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노조위원장님, 마스크 좀 쓰고 다니시죠
- 기자와 PD들의 탄식, 우리도 얼굴 못 들고 다닌다
(서프라이즈 / 이기명 / 2009-01-31)
"선배님. 죽겠습니다. 모두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집 사람도 아무 말 안 합니다. 친구들하고도 안 만납니다. 며칠 전 술 한 잔 했는데 그러더군요. 자긴 KBS 안 본답니다. 얼굴 못 들고 다니겠습니다."
KBS에서 꽤 오래 있는 고참 후배가 하는 소리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참 좋았다고 했네. 신뢰도 1위. 영향력 1위. 어디 가서든지 대우받았고 기자들 모임에서도 폼 잡았단다. 조중동 기자들 눈 아래로 깔며 살았단다.
이제 좋은 세월 다 갔다고 했네. 취재원하고 만날 때도 얼굴 쳐다보면 불편하다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것 같으니까.
박 군.
자네도 잘 알지. 박정희 시절, KBS 기자들은 기자실 출입도 못하지 않았나. 기자 취급도 못 받았어. 이제 다시 그런 시절이 되는 것 같다는군. 속 있는 기자들 얼마나 참담하고 울화가 치밀겠나.
"전 조합원은 28일부터 정상 근무에 복귀한다."
제작 거부한 KBS PD협회와 기자협회에 보낸 뜬금없는 노조의 지침이네. 한마디로 투항지침이지. KBS 노조라는 조직은 이런 것인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반성을 요구하고 용서를 빌라면서 피해자에게 그걸 받아 드리라는 조직이네.
이런 기막힌 생각을 해 낸 머리 좋은 인간은 누굴까. 노조는 왜 항복을 한 것일까. 파면을 당하고 해고된 기자와 PD들이 불쌍해 살려주는 투항지침을 내렸을까. 대답은 강동구 KBS 노조위원장이 해야 되겠지.
"징계당하고, 목 잘려서 월급 다 내어주고 얻은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동료가 아니라 가치를 지키려는, 가슴 속 깊이 눌려있던 진정성을 얻었고,
둘째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극복하고 이 자리에 모이게 한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옆의 동료들이 살아 움직이는 가슴으로 다가오게 한 연대감이다. 두렵지만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역사는 법이 아닌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왔다."
임장원 9시 뉴스 주말 앵커의 말이네.
파면처분을 당한 김현석 기자는 이렇게 말했지.
"우리의 침묵에 KBS 9시 뉴스 시청률은 떨어지고, 공정성은 도전을 받고 있다. 지금은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말을 해야 한다."
"회사가 징계를 받은 3인에게 '회사는 다니게 해 주겠다.'라고 말한다고 한다. 우리들은 단순히 회사에 다니는 차원의 싸움이 아니다.
'KBS가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고, 국민의 사랑을 받는 공영방송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한 싸움'이라는 마음 변함없다. 어떤 자리에 놓든 평생 쉬라고 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
1990년 4월의 치열한 민주언론쟁취 투쟁을 KBS 안에서 지켜본 사람으로 독재 권력이 휘두르는 폭거가 얼마나 잔인한가는 너무 잘 아네. 자네도 그때 고생 많이 했지.
그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PD와 기자들이 목을 걸고 나선 것은 그들이 찾고자 하는 가치가 파면이나 해고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믿네.
KBS의 기자들이 얼마나 오욕의 세월을 지냈는지는 스스로 알고 있네. 전해 주는 선배가 없어도 그들은 아네. 그야말로 사람대접도 제대로 못 받고 취재현장에서도 찬밥이 됐네. 너희가 무슨 기자냐 하는 모욕을 당하면서 살았네.
그런 KBS가 달라졌네. 기자 대접을 받았네. 시청률 1위, 신뢰성 1위, 영향력 1위. 이러면 끝난 것 아닌가.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뭐겠나.
그런데 다시 환고향 했네. 다시 욕바가지 뒤집어썼네. 죽기보다 더 싫은 어용나팔수 소리 다시 듣고 있네.
'동물의 세계' 말고는 볼 것이 없다는 칼럼을 쓴 후 항의하는 후배에게 그럼 아니냐고 물었더니 할 말을 잃더군. 나도 미안했네. 왜 좋은 기자와 PD가 없고 좋은 기사 쓸 줄 모르겠나. 그러나 국민의 인식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네.
시청률 조사에서 KBS는 며칠 동안 꼴찌를 기록했네. 아름다운 꼴찌가 아니지. 수치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최고의 시청률과 신뢰도 1위 영향력 1위가 참담하게 무너진 것이지.
이유가 뭘까. 그걸 말해야 할까. 국민의 눈이 그만큼 무섭고 앞으로 KBS는 떨어야 하겠지.
KBS도 보도를 한다고 강변하지만 밥이면 다 같은 밥인가. 보도면 다 보도인가. 앵커가 주절주절 주워섬기는 말을 들으며 몇 번이고 구토를 느낀 것은 방송의 썩은 양심이 너무나 지독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었네. '미디어 포커스'와 '시사 투나잇'을 기억하지. 각종 상을 휩쓴 프로그램이네. 지금은 없어졌어. 어디서 울고 있을까.
KBS 노조, 참으로 자랑스러웠지. 그러나 지금은 노조 중 가장 부끄러운 조직이 되었지. 어떤 의미에서든지 박승규는 한국언론 노동사에 가장 빛나는 인물이 되었네. 그도 기자출신이지.
이번 지침을 내린 강동구 신임 위원장도 전임 박승규를 충실히 추종하는 후계자가 되었더군. 썩어도 준치라는 말도 있지만 개 꼬리 3년에 황모 안 된다는 말도 있지. 누가 준치고 누가 개 꼬린지는 판단하게.
제작거부에 함께했던 막내 기자 양성모의 말이 가슴에 남네.
"지난여름 촛불집회가 생각났다. 땀 흘리며 뛰면서 궁금해 했던 것은 촛불의 끝에는 승리가 있을까, 패배와 절망감이 있을까였다. 이 자리에서도 같은 궁금증이 든다. '정직'은 두렵지 않다. (혹독한) 경찰기자 생활에 한 3개월 쉬고 싶다. 박봉도 두렵지 않다.
돈 쓸 시간도 없어 통장에 돈 쌓이는 것을 지켜봐 왔다. 이 두려워하는 약한 후배를 선배들이 함께 승리가 있을 때까지 걸어가 줄 수 있겠느냐. 촛불집회 때 취재하면서 '연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는 강하다'.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약속하고 부탁드린다."
박승규의 뒤를 이은 강동구 새 노조위원장은 제법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지. 전임 박승규를 의식한 듯 뼈대 있는 목소리도 냈네. 여의도 국회 앞에서의 집회에서는 최재훈 부위원장과 함께 연단에 올라 전국에서 올라온 언론노동자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네.
권력으로부터 KBS와 언론을 지켜 내겠다는 그의 결의는 살을 가르는 겨울 추위도 녹이는 듯했지.
"사측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KBS를 지키는 데 노사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대승적 차원에서 조합원 징계를 철회하라."
"5,000 조합원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공영방송의 버팀목인 노사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 이병순 사장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을 것"
얼마나 당당하고 의연한가. '썩어도 준치'는 여기 해당되네. 그러나 그뿐이야. "전 조합원은 28일부터 정상 근무에 복귀한다."라는 노조의 지침, 이 한마디로 개 꼬리는 3년을 묻어도 여전히 개 꼬리라는 것을 증명했네.
왜 노조는 정상근무에 복구하라는 지침을 내렸을까. 사측이 양승동 김현석 성재호 세 사람의 징계수위를 낮추었기 때문이라고 했지.
KBS는 이들이 개전의 전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네. 과연 그럴까.
김현석 기자와 양승동 PD, 성재호 기자들은 뭐라고 했을까.
"'개전의 정'을 보인 일도 없고, 우리의 행동이 정당했다는 내용의 재심청구서를 제출했을 뿐 '재발방지' 언급 등도 전혀 한 일이 없다."
"홍보팀에 항의했다."
그러나저러나 '개전의 정'도 표시하지 않은 그들에게 KBS는 징계수위를 낮추었네.
분석은 이러네. 우선 급격히 나빠진 여론을 더 이상 악화시켜선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는 것이네.
워낙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고 지극히 비상식적 징계였기 때문에 당연히 바로잡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지. 알긴 제대로 알았는데 그렇다면 아예 징계가 없었던 것으로 해야 되지 않겠나.
노조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 투쟁에 나선 PD와 기자들에게 회사는 손을 들었네. 그동안 KBS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몇 차례 파업은 있었지만 KBS 안에 직능단체인 기자협회와 PD협회가 주축이 된 제작거부 투쟁은 KBS 사상 처음 있는 일이지.
"KBS 기자 PD가 이렇게 단결해 싸움을 벌인 것도 처음이고, 제작거부라는 가장 강력한 투쟁방법을 함께 실현하게 된 것도 처음"
"노조가 주도하는 파업은 여러 차례 했으나 기자 PD가 자발적으로 소위 임의단체들이 중심이 돼 노조의 아무런 방패막이나 갑옷 없이 맨바닥에 나와 있는 것이 아마도 노동운동사, 언론사에서 처음 있는 일일 것"
"그동안 억눌려 말 못하고 우리 뉴스 프로그램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관해왔지만 앞으로 우리의 투쟁은 뉴스와 프로그램을 똑바로 세우는 게 목표가 될 것"
"기자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어제 오후 6시 이후 보도본부를 다 돌고 내려왔을 때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고, 밤 12시 야근체제를 돌면서 조사하니 기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나왔다."
김덕재 민필규 회장의 말이네.
이제 KBS노조는 옛 고향으로 돌아갔네. 90년 4월 빛나던 노조투쟁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독재시대의 고향으로 귀향을 한 것이지. 이제 기자와 PD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언론민주화를 위해서 싸워야 하네. 혈투를 벌려야 될 것이네.
황량한 벌판에 버려진 기자와 PD들, 이제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언론인다운 삶을 찾아야 하네. 얼마나 힘들 것인가. 독재시대의 언론을 겪은 사람으로 너무도 잘 알고 그래서 젊은 그들이 너무 안타깝네.
따뜻한 양지를 찾으며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많지. 그러나 적어도 언론인의 길을 걷기 위해 방송에 몸담았다면 편안한 안락만을 생각하진 않았겠지.
정연주 사장을 몰아내는데 1등 공신인 노조. 이제 다시 KBS 민주언론 운동에 찬물을 부었네. 이제 그것이 노조의 새로운 전통이 되었는지도 모르지.
매일 예약녹화를 해서라도 시청하던 KBS의 <9시 뉴스>. 그래도 며칠 동안 참고 보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꺼 버렸네. 저 뉴스를 리포트 한 기자는 얼마나 참담한 마음이었을까. 가엾은 생각이 들더군.
"정부와 여권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보도를 하려면 치밀한 전략을 짜서 데스크와 만나야 할 정도로 사정이 열악해졌다. 뉴스가 형편없이 망가지고 있다.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KBS기자의 고백이네. 이 정도면 KBS보도가 어느 수준인지는 알 수 있지 않겠나. 이런 조건에서 KBS의 공정보도를 기대하는 것은 오래 된 얘기로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
이번 노조의 대의명분 없는 처사에 대해 국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한나라당의 '언론악법'에 대해 팔짱만 끼고 있던 KBS노조가 민주언론투쟁 의지가 없음을 시인하고 말았다."
"조직원조차 보호해 주지 못하는 노조가 무슨 노조란 말인가. 정체성이 무엇인지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기자와 PD들이 공정방송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으나, KBS 노조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이런 방송의 뉴스를 누가 시청할 것인가. 시청료를 계속 낼 국민들이 딱하다."
"부디 이명박 정권의 나팔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KBS노조는 더 이상 국민의 방송이니 희망의 소리 따위의 헛소리는 제발 쓰지 말라고 충고를 했네. 참으로 난감한 일이네.
헌데 KBS 이병순 사장의 취임사를 보니 몇 가지 바른말을 했고 이 말은 사원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야 할 것 같네.
"KBS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바로 '방송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공정성을 잃을 경우 KBS가 어렵게 쌓아올린 국민적 신뢰는 한순간에 추락하고, 공영성 여부까지 문제 될 소지가 클뿐더러 나아가 정보의 왜곡으로 민주주의 발전까지 저해할 것입니다."
이병순 사장은 자신의 취임사를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또한 강동구 노조위원장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집회에서 수천 언론동지들에게 밝힌 결심을 다시 되새겨 보도록 해야 되지 않을까.
나이도 젊은데 그렇게 인생을 살아서 어쩌려는가.
## 덧붙이는 글
이 칼럼은 저작권이 없습니다.
ⓒ 이기명 /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