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세상

조중동의 공통점들

순수한 남자 2009. 4. 6. 06:46

조중동의 공통점들
[오바마 시대와 한국](39)가시밭길 헤쳐온 한국 언론의 앞길
2009년 04월 04일 (토) 10:16:14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가시밭길 헤쳐온 한국 언론의 앞길

우리나라 현대 언론사는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 민족공동체에 대한 봉사와 배신,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저항, 부도덕한 지배체제에 대한 굴종과 야합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1883년 9월 <한성순보>가 최초의 근대신문으로 창간된 이래 1898년 9월 <황성신문>이 첫 일간지로 선을 보임으로써 우리 겨레는 서구식 언론을 접하게 되었다. 그 뒤 한 세기 하고도 10여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에 얼마나 많은 언론인들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떨쳐버리려고 붓과 몸으로 싸웠고, 얼마나 많은 언론사 경영자들과 기자들이 외세에 아부하면서 영화를 누렸는지는 통계를 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920년 3월과 4월에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90년 가까이 언론의 그런 양면성을 대표해 왔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친일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를 배경으로 조진태, 민영기,    예종석 등이 주동이 되어 1919년 1월에 조선일보 조합을 결성하고 창간    준비를 서두르다가 1920년 3월 5일 ‘신문명 진보주의’를 사시로 내세우고   합병 후 첫 한국인 민간신문으로 제일 먼저 창간되었는데 총독부로서는 민   족지를 자처하는 동아일보와 노골적으로 친일을 표방한 친일지의 발행을    허가할 필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하 민족언론사론>, 최민지 지    음. 1978년 5월, 일월서각, 47~8쪽)

 *위의 책은 1970년대 초반에 <이대학보> 편집국장을 지낸 최옥자가 ‘최민지’라는 필명으로,  일제식민지시대의 ‘문화정치’와 언론기업,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의 보도 행태와 친일 행적을 당시 지면들을 상세히 검토하고 분석해서 쓴 것이다. 출간 당시부터 한국언론사 연구에 획기적으로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런데 동아, 조선과 또 하나의 일간지인 <시사신문>의 창간을 일제가 허용한 배경에는 1919년 3·1 독립운동의 기폭제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인들의 ‘지하언론’을 지상으로 노출시켜서 통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일견 조선일보와 시사신문은 일제의 식민정책을 지지하고 호응하고 있는   친일 매국세력에서 출원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발행허가는 당연하다 치더라   도 민족지임을 자임하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제창하며 일제에서의 해방.   독립, 주권을 염원하는 민족의 대변지를 하겠다는 동아일보를 허가한 것은   문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를 민족 독립운동의 기수로 독립운동을   하라고 허가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적어도 일제가 제창하는 식민   정책에 부응하거나 일제의 조종에 놀아날 수 있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진   무리라고 판단하였거나 기업 이윤의 확보나 출세주의 때문에 일제에 저항   하기보다는 타협할 것으로 판단되었거나, 충분히 일제의 한반도 경략에 이   용할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 나머지 허가했음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사시가 대동소이함이 우연이 아님은 분명하    다. (위의 책, 49쪽)

 이런 판단은 동아가 창간된 뒤 몇 해 지나지도 않아서 드러낸 친일논조에서 그 정확함이 여실히 입증된다. 동아일보는 1924년 1월 2일부터 ‘민족적 경륜’이라는 사설을 연속으로 실었는데, ‘일본을 부인하는 무장항일 노선의 무모함을 지적하면서 일본의 주권 아래 법률이 허하는 범위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자치운동으로서의 전향을 제시한’ 부분이 독립운동가들은 물론이고 청년지식인들의 격분을 일으켰다. 그 대목은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 연속사설의 집필자는 춘원 이광수였다).

동아와 조선의 ‘친일 경쟁’

 애초에 친일신문으로 출발한 조선일보는 1933년, 평북 정주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다가 금광에서 노다지를 캐내 일약 백만장자가 된 방응모의 손으로 넘어간다.
호남의 대지주로서 일찍이 방직업에 진출해서 성공한 산업자본가 집안의 맏형 격이자 보성전문(고려대학교의 전신) 교주인 김성수의 동아일보와 역시 대자본가인 방응모의 조선일보는 ‘민족지’라는 간판을 내던진 채 끝없이 상업적 경쟁을 하면서 전라도와 평안도의 갈등을 부추긴다.

그런데 두 신문이 일치하는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일제의 ‘조선통치’와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선동을 하고, 미영귀축(米英鬼畜)을 저주하는 점에서는 완전히 ‘하나의 신문’이 되었던 것이다.

1937년 7월 7일,  일제가 ‘지나사변’이라고 부른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쯤  지난 뒤 동아와 조선의 지면에는 일제의 침략군을 ‘아군’ 또는 ‘황군’이라고 부르는 기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일제가 압도적 승세를 굳혀가자 두 신문에는 일본의 죽은 천황과 산 천황에 대한 아부의 글이 넘쳐나고, ‘조선 청년들이 거룩한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사설들이 실린다.

명치천황의 어성덕을 흠앙하는 3일의 명치절!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인   한울은 하늘까지도 이날을 축복하는 것 가탓다 (동아일보 1937년 11월 4일자 사설).

  지원병 제도의 실시는 조선민중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담시키는 제일보이다. (···) 남(南) 총독의 영단은 역대 총독이 상상도 하지 않던 병역의 의무를 조선민중에게 부담시키는 제일보···(동아일보 1938년 4월 3일자 사설).

요컨대 금번 지원병 제도의 실시는 위정당국에서 상(上)으로 일시동인(一   視同仁)의 성려(聖慮)를 봉체(奉體)하고 하(下)로 반도민중의 애국열성을 보아서 내선일체의 대정신으로 종래 조선민중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잇던 병역의무의 실현을 제일단계를 실현케 하는 것이다.(조선일보 1938년 6월 15일자 사설)

조선일보가 ‘성전 1년’을 맞이해서 1938년 7월 8일자 1면에 실은 기사에는감격과 흥분이 넘친다.

“국민감격의 긔념일 7월 7일을 마지하는 전반도는 도시와 농산어촌을 물론하고 (···) 물적 심적 총동원의 구든 각오를 가지고 호국의 영령에 밧치는 조의와 출정장병의 로고를 생각하는 의의 깁흔 온갖 행사를 거행하얏다.”

위의 사설과 기사를 보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다를 바가 거의 없다. 신문을 일제에 대한 아첨과 충성 서약으로 도배하던 동아와 조선이었지만, 조선총독부는 ‘대동아공영권 확립을 위한’ 언론통폐합 방침에 따라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킨다. 두 신문사는 강제폐간을 당하면서도 이렇게 읊조린다.

이제 당국의 언론통제에 대한 대방침에 순응함에 따라 본보는 뒤를 보아 한됨이 없고 또 앞을 보아 미련됨이 없는 오늘을 마지하게 되엇으니···(동아일보 ‘폐간사’)

지나사변 발발 이래 본보는 보도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엿고 더욱이 동아(시아) 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저···(조선일보 ‘폐간사’)

 김성수와 방응모의 친일행위

그렇게 치욕스럽게 신문사 문을 닫은 뒤에도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는 조선 청년들에게  징병에 응하라는 글을 쓰거나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등 전쟁협력단체 임원으로 참여하고 ‘명사들의 각도 순회강연 강사’로 나간다.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는 조선이 폐간되자 잡지 <조광>을 독립시켜 친일논조를 펼치는가 하면, 일제 군대에 고사포를 기증하고 전쟁협력업체인 조선항공공업회사의 중역으로 일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사실들이 70년 가까이나 지난 요즈음에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극구 부인하는 창업주들의 ‘친일행위’이다.

2009년의 한국 언론을 이야기하면서 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식민지시대 행적을 자세히 되돌아 보는가? 바로 그런 신문 제작과 사주들의 행태가 지금도 방식을 달리하면서 국민과 독자들을 기만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신문에서는 이승만 정권시절에 젊은 기자들이 독재를 비판하다가 고난을 당하기도 했고, 박정희의 5·16 쿠데타 뒤에는 한 동안 사주와 사원들이 군사정권의 불법성과 반민주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의 앞 부분에 썼듯이, 1975년 3월 12일부터 동아일보사가 유신독재와 야합해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들을 대량 해직하고, 조선일보사 역시 같은 운동을 하던 기자 33명을 해임한 이래, 두 신문은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철저히 권력에 편에 서 있었다. 조선 ·동아보다 역사는 훨씬 짧지만 중앙일보도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조중동의 공통점들

이제는 대중에게 하도 많이 알려져서 익숙한 복합명사가 된 ‘조중동’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사주나 경영책임자가 아무리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일을 저질러도 자기 신문을 통해 국민과 독자들에게 진상을 제대로 알리거나 사과하는 일이 결코 없다는 점이다.

김대중 정부의 국세청은 1999년 6월 말 보광그룹에 대한 세무조사를 시작한 뒤 홍석현 중앙일보사 사장을 특가법상 조세 포탈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다. 그는 2000년 5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벌금 30억원을 선고 받는다. 이어 2005년 6월에는 동아일보사의 김병관 명예회장이 법인세와 증여세 등 43억6000만원을 포탈하고 회사자금 16억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30억원을 확정 판결 받는다. 그 다음으로 2006년 6월에는 조선일보사의 방상훈 전 사장이 조세 포탈과 횡령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과 벌금 25억원이라는 2심 선고에 대해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는다.

이들의 형량과 벌금은 대체로 비슷한데, 사회적 통념으로 따지면 ‘죄질’이 아주 ‘불량’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길지 않은 옥살이를 마치고 보석으로 풀려난다. 사건 당시 조중동은 각기 ‘정권 차원의 언론 탄압’이라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의 판결을 받고 나서도 그렇게 우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1·2심과 최종심에서 탈세 또는 횡령이 명백하게 드러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기 회사의 실질적 사주가 파렴치한 행위로 법의 심판을 받아도 지면에 보도를 하지 않거나 못하던 언론인들이 정작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에 대해서는 세세한 부분까지 들추어내면서 비판했으니 국민들이 ‘형평성을 잃은 보도와 논평’이라고 꾸짖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창업주에서 세습되는 부도덕성

조중동의 문제는 실질적 사주들의 부도덕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선대’인 창업자와 그 후계자들이 저지른 공개적 친일행위, 고위관리로서 지은 중죄 같은 것을 아예 없는 일로 만들려고 하거나 감싸 안으려고 하는 것이 조중동의 일관적인 태도이다. 이것은 민족의 역사를 바로 기록해서 후손들에게 알리는 데 아주 크고 높은 장애물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신문 자체의 종사자들을 ‘공동의 사실 왜곡자’로 만들어버린다. 앞에 말한 동아일보 김성수와 조선일보 방응모의 친일행위를 끝없이 덮거나 부인하는 행태가 바로 그것이다.

중앙일보의 경우, 창업자인 이병철이 삼성 회장이던 1966년에 터진 ‘한국비료 밀수사건’ 때 그 회사 기자들은 물론이고 외부의 ‘전문가들’까지 동원해서 ‘재벌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변호하려고 들었던 사실이 언론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008년 봄에 김용철 변호사가 천주교 사제단과 함께 ‘삼성그룹의 비리’를 폭로했을 때 중앙일보는 물론이고 조선과 동아도 ‘삼성을 감싸는’ 보도와 논평을 주로 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우리는 조중동에서 선대의 부도덕하거나 위법적인 공적 행위가 후대로 ‘상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을  아들이나 손자가 시인하고 ‘우리 대에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될텐데 후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문의 체면이나 언론사의 상업적 목적 때문에 선대의 잘못을 감추거나 변명하는 것은 길게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1960년의 4월혁명 때 내무부장관으로서 ‘발포명령’에 책임이 있다고 해서 법원에서 극형을 선고 받은 중앙일보 초기 경영자 홍진기와 삼성의 이병철이 사돈 간으로 그 신문을 키워오면서 권력과 재벌의 유착을 꾀했다는 사실은 보도의 ‘금기’처럼 되어 있다고 알려졌다.

동아일보사의 창업자가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면, 그의 아들과 손자와 증손자는 그것을 당당히 인정하고 ‘우리는 그 아픈 역사를 교훈 삼아 공정하고 자유로운 신문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면 그것으로 끝이 될 것이다. 조선일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조중동이 신문과 방송을 겸영하게 되면

창업자들이 기본적으로 그런 역사를 지닌 조중동이 지금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위해 한나라당의 언론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하는 일에  ‘올인’하다시피 하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가뜩이나 여론시장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세 언론사의 영향력은 공룡처럼 커질 것이다.

미국의 주류 언론에도 문제는 많지만, 그 악영향이 조중동처럼 심각하지는 않다.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보스턴 글로브, 월스트리트 저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같은 대신문들의 사주나 최고경영자가 한국 돈으로 30억원이나 되는 탈세 또는 횡령을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을 독자들이 너그럽게 보아준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려고 했다면 신문사가 문을 닫을 정도로 강력한 비판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 글의 앞에서 보기로 든 부시 2세 정부 때의 ‘엔론 회계부정’ 사건을 주류 언론이 모른 척했다면 여론이 그 회사들에 대해  ‘자격 정지’를 선고하지 않았겠는가.

정치와 관련해서 한국의 신문들이 미국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특히 대통령선거 철만 되면 자기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기사와 논평으로 강력하게 지원하면서도 공론화 하려는 노력은 아예 하지 않은 조중동이 그렇다.

미국의 신문들과 정기간행물들은 선거일이 다가오면 어느 후보를 지지한다는  공식 견해를 사설이나 사고를 통해 밝힌다. 2008년 11월 대선에서 오바마를 지지한 일간신문은 뉴욕 타임스, 보스턴 글로브, 워싱턴 포스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시카고 트리뷴을 포함해서 296개, 주간지는 111개였다. 그 일간지들의 발행부수를 합치면 3,000만 부가 넘었다. 이에 비해 매케인을 지지한 일간신문은 뉴욕 포스트, 보스턴 헤럴드를 비롯한 180개, 주간지는 32개였고, 일간지 발행부수 총계는 1천2백만 부에 가까웠다.
언론이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와 근거를 당당히 밝히면 독자들의 선택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은 물론이다.

글쓴이 / 김종철

-전 동아일보사 기자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전 연합뉴스 대표이사 사장
-현 재능대학교 초빙교수
- 평론으로 <상업주의소설론> 등, 저서로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1992)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1995), 역서로 <말콤 엑스>(공역,1978) <산업혁명사><프랑스혁명사>(1982) <인도의 발견> 등




조중동 찌라시를 보니 차라리 벼룩시장을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