두 범죄자를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의 진실은 두 범죄자를 조사했던 의정부지청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의 압박에 굴욕적으로 조사내용을 은폐 조작했다. 은폐조작된 내용이 미군의 무죄판결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뒷받침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여중생 사망사건은 SOFA문제로 여중생을 죽인 주한미군이 한국의 법정에 서지 못했고, 미군 법정에 세워진 주한미군은 미국과 한국검찰에 의해 조작 은폐된 자료를 근거로 무죄선고를 받았던 사건으로 종속적인 한미관계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두 여중생 사망사건은 지금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내일에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란 점이 충격적이다.


2.역사적인 투쟁


두 여중생의 사망사건은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산 교범이었다. 이 사건을 접하게 된 한국국민들은 너나없이 분노하였고 결국 살인미군처벌, 부시사과, SOFA개정 범국민서명운동에 140만 국민이 동참하고, 온 국민이 촛불을 들고 나서, 두 여중생의 사망사건은 전민족적인 범위로 확산되었으며 나아가 국제적인 관심과 뜨거운 지지 속에서 투쟁이 전개되었다.


1>투쟁 경과


-효순 미선이의 죽음에 대한 최초의 투쟁은 6월 15일 용산 미군기지 5번게이트 앞에서 ‘미군저차 사망자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공동대책위주최로 여중생 죽인 주한미군 규탄 기자회견이었다. 이어 6월 20일에는 의정부 미2사단 정문에서 ‘미군에 의한 여중생 살해 규탄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대학생들과 사회시민단체뿐아니라 효순 미선의 언니와 오빠들이 다니고 있는 의정부여고와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이 150여명이나 참가하여 친구, 동생의 죽음에 대해 미군이 진상조사를 외면하고 책임을 미루는 것에 대해 항의하였다.


-주한미군의 파렴치한 행보가 줄을 이을수록 투쟁의 불길은 더욱 넓게 번져갔다. 6월 26일에는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신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의정부 미2사단 앞에서 1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표단은 미2사단 단장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하려고 하였는데 미군측은 코방귀를 끼며 받아주지도 않았다. 심지어 취재하던 기자 2명이 미군측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 연행, 감금되는 사태까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날의 주한미군의 만행은 불과 반년만에 몇백배의 부메랑이 되어 그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범대위의 가슴 아픈 미군기지 투쟁소식으로 인해 여중생의 사망사건은 그 동안 월드컵의 분위기속에서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하던 것을 벗어나 이날 이후 인터넷을 통해 대중들에게 급속히 알려지게 된 것이다.


-두 여중생의 죽음에 대한 투쟁이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이제는 국회의원들도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7월 2일 ‘나라와 문화를 생각하는 의원모임’ 공동대표인 김원웅, 송영길 의원은 정부는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해 주권국가로서 당당하게 임해야 한다며 정부가 나서서 미국에 형사재판권 포기를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7월 9일 국회에서 사회단체와 국회의원이 함께 부시 미대통령의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대국민보고대회를 열었다. 보고대회에는 여중생의 유가족들과 범국민대책위원회 소속단체사람들과 나라와 문화를 생각하는 의원모임 소속 국회의원 등 200여명이 참석하였다. 또 연이어 7월 26일 이부영, 정동영 의원 등 24명의 국회의원이 ‘미군측은 형사재판권 포기 입장을 밝힐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각계각층이 효순이 미선의 죽음에 분노하며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2002년 7월 4일에는 효순, 미선의 마을사람들의 집회가 열렸고, 영광주민들을 비롯한 영광천주교 신자들, 영광농민회, 영광 여성의 전화, 핵추방위원회까지 용산에서 주한미군을 규탄하는 집회를 가졌다.


노동자들도 여중생 사망사건 관련 투쟁에 적극 나섰으며, 7월14일 민주노총은 ‘노동자 행동의 날’ 을 상정해서 투쟁하였고, 7월 20일은 경기북부 시민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또 7월 25일 탑골공원에서 여성단체들이 주최한 미군장갑차에 의해 살해된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을 위한 여성 추모제가 열렸다. 7월 31일 청년학생 4개 단체(전학협, 연대회의, 한총련, 행동연대) 여중생 사망사고 관련 공동결의대회가 열렸다.


-사건이 미궁에 빠져듦에 따라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높아졌고 이와 더불어 투쟁의 강도도 더 높아졌다. 8월 1일 여중생 범대위는 여중생 사망사고의 해결을 촉구하는 명동성당 천막농성에 돌입하였고, 대학생들은 8월 3일 파주 미2사단 7기갑부대 4대대 소속 장갑차 30대를 가로막고 시위를 벌렸다.


8월 7일 재판이양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미군의 통보에 따른 분노로 여중생 범대위는 노상농성까지 진행하였다. 이처럼 주한미군에 대한 투쟁은 불을 지피듯 곳곳에서 타올랐다.


-11월 20일 살인미군의 무죄판결 이후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인터넷 누리꾼인 아이디 앙마의 제안으로 시작된 광화문 촛불시위는 삽시간에 수만의 촛불의 물결을 이루었다., 11월 26일 전교조는 SOFA 불평등 관련 공동수업을 시작하며 한미관계의 부당성을 학생들에게 알렸고 이후 전교조의 공동수업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12월 2일 여중생 살인사건 미정부 해결촉구를 위해 ‘여중생 범대위 방미투쟁단’이 출국하였으며, 이후 11일간의 왕성한 방미투쟁을 전개하였다.


12월 6일에는 동해시의회가 여중생 사망사건 처리와 관련하여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이어 파주시의회도 결의문을 채택하여 미대사관, 미8군, 미2사단을 비롯한 국회, 국방부, 외교통상부 등 중앙부처와 각 정당과 국회의원, 경기도내 30개 자치단체 등에 결의문을 보냈다.


또 같은날 여중생 압사사건 무죄판결에 대한 방송, 영화예술인 129명의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광범위한 국민들이 참여하는 범국민적운동이 되었다.


12월 7일 전국동시다발 자주적인 나라 만들기 대회가 진행되었다. 이 대회는 전국 43개 지역에서 진행하였고 서울에 3만명이 넘는 국민들이 참가하였으며 미대사관 투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미대사관 정문 앞까지 투쟁대오가 진출하였다.


같은 날 의정부역 광장에서는 경기북부 지역의 교사, 학생, 학부모등 교육주체들이 거리로 나섰다.


12월 14일을 ‘주권회복의 날’ 로 선포하고 1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을 진행하였고, 온 국민은 태극기 게양, 6시에 촛불의식과 묵념 등의 공동행동에 동참하였다. 서울을 비롯한 64개 지역에서, 해외 15개 나라에서, 40만~50만이 사람들이 다양한 행사와 집회를 열었다. 행사와 집회가 열렸던 도시군은 다음과 같다.


(서울, 과천, 오산, 여주, 청주, 충주, 제천, 음성, 진천, 괴산, 영동, 옥천, 보은, 단양, 대전, 공주, 논산, 당진, 보령, 서산, 아산, 연기, 천안, 홍성, 서천, 태안, 전주, 고창, 남원, 장수, 순창, 익산, 광주, 목포, 여수, 순천, 영광, 광양, 진도, 춘천, 원주, 강릉, 동해, 횡성, 대구, 성주, 안동, 구미, 포항, 왜관, 김천, 부산, 울산, 거제, 진주, 김해, 사천, 마산, 창원, 밀양, 거창, 통영, 함안등 64개 지역과 독일 베를린 뮌휀, 프랑스, 스웨덴, 일본, 미국, 러시아, 호주,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뉴질랜드  등 해외 15개 나라) 


이어 12월 31일은 “재판무효, 살인미군처벌, 부시사과, SOFA개정 100만 촛불평화대행진을 64개 지역에서 진행하였다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우리 국민들의 마음은 해가 지나 2003년이 되어도 식지 않았다.


2003년 1월 13일 여중생범대위와 시민사회단체 등 188개 단체 등 ‘2003년 자주, 평화의 해’ 선포 기자회견이 열렸고, 2003년 2월 15일은 서울,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전국적으로 대규모 반전평화대회 열렸다. (70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전쟁과 평화실현 공동실천과 여중생범대위 공동주최)


-효순이 미선이 추모 1주기에서는 여중생 투쟁이 남북의 공동투쟁으로 승화하였다. 6월 13일은 범청학련 여중생 추모모임이 남북 공동개최되었고, 6.13 1주기 추모대회 반전평화 실현 촛불대행진이 대중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이후에도 투쟁은 계속되었고, 300차 정도의 촛불집회가 진행되었다.


2>각계각층의 다양한 투쟁


▶종교인이 투쟁에 나섰다.


-기독청년들이 금식 릴레이 1인 시위를 진행했고, 8월 7일에는 천주교 여중생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1000인 선언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과 한신대학원등 기독청년들 100여명 : 미선이 효순이 죽음을 애도하며 미군만행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범 기독교인 기도회를 열었다.


10월 1일은 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한국교회청년회연합, 한신대신학대학원, 한신대신학과, 기독교사회정의실천연대 등은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서 기도회를 가지고 여중생의 죽음을 애도하고 주한미군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12월 5일은 불자들이 108배로 행동에 나섰고, 불교대책위를 구성하여 9일부터는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12월 9일은 천주교가 이어서 단식기도회(부시 대통령 공개사과 SOFA 전면개정, 미군주둔 반대)을 열었고,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 대학원생들은 삭발투쟁을 전개하였다. 12월 14일부터는 많은 종교인들이 열린시민마당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하였고,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 등 범종교인들은 생명평화선언대회을 진행하였다.


12월 24일 성탄전야에 150여명의 천주교인들의 성탄자정미사를 진행하였고, 대한예수교 장로회가 476개 교회,32742명의 서명을 여중생범대위에 전달하였다.


▶청소년도 투쟁에 동참하였다.


6월 20일 의정부 미2사단 앞의 첫 투쟁부터 청소년들은 투쟁에 나섰다.


7월 17일은 500여명의 청소년들이 참가하여 청소년행동의 날로 진행하였고, 11월 23일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는 ‘미군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청소년 대책위’가 주최하여 500여명의 청소년들과 50여명의 교사등 1천여명의 참가자들이 모여서 ‘살인미군 재판무효 2차 청소년 행동의 날’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연일 계속되는 촛불시위에서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을 찾아보기는 쉬웠다.


▶법률, 장애인, 문화예술인


-법률가 196인 미대사관에 항의서한 전달하였고, 장애인 50여명은 기자회견과 규탄집회를 열었으며, 문화예술인 100여명은 ‘심효순 신미선 살인사건 규탄 범문화예술인 시국토론회열고 주한미군에 대한 요구사항과 결의안 발표, 철야농성을 진행하였다. 또 여중생 압사사건 무죄판결에 대한 방송, 영화예술인 129명의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뿐 아니라 춧불시위에 동참한 문화예술인은 더 많다.


▶동포사회와 세계곳곳으로 투쟁은 번져갔다.


-6월 22일 북한 조선학생위원회 대변인은 주한미군을 규탄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였고, 6월 24일 김형직사범대학에서는 미군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고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2002년 7월 26일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일본지역대책위에서 미 대사관 정문 앞에서 규탄집회를 열고, 부시 미대통령에게 보내는 항의문을 전달하였다.


또 7월 27일에는 재미교포단체인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은 주한미군의 장갑차의 여중생 압사 사건관련 미국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해외동포들은 부시정부가 책임을 지고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과 한국법정에서 책임자들을 처벌하도록 조치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연일 벌였다.


또 같은날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소속 청년학생들은 추모집회를 열고, 주한미군을 규탄하는 성명을 채택, 조지부시 대통령에게 발송하였다.


-12월 14일에는 세계곳곳에서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독일, 프랑스, 스웨덴, 일본, 미국, 러시아, 호주,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뉴질랜드 등에서 촛불집회가 열렸다.


▶누리꾼들의 역할이 컸다.


-11월 28일 주한미군의 무죄판결 이후 누리꾼들은 미국측에 항의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개발하여 항의시위에 나섰다. 백악관에 항의 e-메일 보내기, 대한민국 네티즌연합을 주축으로 하는 5천여명의 누리꾼들은 음료, 식품, 의류 등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미국산 제품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각종 사이트에 확산시키는 등 본격적인 미국제품 불매운동에 나섰다.


그리고 인터넷 메신저에는 여중생을 추모하고 무죄판결에 항의하는 의미로 대화명에 추모표시, 검은 리본달기를 벌였으며 이들은 오프라인 항의시위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이들은 12월 27일 사이버 공대위 ‘네티즌의 힘’을 공식출범하는데까지 이르렀다.


▶대선후보들에게도 여중생 사망사건 해결이 대선승리를 위한 주요과제로 되었다.


-한나라당은 살인미군 처벌을 외치는 사람들을 일부 반미 과격세력이라고 칭하였다가 이를 번복하였다. 이회창 후보는 여중생사망사건을 해결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당내에서 서명을 받는 기존 당입장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보이다가, 또 당대표라는 사람은  반미투쟁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발언을 하는 등 한나라당의 정체성을 헷갈려 하고 있다.


민노당 권영길 후보는 부시사과를 요구하는 서약서에 서명하고 다른 후보들에게 동참을 요구하였고, 민주당은 노사모가 촛불을 들고 유세를 하는 것으로 여중생 사망사건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고, 두여중생의 부모님을 만나 위로의 말을 전하고 앞으로 이처럼 불행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SOFA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이러한 대선주자들의 행보는 2002년 대선결과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 대미자주적 발언을 앞세운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3.결론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은 예속적 한미관계의 결과물이다. 지금의 예속관계가 청산되지 않는 한 오늘도 내일도 이런 사건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2002년 여중생 촛불시위는 그간 묻어왔던 한미관계문제를 전면화하고 예속관계를 벗어나 자주를 실현하려는 범국민적 지향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전국민의 과제는 예속적인 한미관계를 청산하기 위한투쟁으로 주한미군의 주둔문제에 강력한 문제제기와 보다 광범위한 대중들이 참여하는  투쟁으로 만들어 나가는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