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당이 의심스럽다고… 나는 경향신문이 의심스럽다
(블로그 ‘Finding Echo’ / 虛虛 / 2010-10-13)
웃긴 일 하나. 이전에, 그러니까 호랑이가 곰방대에 솔담배 끼워 피던 시절에 조선일보가 북녘을 향해 “주민 굶겨 죽이고 인권 압살하는 김정일 정권 퇴진하라”고 사설로 데모 내지는 시위를 한 적이 있었드랬다.
문민정부 말기인 97년 6월 24일에 작성한 <김정일 물러나야>란 제하의 사설에서, KBS ‘일요 스페셜’이 방영한 이북의 참상이 실로 생지옥과 다름없다며, 국가경영을 잘못한 김정일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물러나라고 독설을 퍼부어댔던 거다.
그런데 이걸 왜 웃기다고 했나? 간단하다. 이 땅에서 군부독재가 횡행할 때 그를 비판하기는커녕 외려 권력에 편승해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기 바빴던 조선일보가 철조망 너머 북한 김정일 정권을 항해 마치 철 지난 민주화 투쟁이라도 해보겠다는 듯,
“이런 정권 또는 그 10분의 1만 닮은 정권이 만약 남한에 있었다면 운동권과 진보적 지식인과 일부 종교인들은 아마 벌써 ‘타도’를 외치고 분신소동들을 벌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같은 ‘정당성 없는 정권에 대한 퇴진 요구’의 보편타당성에 근거해서, 결코 ‘외국’일 수 없는 우리 땅 북녘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버린 김정일정권이 자의든 타의든 퇴진할 것을 요구한다.”
운운하며 꼴값을 떠는 모습이 같잖아서다. 남쪽의 독재자 앞에선 살랑살랑 개꼬리나 흔들어대고, “외국일 수 없는 그러나 외국과 다름없는”, 하여 벼라별 소리를 해도 끄떡없고 과격한 구호를 내질러도 잡혀갈 걱정 없는 북쪽의 독재자에게는 손가락질 발가락질 다 해가며 비난·성토하는 조선일보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면서 어찌 ‘웃음 아닌 웃음’(非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인류 보편의 휴머니티에 근거, 북한 김정일 정권을 다음과 같이 준열하게 꾸짖었다,
“굶는 사람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굶어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 떠도는 생지옥-- 이것이 김정일이 만들어 놓은 북의 현실이다…. 결론부터 앞세워 김정일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물러나야 한다….”
“남-북 간의 원만한 공식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는 그럴 수 없다 치더라도 시민운동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그리고 당연히 ‘주민 굶겨 죽이고 인권 압살하는 김정일정권 퇴진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고 우리는 믿는다….”
“왜 남한에 나쁜 정부가 나올 때만 분노해서 ‘타도’를 외치고 북에 나쁜 정부가 있을 때는 미소를 지으며 ‘덮어놓고 화해’만 역설해야 하는가?…”
시민운동 차원에서라도 김정일 정권을 격하게 규탄할 수밖에 없다는 조선일보의 올곧은(!) 태도에 박수가 절로 나오지 않나?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조선일보는 왜 이런 사설을 썼을까? 북한 김정일 정권이 복지나 인권과는 관계없는 최악의 독재정권이라는 건 지구인이 다 아는 주지의 사실인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 문제를 왜 물고 늘어지며 이렇듯 입에 거품을 문 걸까?
설마 북한 김정일이 조선일보의 꾸중을 듣고 뒤늦게 반성하거나 깨우칠 거라 생각해서? 아님, 조선일보의 사자후 한 방에 대경실색 혼비백산 얼이 빠지고 넋이 나가서 스스로 모든 공직을 때려치우고 퇴진할 거라 그리 생각해서?
천만의 말씀! 북한 김정일 정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입만 열면 떠들었던 게 조선일보다. ‘절대’란 말 밑에 빨간 줄 긋고 돼지꼬리 땡땡. 시간 나시는 분들은 조선일보 DB를 검색해 보시라. 그러면 일관되게 ‘북한 불변론’을 설파하고 있는 사설들을 부지기수로 대면할 수 있을 게다. 그런데 왜~?
물론 조선일보도 안다. 자기들이 멀리서 이런 식의 입바른 말을 지껄여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북한 주민의 삶의 질과 인권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그런데도 조선일보가 “생지옥” 운운하며 “인권 압살하는 김정일은 퇴진하라 퇴진하라 퇴진하라”고 생뚱맞은 시위(?)를 벌이고 나선 속내가 뭘까?
한 마디로, 북한을 자극해 보자는 거다. 모처럼 움트기 시작한 한반도 해빙무드에 찬물을 끼얹자는 거다. 화해 모드를 대결 모드로 돌리자는 거다. 남한에 나쁜 정부가 있을 때는 미소를 지으며 ‘덮어놓고 화합과 안정’만 역설하던 조선일보가 북한의 나쁜 정부만 보면 분노해서 ‘타도’를 외치는 이유를 이것 말고는 달리 상상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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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10월 1일자 사설 |
각설하고, 10년도 더 지난 옛날 꽃날의 일을 새삼스레 들춰내는 까닭인즉슨, 북한의 3대 세습을 둘러싸고 경향신문과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이 각을 세우고 있는 작금의 모양새가 그와 비슷해 보여서다.
민노당을 공격하는 측에 따르면,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한 민노당의 ‘무비판’ 논평이 문제라고 한다. 북한 권력세습이 나쁜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왜 비판하지 않느냐는 거다. 남들 다 하는 비판을 안 하는 걸 보니 그 정체가 의심스럽다는 말도 들린다.
숨이 턱 막힌다. 단지 자신들이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 딱지를 서슴없이 갖다 붙이는 야만적 현실이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슬퍼서다. 더구나 조선일보나 할 법한 이런 짓을 진보라 자임하는 경향신문이 주도하고 있음에랴.
대체 민노당이 잘못한 게 무언가? 북한 세습을 남들은 다 비판하는데 민노당만 비판하지 않았다고? 남들과 똑같이 말하지 않으면 욕먹어야 하나?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획일적 정답만 판치는 독재국가가 됐나? 북한 세습이 나쁜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아니냐고? 옳거니. 민노당이 북한 세습을 칭찬하거나 옹호하는 말을 단 한마디라도 한 적 있는가?
민노당은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우리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는 “우리 국민들의 보편적 정서나 현대 민주주의의 일반적 정신 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진보신당 논평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왜 민노당만 지탄받아야 하나? 민노당이 그 말 뒤에 덧붙인 것은 “남북관계를 위해서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 것밖에 없다. 이게 그렇게 잘못됐는가?
권력세습이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일이긴 하나 그건 어쨌든 북한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북한도 엄연히 주권을 가진 국가인 한, 우리가 나서서 감 뇌라 배 놔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우리가 그를 비난하고 욕한다 해서 북한이 세습을 포기할 것 같은가?
입바른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조선일보처럼 북한 인권을 걱정하는 척하며 “김정일은 퇴진하라”는 식의 아이디얼한 구호를 맘대로 내뱉을 수도 있고, 북한의 권력 세습에 분기탱천 온갖 욕설을 퍼부을 수도 있다. 조선일보가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리고 경향신문이 대답을 강요한다고 해서 민노당도 그래야 하나?
한반도 앞날을 걱정하는 정당이라면, 듣는 이들의 귀만 간지럽게 하는 립서비스나 감정적 배설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싫든 좋든 세습 이후의 북한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할 줄도 알아야 한다. 민노당이 북의 권력세습을 이해하기 어렵다면서도 비판의 말을 자제하고 삼가는 것도 필경 그 때문일 게다. 미운 짓 한다고 해서 등 돌리고 빠이 빠이 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지 않는가?
글을 맺기 전에 한 가지. 이 땅의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독재정권과 싸웠던 민주세력에게 조선일보가 야유 삼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우리 정부는 그렇게 비판하면서 북한의 독재정권은 왜 비판하지 않느냐는 말이 그거다. 지금 경향신문이 민노당에게 하고 있는 짓이 딱 그 짝 아닌가?
빨간 선글라스를 쓰면 모든 게 빨갛게 보이는 법이다. 경향신문은 민노당 더러 색깔을 분명히 하라고 다그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얼굴부터 거울에 비춰볼 일이다.
虛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