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정희가 왜 갑자기 반공주의자가 되었을까?!
일제때 소학교 선생질을 하던 박 정희가 스스로 멸사봉공(滅私奉公)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혈서를 쓰고 일본의 장교가 되어 110회의 독립군 토벌을 하여 많은 공을 세우던 그가 일제가 패망하자 크나큰 낭패가 맛보아야 했다.
왜냐하면 출세의 바탕 자체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일제의 소학교 선생-일본군 장교(독립군 토벌)-광복군으로 위장(국내입국)-남노당 군사총책-여순반란에서 좌익수로 사형수-군사반란 두목-반공주의자
세상이 달라지자 쨉싸게 패망후 광복군으로 변신, 국내에 들어 왔으나 좌익에 우세하던 해방정국에서 자신의 3째형 박 상희의 동생이라는 신뢰상 남노당 군사총책이 된다.
그러나 한반도 남쪽을 장악하고 있던 박 정희의 좌익경력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계속 받아야 했다. 말하자면 좌익 콤프렉스다.
미국이 한국에 계속 박 정희를 예편시키라는 압력을 받아야 했고 여순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대전 형무소에 구속되었을 때 그가 신문했던 육군본부 첩보과장이던 김 모씨는
“박 정희가 사형을 받은 처지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까지 파악조차 안됐던 군내의 좌익계의 조직표를 그려서 수사관에 넘겨준 탓에 살아날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당시 군사고문단 하우스는 이 승만에게 박 정희를 살려내야 한다고 직접 요구했다. 박 정희의 밀고로 군내의 좌익계 군인 4700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자신이 좌익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는 1961. 5.16 혁명공약 제1조는
“형식과 구호에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고 미국을 향하여 나는 빨갱이가 아니라고 외친 것이다.
그리고 집권한 후 반공법을 만들어 막걸리 한잔 마시고 떠들다가도 기관에 잡혀가서 소위 막걸리 반공법으로 단속되어 징역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박 정희는 자신이 반공주의자로 보일 필요 때문에 인혁당 사건을 고문으로 조작했고
그야말로 엄청난 무고한 민주화 운동권 사람들이나 순진한 사람들에게 빨갱이란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가두고 죽이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가장 악질적인 민족반역자였으나
이 땅의 무지하고 세뇌된 인간들은 그를 존경한다고 하니 그들에게는 독재자가 더욱 어울리는 지도자가 아닌가!!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미국 상전에게 과시하기 위하여, 빨갱이가 있어야 단속을 하여 반공을 과시할 터인데 한반도 남쪽에는 그 빨갱이 씨가 아예 말라 없었다.
정말 이 땅에는 진보주의자도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에서 사라져 버렸고
빨갱이는 아예 없었다.
없으니 빨갱이를 만들기 위하여 고문이 필요했다.
가장 악질적인 친일 민족반역자- 다가키 마사오-박 정희가 대중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으며 세뇌된 사람들은 그를 신처럼 떠받드는 상황에서 일본놈들은 한반도 남쪽은 얼마든지 집어 먹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독도를 왜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가.
전쟁의 빌미를 만들어 전쟁을 하여 자신들이 빼앗긴 영토-한반도, 대만,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영토분쟁은 전쟁밖에 없다.
아래 일본 중학교 사회과 지리부도를 참고하기 바란다.
친일청산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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