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기자가 밝히는 '검찰총장 돈 봉투 사건' 원인
(아고라 / 법조기자 / 2009-11-08)
‘법조기자’라는 블로거 명으로 다음 view에서 활동하면서 김준규(사진) 검찰총장이 법조 출입기자들에게 추첨형식으로 돈 봉투를 나눠준 것과 관련해 글을 올리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이라고 여겨져 글을 올립니다. 몇몇 블로거가 이 문제를 다뤘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과 소회를 적습니다.
사건은 지난 3일 서울 장충동 서울클럽에서 열린 김준규 총장과 법조팀장 기자단과 간담회를 겸한 만찬 자리에서 발생했습니다. 기자 22명과 대검 간부 8명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김 총장이 추첨 형식으로 50만 원이 든 ‘돈 봉투’를 기자 8명에게 나눠준 것이 사건의 핵심 내용입니다.
● 참석한 법조기자는 경력 15년 안팎
참석한 기자단인 법조팀장을 소개하려면 법조 출입 기자단의 구성을 먼저 설명해야 합니다. 언론사마다 사회부에 법조팀이 있고, 그 팀에 기자 5~8명이 속해 있습니다. 경력 15년 안팎의 기자가 법조팀장을 맡습니다. 팀장을 비롯한 법조팀 소속 기자들은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으로 매일 출근해 법원과 검찰을 취재합니다. 기자실은 대법원과 대검찰청, 서울중앙지검과 서울중앙지법 등 네 곳에 있습니다. 팀장(1진)은 대법원을, 현장반장(2진, 경력 10년 안팎)은 서울중앙지검을, 나머지 기자들은 대검찰청이나 서울중앙지법, 서울중앙지검을 출입합니다.
김준규 총장이 사건 당일 만난 기자들은 대법원을 출입하는 팀장(1진)입니다. 김 총장은 대검찰청 출입기자(3진이나 4진)는 몇 번 만났지만, 팀장을 만난 것은 그날이 처음입니다. 언론사별로 한 명씩 22명의 기자가 참석했고, 4개로 분리된 테이블에 대검 간부(8명)와 기자들이 함께 앉아 만찬과 함께 폭탄주를 4잔 돌렸습니다.
● 조중동, 한겨레·경향 등 포함
만찬이 마무리될 때쯤 김준규 총장이 갑자기 이벤트를 제안했습니다. 티켓을 준비했는데 추첨 형식으로 나눠주겠다고 말입니다. 냅킨에 똑같은 번호를 두 개 적고, 반씩 찢어서 하나는 기자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조그만 통에 넣었습니다. 김 총장과 대검 간부들이 돌아가며 통 속의 냅킨을 뽑았고 같은 번호가 적힌 4명의 기자가 호출됐습니다. 반응이 괜찮자 한 번 더 추첨해 모두 8명의 기자가 당첨됐습니다. 그리고 앞뒷면에 ‘격려’ ‘검찰총장 김준규’라고 쓰여 있는 봉투가 전달됐습니다. 당시 기자들은 문화상품권쯤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공식 만찬은 거기서 끝났고 2차 술자리에 일부 기자가 참석했고, 그곳에서 ‘격려 봉투’ 2개가 더 뿌려졌습니다.
‘격려 봉투’에 당첨된 기자의 소속 언론사는 다양합니다. 조선·중앙·동아 가운데 한 언론사도 있고, 한겨레·경향 가운데에도 있습니다. 방송사도, 경제지도 있지요. 추첨이었다는데 어쩜 그렇게 다양한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봉투에서 현금과 수표 50만 원이 나오자 한 기자가 다음날 대검찰청 대변인실로 찾아가 항의하고 ‘격려 봉투’를 놓고 나왔습니다. 문제가 공식적으로 불거지자 나머지 기자들은 그 돈을 봉사단체에 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대변인실에 기자가 반납했던 봉투도 여기에 더해졌습니다. 당시 대변인실은 김 총장이 즉흥적으로 제비뽑기를 제안해 ‘격려 봉투’에 현금이 들어 있는 줄 몰랐다고 설명했습니다. 봉투는 앞서 방문했던 서울서부지검에서 쓰고 남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자들에게 촌지를 주려고 공식적으로 준비했던 것이 아니라는 해명입니다.
● 돈 봉투 반환·기부로 엇갈려
‘격려 봉투’를 기부하기로 기자들이 정리했지만, 한겨레신문은 이 사건을 보도하겠다고 법조 출입 기자단에 밝혀왔습니다.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김준규 총장의 행실이 부적절했음이 분명하고, 이를 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도 보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6일 아침,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고, 인터넷 언론이 잇따라 받아 보도했습니다. 결국, 김 총장은 대변인실을 통해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었다.”며 유감을 표명합니다.
서울중앙지검을 출입하는 법조팀 2진 기자인 저는 문제의 그 만찬 자리에 가지 못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법원을 출입하는 1진(법조팀장)만 언론사당 한 명씩 참석하는 자리였으니까요. 법조팀장들은 김준규 총장이나 대검찰청과 관련한 기사를 쓰지 않습니다. 대검 출입기자들이 따로 있으니까요. 김 총장 측이 ‘뇌물이나 촌지가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법조팀장들이 대검 출입기자들이 쓰는 기사를 ‘데스킹’하다는 점에서, 대검의 해명이 딱히 설득력이 있지는 않습니다.
● 만연한 ‘패밀리 문화’가 원인
김준규 총장의 그날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기사생활 8년 가운데 5년을 법원과 검찰을 출입했지만, 저는 ‘돈 봉투’를 뿌리는 법조인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구설수’에 민감한 검사, 판사들이 그런 일을 버린다는 건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언론인에게 ‘촌지’를 건넸던 시절도 있었다지만, 그건 먼 과거 이야기입니다. 요즘처럼 옆집 숟가락도 인터넷으로 확인하는 시대에…. 미친 짓이죠.
이번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법조팀에 만연한 ‘패밀리 문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자가 검찰이나 법원 등을 오래 취재하다 보면 취재원과 가까워지고, 그만큼 그 문화에 젖어듭니다. 판·검사와 가까이 지내며 자연스레 그들의 애환에 마음을 열고 그들을 견제하고 비판해야 할 사명을 점점 게을리할 수 있습니다. 매일 얼굴 보는 사람을 비판하는 ‘아픈 기사’를 쓰기가 참 민망해질 수도 있죠. 기자가 그렇게 ‘패밀리’가 되면 ‘특종’도 수월해집니다. ‘밀월관계’에 있는 기자에게 뉴스감을 흘려주는 거지요. 먹이사슬처럼 먹고, 먹히는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 ‘집안어른’이 주는 용돈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김준규 총장은 법조팀장을 ‘패밀리’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지방검찰청에 방문해 직원들에게 격려금을 주듯 ‘기자 패밀리’에게 격려금을 나눠준 것입니다. 오히려 이 같은 ‘가정 문제’를 누설한 일부 언론사를 ‘패륜아’로 여기고 야속해할 수도 있습니다.
‘검찰총장 돈 봉투 추첨 사건’의 1차적 책임은, 그래서 기자들에게 있습니다. 검찰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그 결과 검찰총장이 기자들을 ‘패밀리’로 오해하도록 했으니까요. 또 돈 봉투를 검찰총장에게 되돌려주지 않고 기부단체에 보냄으로써 기자들 스스로도 ‘검찰 패밀리’임을 자인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집안 어른’께서 주신 용돈을 돌려드리는 게 예의가 아니라서 기부하는 편법을 동원한 것이라고 봅니다. 돈 봉투가 살포된 그 현장에서 기자들이 강하게 항의하며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공연 티켓’이나 ‘문화상품권’인 줄 알았다고 해명했는데 정말 돈인 줄 받는 순간, 혹은 만찬 자리가 끝날 즈음 몰랐을까요?
그래서 이 사건의 발생부터 마무리까지 저는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고, 또 법조기자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많은 고민과 과제를 남겨준 사건이라 마음이 무겁습니다.
(cL) 법조기자
출처 : http://v.daum.net/link/4703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