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음서제도의 특징
(서프라이즈 / 눈뜬장님 / 2010-09-03)
이미 현대판 음서제도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단지 ‘서민’들이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아니면 “원래 빽으로 들어가는 일은 이전에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빽 없으면 바늘구멍’인 세상이 오고 있다.
행정고시로 5급 공무원을 선발하는 비율을 50%로 축소하고 외무고시를 폐지하고 외교 아카데미를 설립하겠다는 것을 보고 무지몽매한 서민들은 말한다. “시험 잘 봐서 고위 공무원 되는 사회보다는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 공무원들 너무 무능하다.”라고….
‘귀족’들이 본인 자식들 사다리 걷어차는 줄도 모르고 저런 소리나 하고 있다. 본인 자식들 문제만이 아니고 나라의 미래가 걸린 문제이긴 하다.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재선발은 맞는 방향이다. 이러한 명분은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어떻게 측정할 건데?” 이것이 항상 문제가 된다.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측정해서 우열을 가리기란 아주 어려운 문제다.
이번 유명환 외교부장관 딸의 특채 논란에서 보듯이 나쁘게 말하면 아무나 빽으로 선발해놓고 “얘가 개중에서 제일 적합한 인재다.” 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나름대로 ‘구색’은 맞추는 것이 현대판 음서제도의 특징이다. 대놓고 빽으로 들어가게 하진 않는다.
 |
▲ 박영선 언론개혁시민연대 대외협력국장이 3일 공개한 2009년 외교통상부 5급 사무관 특채 공고와 2010년도 외교통상부 5급 사무관 특채 공고문. 응시자격이 ‘변호사 또는 박사’에서 ‘박사’ 또는 ‘석사 + 관련분야 2년 경력’으로 완화됐다. ⓒ @happymedia |
이번 외교부 특채 요강을 보면 ‘유관기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을 것’ ‘학위’, 이 두 가지가 눈에 띈다. 합격자가 없었던 1차 말고 2차에서 적합자가 10명도 안 되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외교부 5급 특채에 10명도 지원을 안 하다니….
당연한 일이다.
‘유관기관’에서 근무한 경력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어찌 보면 저 요강에 따르면 유 장관의 딸이 특채에 합격하는 일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학위조건도 갖추었고 경력조건도 갖추었다.
바로 이런 식이다. 이제 감이 잡히시는가?
아무리 현대판 음서제도를 대놓고 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고위직이고 공직일수록 눈치가 보인단 말이다. 그래서 고안된 방법이 ‘단계적 음서제도’이다. 이것이 현대판 음서제도의 특징이다.
경력 첫 줄에 올릴만한 직위는 대부분 ‘인턴’이나 ‘임시계약직’ 따위의 ‘비정규직’으로 시작한다. 이런 것은 누가 빽으로 들어가도 그러려니 하고 또 떨어진 사람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별로 불만이 없다.
이번에도 유 장관 딸이 외교부 5급 공무원에 특채돼서 문제가 된 것일 뿐이지 예전에 그가 임시 계약직으로 외교부에 특채될 때는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이 정도는 빽이니 뭐니 해도 사람들이 적당히 눈감아준다는 말이다. ‘정규직’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이런 루트를 거친 다음에 ‘정규직’ 채용에서 “일 안 해본 사람은 경험 없으므로 안 뽑아” 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한 ‘단계적 음서제도’’라는 것이다.
교묘한 방법이다. 이런 줄도 모르고 공부 못 하는 자식 둔 서민들은 아직도 “경험이 중요하지 시험으로 어떻게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냐”며 맞는 말인데 틀린 말이나 하고 있다.
서민들아 ‘경험’이라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비단, 공직사회만 이런 판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학 입학사정관제는 다를까? 도대체 중고등학생이 사회에서 ‘다양한 경험’을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입시든 뭐든 “내가 이런 경험 했소” 하고 증명을 해내야 하는데, 이것은 항상 ‘구색’을 갖춰야 한단 말이다. 남보다 돋보이는 구색을 갖춘 ‘경력’을 보유하는 것은 서민들이 백방으로 뛰어봐야 ‘귀족’ 못 따라간다.
요약하자면 현대판 음서제도는 ‘다양한 경험과 경력’이라는 누구나 공감하는 요구조건을 내세워놓고 시험과 같은 객관성이 보장되는 제도는 비중을 줄인다. 그런 다음 빽도 연줄도 없어서 ‘인턴’도 못해본 사람들은 지원도 못 하게 만드는 좁은 관문을 만들어 놓는다.
물론 빽도 연줄도 없어도 ‘인턴’ 할 수 있다. 그러나 빽 있고 연줄 있는 자가 갖춘 ‘구색’만 하겠는가.
눈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