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와 글

첫사랑

순수한 남자 2008. 8. 18. 00:28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그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깍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깍아댔다.

(박남철,「첫사랑」,『地上의 人間』, 문학과지성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