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 미선효순 5주기①] 청소년, 미국과 맞짱뜨다
자칫 묻힐 뻔한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을 세상에 알린 것은 바로 청소년이었다. 이후 ‘평등한 한미관계를 만들자’고 까지 외치게 한 ‘두 여중생 진상규명 투쟁’의 주역 역시 청소년이었다. 이 투쟁을 계기로 청소년은 한국사회를 바꾸는 주요 세력으로 떠올랐다. 미성숙한 존재로만 불리던 청소년이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는 미국과 맞짱뜨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관심없던 두 여중생의 죽음, 청소년이 가장 먼저 알리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02년 6월 13일, 친구 생일잔치를 가던 심미선, 신효순(당시 중2)양이 미군장갑차에 치여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갓길을 걷던 두 여중생은 뒤에서 덮친 50톤 짜리 미군 장갑차에 전신 뼈마디가 으깨졌고, 그 자리에서 바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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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두 여중생의 죽음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는 월드컵이 한창이었고, 사람들은 ‘두 여중생이 죽었다’, ‘얼마나 처참하게 죽었느냐’ 보다는 ‘우리나라의 월드컵 성적’에만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달랐다. 청소년은 두 여중생의 죽음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겼고, 두 여중생의 ‘한’을 풀어야한다고 생각했다.
20일, 의정부시에 있는 미2사단 앞에서 ‘여중생 장갑차 살인만행 주한미군 규탄대회’가 열리자, 의정부 여고생들이 가장 먼저 달려갔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미국의 사과를 요구했지만, 주한미군은 사과는커녕 무장을 한 채, 오히려 국민들을 경계했다. 우리나라 경찰들 역시 미군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미군기지에서 쫓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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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2사단 앞에서 주한미군 규탄대회가 열리자, 의정부 여고생들이 가장 먼저 달려갔다. 대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주한미군의 처벌'을 외친 청소년의 모습은 월드컵 때문에 미순이, 효순이 사고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의 양심을 찔렀다. ⓒ 민중의소리 |
"청소년 참여를 막아라" 2002년 7월 31일 여중생 신효순, 심미선양의 49재를 앞둔 26일 경기도 교육청은 "학생들에 대한 생활지도를 강화하여 집회 참여를 최소하하는 한편, 일부 성인들의 학생 선동이 이뤄지지 않도록 교육적 차원에서 안전을 가해주기 바란다"는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이같은 공문에도 49재에는 많은 청소년이 참석했다. 공문 한장으로는 두 여중생 사건의 진상규명과 주한미군 처벌을 위한 청소년의 활동을 막을 수 없었다.
두 여중생을 위한 투쟁에 청소년들이 나서자, 교육청에서는 청소년의 참여를 제지하는데 급급했다.
의정부 여고생의 눈물, 여중생 투쟁의 시작
이 광경을 낱낱이 지켜보던 의정부 여고생들은 눈물을 흘렸다. “미선이 효순이를 살려내라”, “여기는 우리 땅이에요. 근데 왜 우리가 쫓겨나는 건가요?”, “경찰 아저씨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한국이에요? 미국이에요?”
의정부 여고생들의 눈물은 두 여중생의 죽음을 모른 채, 월드컵에만 관심 갖던 사람들의 양심을 찔렀다.
청소년은 바로 두 여중생의 죽음을 해결하기 위한 청소년 대책위를 결성했다. 청소년 대책위는 ‘안티 U.S ARMY(www.no-usarmy.wo.to)’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7월 한 달 동안만 2만 여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후 청소년대책위는 두 차례 청소년 행동의 날을 개최하는 등 두 여중생 죽음 진상규명과 미국의 사과를 받아내는 이 투쟁의 중심에 섰다.
▲청소년 1차 행동의날, 이날 500여명의 청소년은 의정부에 모여 주한미군의 사과를 촉구했다
ⓒ 민중의소리
여중생 투쟁을 이끈 청소년 대책위
먼저 7월 17일, 의정부에서 청소년 행동의 날을 열었다. 이날 청소년들은 의정부까지 가는 지하철을 탄 순간에도 시민들에게 ‘억울한 여중생의 한을 풀기 위해 함께하자’고 호소했다. 지하철 안에는 한 줄로 서서 장갑차 사고의 진실을 알리는 청소년과 이 청소년들을 막으려는 지하철 관계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래도 청소년은 그만두지 않았다. 쫓기면서도 외쳤다. “두 여중생이 장갑차에 치여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아저씨, 아줌마. 미선이와 효순이는 여러분의 딸입니다 청소년 여러분, 미선이와 효순이는 여러분의 언니이자, 동생입니다.”
청소년들은 이후에도 상황 변화에 따라 발빠른 대응을 했다. 장갑차를 몰던 가해 미군을 한국의 재판장에 세우는 문제,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SOFA)를 개정하는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미군법정에서 가해 미군인 마크워커와 페르난도 니노가 무죄 처리를 받자, 청소년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청소년은 바로 11월 23일 용산 미군기지 앞에서 2차 행동의 날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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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2차 행동의날에서 청소년은 '주한미군 처벌; 'SOFA 개정' 등을 외쳤다. 이 자리에서는 주한미군을 한국 법정에 세우지 못하는 한국 정부에 울분을 토하는 말들이 많이 나왔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
“살인 미군 처벌하라”, “살인 미군을 한국 법정에 세우자”, “주한미군이 죄가 없다면 장갑차 바퀴가 책임지란 소리인가”, “내가 미군을 죽이고 재판에서도 무죄를 받겠는가”
2차 청소년 행동의날 결의문 우리는 이 사기 재판극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 하기는 커녕 반성하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우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주한미군은 이 땅에서 떠나라!!! 우리는 미래의 주인으로서, 이 땅에서 우리의 주권을 지킬 낼 것이다. 이에 우리는 다음의 행동지침을 준수할 것을 결의하고, 요구사항을 표명하는 것이다. 하나- 우리는 청소년이 미래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청소년의 힘으로 사건의 진실을 밝혀 낼 것을 다짐한다. 하나- 우리는 선전전을 통해 사건을 알리고, 서명운동과 버튼 달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 할 것을 다짐한다. |
이날 모인 청소년 수만 1,000명이 넘었다. 학생회 활동을 하는 청소년, 동아리 활동을 하는 청소년, 청소년 단체에서 활동하는 청소년,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을 가만 지켜볼 수 없는 청소년이 모였다.
2차 행동의 날 이후, 청소년의 외침은 전 국민으로 퍼졌다. 청소년들이 앞장서서 미국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 국민들, 두 여중생을 죽게 한 주한미군을 처벌하지 못하는 정부에 대해 실망한 국민들, 두 여중생을 죽게 하고도 이렇다 할 사과를 하지 않는 미국 정부에 분노한 국민들은 초를 들고 광화문으로 모였다.
청소년, 미국과 맞짱뜨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사과를 받아내고, 주한미군의 처벌을 받아내는 여중생 투쟁은 본 궤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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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중생 사건 해결을 위해 청소년들이 나서자, 이 모습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광화문, 시청으로 모여 여중생 문제 해결을 위한 촛불시위에 참여했다 ⓒ 사진작가 이용남 |
100만이 넘는 서명운동, 두 미군의 무죄판결 이후 폭발한 촛불시위, 전국 해외 100여 곳에서 8차례나 진행한 자주평화 촛불행진 등 한미관계를 평등하게 만드려는 한 가운데엔, 두 여중생의 죽음을 가만 지켜볼 수 없었던 청소년이 있었던 것이다.
/ 정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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