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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길을 모색하자

순수한 남자 2010. 12. 14. 10:27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길을 모색하자
번호 220512  글쓴이 스나이퍼 (kwonsw87)  조회 245  누리 52 (57-5, 1:7:0)  등록일 2010-12-14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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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길을 모색하자
(서프라이즈 / 스나이퍼 / 2010-12-14)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길을 모색하자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던 한나라당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동시에 장악한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 12월 8일 한나라당은 야당의 저지를 뚫고 2011년도 예산안을 단독 처리했다. 법정 시한인 12월 2일은 넘겼지만 ‘회기 내 예산안 통과’는 아주 드문 일이다.

그래서인지 한나라당의 김무성 원내대표는 “오랜 기간 되풀이됐던 악행을 넘어 예산안을 법이 정한 정기국회 기간 안에 처리해야 한다는 한나라당 의원과 국민 다수의 뜻을 모아 회기 내 처리했다”고 자평했다. 그리고 “우리 국민을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야당에서는 “날치기 통과된 예산안은 원천무효”, “4대강 예산안 날치기 폭거는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이 자행한 전대미문의 의회 유린 사태”라고 말한다. 야당에서는 전혀 ‘정의롭지 않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독재정권 타도’를 외칠 기세다. 장외투쟁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정도 되면 민주주의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가 파탄 났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수결 투표에 의하면 한나라당이 할 수 없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모든 의사결정을 다수결에 의해서만 처리한다면 지금 한국은 ‘북한 공산당의 일당 독재’와 다를 바가 없고, 야당은 존재 자체가 필요치도 않은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정의’에 대한 생각이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해결 방법은 없을까?

▲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의화 국회부의장이 2011년 예산안을 강행처리를 시도하자, 민주당과 야당 의원들이 단상을 에워싸고 4대강 예산 전액 삭감과 민생 복지 예산 확보를 요구하며 항의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4대강 사업이 뭐길래

이번 예산안의 핵심 쟁점은 역시 ‘4대강 예산’이다. 그런데 예산에는 4대강 예산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4대강 예산 문제 하나 때문에 다른 예산에 대한 심의와 협상은 사라져버렸다.

대표적으로 ‘방학 중 결식아동 급식’ 예산은 전액 삭감됐다. 지난해에는 2008년에 541억 원이었던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가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자 절반 수준인 285억 원을 편성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마저도 몽땅 없어졌다.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전국의 결식아동은 내년부터는 방학 중에 굶게 생겼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번 국회에서는 예산안뿐만 아니라 24개 법률안도 함께 통과됐다. 4대강 사업 관련 법안인 ‘친수구역 활용에 관한 특별법안’(친수법)과 아랍에미리트(UAE) 파병 동의안, 서울대 법인화를 위한 법안,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대한 채무를 정부가 지급보증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법 일부개정법률안’도 통과했다.

거론한 법률안 하나하나가 많은 토론주제를 담고 있다. 그러나 토론은 사라졌고, 오직 표결만 존재했다. 국민들은 이 법률안 통과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남아 있는 잔상은 ‘몸싸움 국회’, ‘패싸움 국회’, ‘난장판 국회’뿐이다. 그리고 어김없는 양비론이다.


All or Nothing, 승자독식의 게임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역시 문제는 ‘4대강 사업’에 있다. 이 사업의 출발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운하 공약’에서부터다. 그리고 대운하 공약을 내건 이명박 씨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을 추진할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수의 국민들이 반대한다. 4대 종단이 나서고, 지식인들이 나서고, 국민들이 나서서 반대한다. 그래서 대운하를 포기하고 ‘4대강 유역의 보 설치와 준설’로 나름대로 ‘축소’해서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

사실 이 대통령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대운하’야말로 이 대통령의 간판 공약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나름대로는 국가발전을 고민한 공약이었고, 야당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으니 당연히 추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지 말라니!”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속이 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대운하’는 포기하고 4대강 유역을 정비하여 홍수와 가뭄을 방지하겠다는 목적으로 대형 보를 설치하고, 하천을 준설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사업’에 대한 의견은 단 두 개만이 존재한다. ‘강행’이냐, ‘저지’냐가 그것이다. 타협점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앞세워 강행을 선택했고, 야당은 모든 걸 잃었다. All or Nothing, 승자독식의 게임이 되어버린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디로 갔을까? 여기서부터 출발점으로 삼아 민주주의를 이야기해본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정부가 자본주의 경제체제 성장만을 강조하는 조건에 대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대해, 무지하고 선입견에 가득 찬 대중의 변덕에 대해 지나치게 너그러울 때, 흔히 정치 공동체의 삶의 질은 추락하곤 한다. 정치적 삶에 해를 끼치는 행위에 맞서기 위해, 정치 공동체 내의 거주민들과 통치자들은 거버넌스를 인도해 줄 정치적 원리들을 숙고하고, 이런 원칙들과 부합하는 정치 구조와 과정을 개발하며, 적절한 정책과 방침을 제정하라는 요청을 받곤 한다.” - 폴 슈메이커의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53쪽

요즘 읽고 있는 책에 나오는 문구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한국 정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적절한 발언이 아닐까 해서 소개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예산안 단독처리를 보면서 비분강개를 느끼는 사람이 많을 듯하다. 그러나 비분강개를 넘어서서 이런 갈등을 관리할 방안에 대한 모색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붙잡고 이야기를 펼쳐보려 한다.

오늘날 대다수 문명국가는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에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흔히들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말한다. 그래서 국민이 주인이 되기 위한 절차와 방식으로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를 적절히 혼용한다. 이것은 무엇을 위한 절차일까? 의사결정을 위한 방식과 절차다. 의사결정은 왜 필요한가? 서로 다른 생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숫자만큼이나 다른 생각이 존재한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존재한다. 그래서 정치는 갈등을 해결하는 장치다.

공동체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도 갈등이 존재하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대화를 하고, 타협을 하고, 양보를 하고, 합의를 한다. 이게 정치다. 폭력적인 아버지가 힘으로 갈등을 해소한다면 그것이 바로 독재다.

그렇다고 갈등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도 위험하다. 갈등이 없는 세상은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고, 그런 세상에는 침묵만이 흐를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원했던 세상이 그런 세상이었고,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도 갈등이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어떤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아예 말을 못하게 하거나,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독재다. 독재라는 것이 별것 아니다. 이런 게 독재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의 예산안 단독 처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에 부합하는가? 아닌가? 형식적인 다수결 절차를 밟았다면 헌법에 합치하는 것인가? 아닌가? 독재라고 할 수 있는가? 잘 모르겠다. 내 관점에서는 독재가 분명한데,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정의”라고 하니까 독재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다수결 민주주의

한국 사회만큼 ‘민주주의=다수결’로 오해하는 나라도 없을 것 같다. 사실 이런 오해는 어쩌면 당연하다. 실제로 국민들이 각종 언론을 통해 접하는 법안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다수결로 처리하는 법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이번 예산안 처리를 ‘정의’라고 말했던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정의’도 ‘다수결’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국회에서 처리하는 숱한 법안은 대부분 당정 간 ‘협의’, 그리고 여야 간 ‘합의’에 의해 처리된다. 정확하게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이번 예산안 처리처럼 극명하게 대립하는 법안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법률안은 여야 합의에 의해서 처리된다. 표결은 그것을 확인하는 절차에 그친다.

결국 민주주의의 핵심은 ‘합의’에 있지 ‘다수결’에 있지 않다. 다수결은 어디까지나 보충적인 것이다. 다수결로 결정했으니 민주적이라고 강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수적 우위를 앞세운 다수결은 엘리트주의로 흐를 수도, 대중독재로 흐를 수도 있다. 그래서 토크빌 등 많은 철학자들이 ‘민주주의 독재’를 염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참여정부 당시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싸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치할 때 소위 진보진영에서도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외쳤고, 다수결에 의한 표결처리를 주장했었다. 그런 진보진영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김원기 당시 국회의장이 숱한 욕을 먹었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대신 대체법안을 내놓고 야당과 타협하자는 목소리는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무엇이 다를까? 국가보안법은 나쁜 것이니까 다수결로 밀어붙여서 폐지해도 되고, 4대강도 나쁜 것이니까 다수결로 밀어붙여서는 안된다는 것일까? 왜 하나는 다수결로 처리해도 되고, 다른 하나는 다수결로 해도 안 되는 것일까?

나는 지금 두 개의 사안이 똑같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모든 사안을 선과 악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 정도에서 화가 날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참아주기 바란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개의 사안은 현상은 동일하다. 다만 다수결을 강행하는 당사자만 바뀐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다수결을 강행하지 않았고, 한나라당은 다수결을 강행했다. 그래서 열린우리당은 무능하다는 평가가 회자되고 있고, 한나라당은 유능하다는 평가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패턴이 지속되면 우리나라는 국회가 없어도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수결로 모든 걸 처리한다면 야당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가 발표되는 날, 특정 정당이나 연합세력이 과반수를 획득하는 순간 소수 야당은 존재의미를 상실한다. 한나라당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다수결 민주주의’에 의하면 말이다.

사실 이 정도에 이르면 한나라당은 미래를 걱정해야 한다. ‘다수결 민주주의’를 토대로 3년 연속 예산안 강행처리, 그리고 미디어법 등 숱한 법률안 날치기했던 업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날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2012년 4월 이후에 한나라당이 다수결을 앞세워 통과시켰던 모든 법률안이 다수결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 정도가 되면 거의 ‘죽느냐’, ‘사느냐’의 사생결단의 싸움이다. 그리고 실제로 ‘4대강 사업’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는 사생결단의 싸움을 하고 있다. 그 싸움에서 한나라당이 3년 연속 승리를 거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다수결로 밀어붙였던 국회의원들의 임기는 대통령보다 더 얼마 남지 않았다. 숫자를 앞세운 강행 처리가 영원한 승리가 될 것인가?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사회를 위하여

나는 민주주의를 ‘합의’로 이해하는 사람이다. 합의는 갈등을 녹여내고, 평화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다수결이라는 형식적 절차에 의한 민주주의는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다.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증오와 복수심만 남긴다. 지금 한국이 그렇다.

어디서 매듭을 끊어야 할까? 사실 증오와 복수의 정치를 넘어서는 것은 힘을 가진 사람이나 세력에서 화해를 요청해야 가능하다. 나처럼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모인 야당이 이런 매듭을 끊어보자고 대화와 타협을 외쳐봐야 별 소용이 없다. 나는 힘이 없고, 내가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앞세운 한나라당에 완벽하게 패배했으니 말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이요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라고 볼테르가 말했다고 하는데,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원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무기력일 수 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가 그렇게 가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장차 살아갈 이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합의가 가능한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 사회는 어떤 시민들이 존재하는가? 어떤 정치가 존재하는가?

너무 뻔한 이야기이지만 대화와 타협, 양보와 절제, 관용과 승복이 존재하는 곳에 합의가 존재한다. 나의 주장을 모두 관철시키려 하는 한 합의는 불가능하다. 서로 다른 생각이 부딪치는 곳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을 힘으로, 다수결로,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독재에 가깝고, 대화와 타협, 양보와 절제, 그리고 관용과 승복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민주주의에 가깝다.

이런 관념적인 생각들을 제도화하는 것이 정치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고 착하다면 법도 필요 없고, 제도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법률을 만들고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역사를 복기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다수를 앞세운 한나라당에 번번이 당하고만 있는 야당 정치인들과 그 지지자들이 반성과 함께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 이야기의 근거와 출처는 평소 존경하는 유학생수학도님의 블러그(http://bomber0.byus.net/)를 참조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공공기관의 갈등관리에 관한 법률안’이라는 것을 추진했는데 그 경과는 이렇다.

지속가능발전위원회는 2004년 2월 12일 국정과제회의 보고를 출발점으로 하여 갈등관리시스템 구축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수행하였다. 우선 갈등관리기본법 준비팀을 2004년 3월부터 가동하여 2004년 9월에 법 초안을 대통령께 서면으로 보고하였고, 10월에 이 법의 제정 업무를 입법 주관부처인 국무조정실로 이관하였다. 국무총리실은 이 법을 더 다듬어서 2005년 5월 27일 국회에 제출하였다. 법안에는 갈등영향분석제도, 참여적 의사결정 기법, 갈등관리위원회1의 설치, 갈등조정회의의 운영 등 공공갈등 관리를 위한 새로운 제도와 기구들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갈등관리지원센터의 설치 근거도 마련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이 법안은 참여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갈등관리시스템의 주요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1-06 공공갈등관리시스템 구축

그렇다면 이 법률안은 어떻게 되었을까? 유감스럽게도 2005년 5월 27일 국회에 제출된 이 법안은, 국회에서 관심을 받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결국 2008년 5월 29일 17대 국회의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었다.

정치는 갈등을 관리하는 영역이다. 우리는 그동안 국회에서의 여야 간 합의나 다수결로 갈등을 관리하기도, 덮어버리기도,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3년 연속 다수결에 의한 예산안 강행처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행동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 제도와 법률이다. 제도와 법률로 합의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것이 자동 폐기된 갈등관리법의 취지였던 것이다.

참여정부는 ‘위원회 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그 위원회는 왜 존재했을까? 바로 국회에서 정치가 실종됐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회적 갈등을 해결해야 할 국회가 그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청와대가 직접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서 위원회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각 위원회를 통해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정부제출 법률안에 녹여냈었다. 이 정도 되면 한나라당의 날치기를 비판함과 동시에 야당 스스로의 반성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정권이 바뀌고 3년 동안 우리가 봐왔던 패턴은 이것이다.

▪ 여당의 직권상정
▪ 야당의 물리력을 동원한 의사진행 저지
▪ 여당의 다수결 강행 및 단독 처리
▪ 야당의 헌법소원

언제까지 이런 패턴을 반복할 것인지 정말 두렵다. 어쩌면 2012년 이후에도 계속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정치는 환멸의 대상이 되고, 그런 정치는 소수의 귀족정치로 변질될지도 모른다. 이걸 막기 위해서라도 무엇인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좋은 정치를 만드는 주체는 국민이다. 사실 ‘패싸움’이니, ‘몸싸움’이니 하면서 국회를 욕하지만, 국회의원들을 그렇게 몰고 간 것은 국민들이다.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지지자들에게 충성을 다했다. 럭비 선수 출신이라는 한나라당의 김성회 의원은 막강한 괴력으로 야당 국회의원들을 힘으로 눌렀고, 조선일보는 이런 김 의원을 칭찬하고 나섰다. 지지세력에게 충성한 보람으로 느낄만하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지지자들의 뜻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온몸을 바쳐, 피를 흘려가며 의장석을 점거하고, 그리고 끌려나왔다. 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해 지지자들에게 욕을 먹는 듯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런 숫자로 한나라당을 막아내라고 주문하는 지지자들이 잔인한 것 아닌가?

한국 사회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그 수준은 바로 우리 국민들 수준의 총합이라고.


2011년 예산을 다시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4대강 사업에 반대한다. 그러나 전면적인 반대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치수와 치산은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기아와 질병, 재해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생명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 중의 하나가 치산과 치수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4대강 사업 가운데 치수사업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 부분은 있을 것 같다. 이전 정부에서도 진행했던 사업은 있을 테니 말이다.

4대강 사업 가운데서도 핵심 쟁점만 따로 떼어내서 협상할 수는 없는 걸까? 예컨대 대규모 보 설치와 준설작업이 그렇다. 그리고 대통령이 선거공약까지 내걸어서 당선된 마당에 사업 전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시범사업 수준에서 합의는 불가능했을까? 물론 지금의 한나라당을 보면 맥없는 소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현재 진행 중인 보 건설 가운데 4대강 각 유역별로 시범적으로 몇 개의 보를 설치하는 것으로 합의를 하고, 나머지는 대형 보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한 이후에 하는 방식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한나라당이 어떤 정당인데,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르지만, 상대방을 항상 나쁜 의도를 가진 집단으로만 보고 접근하기보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모색해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의식이다. 자꾸 대화를 시도하는 노력은 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내 생각이 한심하고, 한가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각자 생각이 있으니 말이다.

이번 예산안 통과만 해도 그렇다. 과연 물리적으로 한나라당의 단독 처리를 끝까지 막아낼 수는 있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대통령 탄핵이라는 엄중한 사안도 막아내지 못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약 완전하게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4대강 예산을 타협지점으로 하여 결식아동 급식이라든지 다른 복지예산과 교환하는 것은 나쁜 선택인가?

또 있다. 어차피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면 4대강 예산을 받아주는 대신 다른 법률안이라도 합리적인 수준에서 조정할 수는 없었을까? 근본적인 질문은 이렇다. 4대강 사업은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이기고, 다른 한쪽이 일방적으로 패배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은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물론, 그 지지자들 전체에게 묻는 질문이다.

얼마 되지 않은 과거로 돌아가 보자. 충북의 이시종 지사의 경우 국회의원 시절부터 4대강 사업에 분리대응을 주장했다. 즉 대규모 보나 준설(이수사업)에는 반대하지만 치수사업은 찬성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당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4대강 사업 계획을 보면 충북에는 대규모 보나 준설계획이 없다. 충북은 남한강 상류 일부 지역에서 준설이 있고, 농업용 수자원 확보를 위한 저수지 둑을 높이는 사업이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조차도 검증위원회의 의견을 바탕으로 충북도의 입장을 정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 지사의 처신은 합리적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명확하게’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는 시원한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지사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아야 했다. 쉽게 말해서 졸지에 배신자가 된 것이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어떨까? 안 지사 역시 지역사회의 의견을 모아서 입장을 정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어가려다가 4대강 사업에 찬성하는 것으로 매도당하기도 했고, ‘찬성 or 반대’라는 선명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회색주의자’로 비치기도 했다.

4대강을 추진하는 쪽이 승자독식의 구도를 만들기는 했다. 나는 지금 이명박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책임을 묻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민주주의를 지향가치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우리 사회의 갈등을 풀어가는 더 나은 방식을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지루하지만 민주주의라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진보진영의 과제

3년 연속 벌어지는 힘으로 예산과 법안을 처리하는 모습은 참담한 수준의 한국 민주주의를 증명하는 역사로 남을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발의 당시에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에 물리력으로 저지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하는데, 나 역시 그런 주문을 하고 싶다. 이미 지나간 버스에 손 흔드는 격이지만, 앞으로 있을 각종 법률심사나 예산안 처리에 있어서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수적 우위를 앞세운 다수결 민주주의를 관철하려 한다면, 그냥 당해주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국민들에게 똑똑히 보여주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물리력으로 의사진행을 저지하고, 그 과정에서 몸싸움 벌이는 모습은 이제 그만 보여주는 게 낫지 않을까? 양비론으로 매도당하느니, 처절하게 당해주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다수결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지는 것 역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수준임을 우리 다 함께 목격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끝까지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혹자들은 나약한 생각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2012년 이후, 여야가 뒤바뀌는 날이 온다면?


※ 지난 12월 9일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에 기고한 칼럼 ☜ 입니다.

 

스나이퍼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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