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친일 사진전(계속 추가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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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보통학교 교사였던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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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학교 불량 선생님이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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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군관학교 제2기 예과 합격자 공지문.
조선인이 천황에 대한 확실한 충성의 확증없이 입학이 가능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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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정희의 동료였던 분이 소장한 졸업앨범속의 박정희.
☜손가락이 가리킨 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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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만주육군군관학교의 박정희생도.
☜왼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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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몇 수십배, 아니 죽음을 무릅쓴 "충성"을 보여야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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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은 이렇게 무참히 소탕.도륙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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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중인 일본군.
박정희는 하늘에서 별따기보다 어려운 조선인으로서 군관이요, 소대.지휘관이었다.
일본군이 짐승 쯤으로 여긴 식민노예 조센징에게 누가 지휘권과 무기를 함부로 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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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중인 일본군.
바로 이렇게 일본군 소대장 박정희는 독립군을 토벌.몰살하였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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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을 향해 박격포를 발사하는 일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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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총을 겨누며 숲을 수색하는 일본군.
�기던 독립군이 이 음습한 갈대숲에서 걸리면 어찌 되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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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힌 적 독립군을 총과 칼로 도륙하는 일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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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결 사형중인 일본군.
아! 독립투사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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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중인 일본군.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박정희는 이렇게 행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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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문을 통과중인 일본군.
조선인 박정희가 철천지 원수같은 일본군 동료사이에 끼어 행진한다 함은 일제의 폭압 서슬이 시퍼렇던 그 당시로선 도대체 무슨의미인가?
도대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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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시민에게 답례하는 일본군.
언제나 대검을 장착한 저 무시무시한 착검소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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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을 소탕하러 가는 일본군.
마치
"독립운동하지마! 3족이 다 죽인다!" 라고 암시하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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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을 높이 치켜들고 '천황폐하만세'를 외치는 일본군.
박정희는 어디에 박혀 있어 "우리천황페하 천천세 만만세!" 하며 목놓아 외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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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이렇게 천황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유별나지 않았던들 과연????
과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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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3월23일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는 박정희. 수석졸업했다. "수석"이다! 이것이 문제다.
도대체 얼마나 충성과 천황공부를 죽도록 했기에... 누구는 죽도록 조국독립을 위해 마지막 피까지 다 흘리고 누구는 죽도록 출세를 위해 원수의 편에 섯는가? 그래서 대표로 나와 천황폐하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내용이 담긴 졸업사를 낭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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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천황의 맹충성견 일본군 그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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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학교는 하위권,
천황 충성공부는 만주군관학교 수석, 그리고 일본육사 3등...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독립투사 섬멸은 몇등? |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한 명백한 증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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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만주군관학교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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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가 다행히 남아있다.
만주국 정부공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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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배속된 독립군토벌사상 악명높았던 '제8군보병부대'의 주 전투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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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의 '반벽산' 부근에서 주로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저 땅에 그 얼마나 많은 조선의 젊은 독립투사들이 박정희를 포함한 일본군의 총.칼에 쓰러져 이름도 없이 영광도 없이 묻히었는가?
오! 원통하도다! 독립투사들이여!
이름도 없이 저 차디찬 땅에서 원혼이 되어 떠도누나!
누구는 친일하여 지금까지 영광의 이름이 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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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전투에 나간 증거를 보이는 증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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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늙어보이는 손가락이 증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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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의 내력을 설명하는 증인.
하나하나 조사해서 쓴 귀중한 증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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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통치와 내막-만주국 관원의 공술.
당시만해도 만주는 우리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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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당안관-만주국기록보존소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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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류뷴필공이 제공한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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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4월 1일부터 12월 1일까지 박정희는 만주 '제6관구 혼성 제7여단'에 배속 되었다.
"보병 제8단은 열하성 청룡현 서남부 반벽산 지역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고 있었다"라고 명백히 기록 돼 있다.
당시 단장은 '양숭무'였다.
------------------------------------- |"보병 제8단은 열하성 청룡현 서남부 반벽산| |지역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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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개편이 있었다.
"보병제8단은 계속해서 열하성에서 독립군 토벌을 계속했다"라고 명백히 기록 돼 있다.
단장은 '당체영'이었다. |
증인과 증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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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지엔중-박정희와 동기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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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동안 쭉 같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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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어떻게 생활했는가? :"일본인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천황의 가미가재병들과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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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과 전혀 다르지 않게 생활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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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 '박창욱'교수가 이를 학문적자료와 함께 증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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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43년에 독립군 토벌을 시작하여 45년 해방까지 거기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며 있었다.
수많은 전투와 독립군 사살이 있었다.
무기와 군수.숫자에서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열악했던 불쌍한 우리의 독립.광복군!
누구는 우리를 적에 앞장서 죽이고 누구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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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독립군 토벌할 때는 일본이 발악을 할 때로 독립군 토벌이 가장 가혹했다.'고 증언한다. |
박정희의 빨갱이, 좌익활동 그리고 대배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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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46년.
박정희의 좌익 자술서:이재복(李在福)이 <공산당 선언> 등의 책자를 주자 남로당 가입.
군부내 좌익 숙군을 통해 전군의 5% 정도인 4천7백여명이 처벌을 받았고, 그 중 수백명이 총살 또는 징역에 처해졌다.
총살이나 무기징역이 분명한 박정희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박정희는 자신이 몸담던 군부 내 남로당 조직 명단을 다 불어, 남로당 동료들을 대대적으로 배신해 버렸다.
오로지 혼자 살아 남았다. |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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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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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군사반란.대역적질(친일파가 요직을 완전 싹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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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친일파들의 권력이 흔들릴 조짐이 일자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동기들을 모아 역적모의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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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명령체계를 무시하고 부대를 이탈, 서울에 난입한 박정희.
반란 방식과 기술은 만주일본군관학교에서 배운 바대로 했다. 시민과 진압군을 무자비하게 압살하고,언론과 국회,시민단체,정치인...등 싸그리 탱크로.... 그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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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 질린 서울 시민들:
시내에서 탱크소리가 들린다. 옆집 콩볶는 소린가?
윤보선대통령.장면내각은 꼭 존속되어야했다. 모든 상처와 고통은 절단에서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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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선글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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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타도의 젊은 피는 모두 입에 재갈을 물리고 야당 정치인,바른언론,시민단체... 모두 총.칼.탱크로 압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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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역적질 후에 친일파 동기들을 싸그리 자신의 왼쪽 오른쪽에 앉힌다.
제5군단장에 :친일분자 박임항 해병대 제1사단장에 :친일분자 김동하
지금우리가 겪는 이 치가 떨리는 분열의 고통은 '독립운동가는 3대가 멸'하고 '친일파는 나라의 모든 권력.부를 다 차지'한 이 세계유일무이의 괴이변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선 후손에게 아무리 정의를 말해도 소용없다.
지금도 우리의 살을 에고 피를 말리는 반목과 분열.자기모순의 '뿌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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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균참모총장에:친일분자 이주일 해병여단장에:친일분자 김윤근
나라의 정체성은 이렇게 아작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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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에:친일분자 윤태일 육군중장에:친일분자 강문봉
부패와 패거리, 친일, 군사문화의 지속연장...
그 누가 말하는 나라의 '정체성'이란 바로 이것이다.
이 더러운 오욕과 기득권을 영원히 길이길이 보존하자는 것, 건들면 잼 없다는 것.
이것이 그들의 정체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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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관학교에서의 친일교육이 바로 5.16의 배력이라고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껍질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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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MBC-PD수첩 "친일파는 살아있다-4"를 캡춰한 것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