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법치와 영국의 원칙
99엔, 그리고 Kadara camp
(서프라이즈 / 김승자 / 2010-01-05)
법적으로 정명(正名)을 쓰는 것은 교양 있는 제국주의자들의 기본 소양에 속한다.
일본 화폐 1만 엔 권의 모델이며 게이오 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근대화의 이론적 단초를 제공한 학자로서 추앙을 받고 있지만, 그의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은 당시의 조선과 중국을 거명하여 나쁜 이웃국가로 지목함으로써 후일 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든다.
곧잘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감히 대결하려 들어서 불편하기만한 제3세계국가들을 불량국가(Rogue State)로 몰아 적을 양산하는 부시와 판박이이므로 이 대목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부시의 사부인 셈이다.
새로운 문물에 빠져든 일본이 자신들의 잣대로 이웃 국가를 재단하고 실제로 일본은 조선과 중국의 주권을 강탈하고 수탈과 학살을 일삼았으니 “탈아입구”가 아니라 “침아입구(侵亞入歐)”로 반인륜범죄를 자행했다고 볼 수 있다.
침아입구로 호가호위하며 동양의 맹주로 거들먹거리며 행악을 일삼던 그들이 패전으로 위세는 한풀 꺾였지만 한반도의 기획 분단으로 인한 경제 부흥을 밑절미 삼아 “부미침아(附美侵亞)”의 유혹을 떨쳐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MD전략에 동맹인 그들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을 뿐더러 해외파병을 위한 헌법9조 개헌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 핵 문제에 “북핵 타령과 납치 쪼이나”를 선창하며 선제공격을 들먹인다.
일본의 “침아”가 동북아에서 20세기의 새벽을 장식했다면 100년 뒤의 제국은 진화했는가?
그 어떤 개과천선의 징후라도 있는가?
21세기의 첫 10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일란성 쌍생아이듯 21세기의 새벽에는 20세기의 DNA가 내장되어 있었나 보다. 마치 1세기를 훌쩍 건너 뛰어 복제품을 보는 것만 같다. 역사는 줄기세포 연구에 마침표를 찍은 듯 되풀이 되고 있다. 복제품이 행세하고 있으니 말이다.
전략과 전술에 성형의 자국이 남아서 혼돈을 불러 오긴 했어도 원형에는 변함이 없다.
분열과 통치로 불리는 원천기술이나 학살과 수탈에 의한 수익 창출 파생 상품도 그대로다.
9/11로 새천년을 시작했지만 그것은 예고에 불과했다. 이어진 이라크 침공, 파키스탄, 아프간 침공, 새천년의 첫 10년은 지구촌을 피로 물들이면서 오버마의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마감했지만 이마저도 닮았다. 20세기의 전쟁을 주도했던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 데어도 루즈벨트, 그리고 키신저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니 말이다.
칼럼니스트 로버트 프리만이 선정한 미국의 지난 10년의 톱텐 스토리가 실감나게 다가 온다.
1. 대법원이 하이재킹 한 2000년 대통령 선거 2. 부시는 9/11사태를 실제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3. 이라크 전쟁은 거짓으로 시작됐고 아직도 미국은 그곳에 남아 있다. 4. 테러와의 전쟁 또한 무기 제조회사의 수익 창출 때문이 아니겠는가? 5. 상위 1%가 모든 경제 성장 과실의 2/3를 차지한다는 사실 6. 미국 경제의 新 封建主義化. 7. 시민 자유의 포기. 8. 번영을 지속시킬 수 있는 자유시장의 실패. 9. 언론 매체의 붕괴. 10. 선거의 無用之物化. |
프리만의 칼럼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댓글이 154개나 달릴 정도로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음을 밝힌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주권 강탈 100주년, 기획 분단이 아니었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6ㆍ25전쟁 60주년, 4ㆍ19혁명 50주년, 전태일 열사 분신 항쟁 40주년, 광주 민주 항쟁 30주년, 6ㆍ15 남북 정상회담 10주년, 우리들의 2010년은 아직도 미완의 장으로 남아 있는 격동의 세월을 짊어지고 이렇게 성큼 다가섰다.
우리는 어디쯤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걸까.
퇴행의 주름살과 100년 전의 상처가 이리도 선연한데.
“99엔, 99엔, 99엔”
대량학살의 물고를 튼 것은 살상 무기의 진화에서 비롯됐지만 제국의 이데올로기가 “ 배후세력”이라는데 이의를 달수는 없다. 교과서나 교과 해설서가 바뀌지 않았다는 얘기다.
제국주의의 교본은 일본이라는 동양의 우등생을 번영의 모델로 삼아 한껏 거드름을 피웠지만 인간이 배제된 주의 주장은 자체 결함으로 인한 붕괴에 직면해 있다.
일본의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나카타니 이와오의 참회록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는 일본열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글로벌 자본주의는 세계경제의 활성화를 위한 비장의 수단인 동시에 세계경제의 불안정화, 소득이나 부의 격차 확대, 지구환경 파괴 등 인간사회에 여러 가지 ‘마이너스 효과를 초래한 주범이기도 하다.” |
서문에 담은 자계(自戒)는 통렬하다.
그러나 제국의 교과서는 바뀌지 않았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집요하다. 후소사 교과서 소동은 고등학교 교과 해설서로 이어지고 마침내 “99엔”으로 일본의 알몸을 드러냈다.
왜 외인(外 因)뿐이겠는가.
일본의 근대화 수혜자 론과 호흡을 맞추려는 뉴 라이트의 교과서 소동을 굳이 감출 필요는 없다. “99엔”의 조롱을 조용히 대하는 것이 성숙한 외교의 전범이라고 언론매체의 찬가가 울려 퍼지지만 미디어법의 불법 통과로 장악한 언론 매체의 찬가는 이미 신뢰를 잃고 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바뀌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것이 법치와 원칙이라고 우기며 선진문명을 뽐낸다.
자신들은 조선을 강제 병탄했던 꿈같은 호시절의 추억 속에서 주인 행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지치도록 오래 끌며 머리를 굴렸겠지만 해 저물녘에 “99엔”을 들고 선 일본을 보라. 벌거벗은 건 일본이잖은가.
“99엔”으로 무엇을 감출 수가 있겠는가? 그들의 국격은 꼭 “99엔”짜리다.
거기 어디에 법치가 있고 문명이 있는가?
문화민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들은 아직도 조선학교의 우리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케냐의 카다라 수용소
식민지 수탈의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6월 영국의 BBC방송과 알자지라 방송은 70,80대에 이르는 케냐 독립 투사들이 영국식민지 지배시대에 저지른 반인륜 범죄에 대한 배샹금 청구 소송을 런던의 고등법원에 제소했으나 영국정부는 이를 즉각 거절했고 그 이유는 영국이 2006년 공식으로 사과했을 뿐만 아니라 시효가 지났기 때문이었다고 보도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영국인 정착자들에 의해 수탈된 농경지를 되찾기 위하여 Kikuyu 부족 민중들에 의해 촉발된 마우마우 운동은 1952년에는 케냐의 독립을 요구하는 저항세력으로 커졌다.
드디어 1952년 10월20일 영국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영국군은 Anvil 작전으로 불리는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식민지 경찰과 영국인 경비원들의 잔인하고 가혹한 진압작전에 저항군은 백인 정착인 들에 대해 히트 앤드 런 전술로 응전했다.
영국은 “Maumau 항쟁”을 -“피에 굶주린 테러리스트”-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했고, 1950년대 서방세계 언론의 주력부대인 미국과 영국의 언론 매체는 “마우마우항쟁”을 백인에 대한 아프리카 부족의 폭동과 동의어로 보도하였다.
Maumau 케냐 독립전쟁 참전 용사들은 그들과 그들의 동료들은 즉결 처분, 고문, 강간, 매질, 강제노동과 강제추방 등 케냐 반군 압살 책동의 야만적 처우에 의해 고통을 받았다고 밝혔다.
영국이 1961년 국가 비상사태를 해제했을 때 공식보고는 1만1천명의 아프리카인과 32명의 백인이 그 기간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역사가들은 마우마우운동이야말로 1963년 12월 12일 케냐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독립기구인 케나인권위원회는 식민지배 세력인 영국의 가혹한 탄압 체제 속에서 9만여 명의 케냐인 들이 처형되거나 고문에 의해 불구가 되었고, 16만 명은 소름끼치는 끔찍한 조건하에 수용소에 감금당해야 했다고 말했다. |
지금도 그 수용소는 앙상한 채로 남아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그 수용소가 -Kadara Camp-다.
나는 묻고 싶다. 다시 묻고 싶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제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가.
자본에 의해 무력화 된 선거라는 민주주의 제도, 정ㆍ경ㆍ언 카르텔에 의해 초토화된 언론, 자본에 예속되고 권력에 예속된 법치를 옆에 두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국주의 패권 세력은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그들은 이념과 자본의 보검으로 중 부장한 채 기회를 노리고 있지 않은가. 상대에게는 무장해제를 강압하면서.
용산 참사의 주검은 “도심 테러리스트의 난동”이고,
케냐의 독립투쟁은 “피에 굶주린 테러리스트의 폭동”일 뿐이다.
저 망루에는 아직도 난쟁이 가족들이 절규하고 있는데.
오늘 난쟁이 가족이 망루에서 울부짖는다면 내일은 내 차례인 이 야만의 세월을 어찌해야 하는가. 이명박이 무력화 시킨 국가 인권위원회가 케냐에서는 독립기구다.
수탈된 대지에서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지 않은가.
이명박이 진실화해위원회의 문을 닫을 수는 있을지라도 학살의 땅에서 타오르는 희망의 불길은 끌 수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이명박이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 패권세력들의 실상을 밝히는 일은 희망이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는 암매장하고 그들만의 기준에 따라 법치와 원칙을 내세우는 제국주의 패권 세력과 그 아류들에게 나는 단재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을 들려주고 싶다.
역사적 분수령이 될 수밖에 없는 2010년 새해 아침에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하고”로 시작된 단재의 표호는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로 맺는다.
아마도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우리들의 희망은 수탈된 대지 너머 학살의 강을 건너 야만의 세월을 이기고 그렇게 어렵게 오시나 보다. 다시금 '우리의 응전은 무엇이어야 하나?'에 대한 고뇌로 눈 오신 밤을 하얗게 밝혀야 될 것 같다.
김승자 (새날희망연대 공동대표ㆍ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