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

아이티, 성자가 세운 나라

순수한 남자 2010. 1. 26. 20:38

아이티, 성자가 세운 나라
번호 110401  글쓴이 개곰 (raccoon)  조회 104  누리 50 (55-5, 2:9:1)  등록일 2010-1-26 19:14
대문추천 4

 

1802년 7월 7일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군 지휘관으로부터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며 저녁 초대를 받고 갔다가 그대로 프랑스로 압송되었다. 스위스 접경지역의 험준한 산중에 만들어진 감옥에서 고독과 추위에 떨다가 이듬해인 1803년 4월 7일 폐렴으로 죽었다. 부인과 아이들도 같이 끌려갔지만 가족은 루베르튀르의 임종을 볼 수 없었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아이티의 흑인 독립군 지도자였다. 1789년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을 추구하는 프랑스혁명의 소식은 바다 건너 생도미니크 섬에도 전해졌다. 혁명 소식을 갖고 온 프랑스 군인들은 노예가 대부분인 생도미니크 흑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1782년 프랑스 제헌의회는 흑인을 포함한 모든 재외 유색인 자유민에게도 프랑스 시민권을 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백인 지주들의 반발은 거셌고 여전히 중노동에 시달렸던 노예들은 자유를 달라며 들고 일어났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원래 노예였다가 성실성을 인정받아 자유민이 되었지만 뛰어난 지략과 판단력으로 독립 항쟁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모든 성자들의 각성'이라는 뜻이었다.
 
1793년 루이 16세를 처형하면서 프랑스는 온 유럽 국가와 전쟁에 들어갔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조금이라도 노예 해방을 앞당기려는 마음에서 처음에는 스페인 편에서 파죽지세로 프랑스군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프랑스가 해외 총독의 건의를 받아들여 1794년 해외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폐지한다고 발표하자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스페인군과 영국군을 생도미니크에서 몰아냈다.
 
명목상 프랑스인 총독은 있었지만 생도미니크의 실질적 통치자는 투생 루베르튀르였다. 헌법도 만들었다. 그러나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공화국 국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도 충성을 다짐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생각은 달랐다. 나폴레옹은 남미 식민지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생도미니크를 다시 프랑스의 식민지로 만들고 그곳을 교두보로 삼아 북미 대륙에서 영국을 몰아낸다는 야심을 품고 흑인을 다시 노예로 만들려고 1802년 2만명의 프랑스군을 생도미니크로 보냈다. 프랑스군은 흑인들의 치열한 저항과 풍토병으로 승산이 희박해지자 속임수로 투생 루베르튀르를 납치했다.
 
루베르튀르는 옥사했지만 흑인들은 항전을 계속하여 결국 이듬해인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포하고 새 공화국의 이름을 '높은 산'이라는 뜻을 지닌 원주민어 아이티로 지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맞선 무력 항쟁으로 독립한 신생 공화국 아이티의 앞길은 험난했다. 흑인 노예들이 세운 공화국이 번영할 경우 백인들의 식민지 지배 기반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백인 제국주의자들은 흑인 공화국을 가만 두지 않았다. 흑인은 자립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온 세계는 물론이고 흑인 자신들에게도 똑똑히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짐바브웨에서 땅을 잃은 영국의 소수 기득권자들이 자기들의 경제 제재는 감추고 한때 곡창이었던 짐바브웨가 가난에 허덕이는 것은 무능한 흑인 지도자 로버트 무가베가 유능한 백인 농장주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라며 떠들어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미국은 남부 농장 지대의 흑인 노예들이 봉기할까봐 아이티를 60년 동안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압도적 무력을 앞세워 1825년 다시 아이티에게 침공 위협을 가하면서 아이티 독립으로 인해 도주한 노예들 때문에 프랑스가 입은 피해액 1억5천만프랑을 물어내라고 협박했다. 아이티는 시몬 볼리바르 같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헛수고였다. 아이티는 볼리바르의 독립 전쟁에 군인과 무기,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건은 단 하나, 당신이 이긴 지역에서 노예를 해방시켜달라는 것뿐이었다. 아이티는 볼리바르의 베네수엘라 해방전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노예 해방과 식민지 독립은 별개라고 생각한 백인 시몬 볼리바르에게 독립후에도 농장 노동력으로 이용해야 할 노예를 독립시켜달라고 요구하는 신생 흑인 공화국은 나중에 화근이 될지도 모를 혹덩어리일 뿐이었다.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8천만프랑에 팔았으니 1억5천만프랑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이었다. 지금 돈으로 200억달러가 넘는다. 이 돈을 아이티는 1947년에 가서야 다 갚았다. 무려 143년 동안 빚을 갚은 것이다. 19세기 말에는 아이티 나라 예산의 80%를 프랑스에 갖다바쳐야 했다. 독립은 했어도 정부에 돈이 없으니 외국 상인들이 경제의 실권을 장악했고 아이티가 개혁을 시도하려 할 때마다 찬물을 끼얹었다. 미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영국인 이민자들은 툭하면 변란을 일으켜 아이티중앙은행 금고에서 거금을 횡령하고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아이티인 매판 세력을 키웠다. 200년 동안 아이티에서는 무려 32번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대부분은 외세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인종주의자 고비노가 쓴 <<인종의 불평등>>이라는 책에 맞서 <<인종의 평등>>이라는 책을 쓴 아이티 지식인 앙테노르 피르맹이 1892년에 일으킨 개혁운동을 짓밟은 나라도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나선 독일이었다.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여 약소 민족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5년 아이티를 침공했다.
 
뒤발리에의 철권 통치로 신음하던 아이티에 서광이 비친 것은 카톨릭 신부 출신의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1990년 말 전체 투표자의 3분의 2로 당선되면서부터였다. 아리스티드는 하느님의 복음도 중요하지만 가난 퇴치가 우선이라는 해방신학의 신봉자였지만 비폭력과 화해를 일관되게 부르짖었다. 집권하자마자 아리스티드는 국민을 제외하고는 좌우 양쪽의 엘리트한테 물어뜯겼다. 선거에서 평균 2%의 지지밖에 못 얻는 사민주의 엘리트 집단은 경제 기반이 없어 외국의 원조에 당분간 기댈 수밖에 없어 눈치를 봐야 하는 아리스티드의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 아리스티드가 한편으로는 최저임금올 끌어올리려 애쓰면서도 IMF의 긴축재정운용 요구를 수용하면 자본주의의 앞잡이라고 몰아세웠고 군부와 경제 엘리트 집단은 아리스티드를 아이티를 빨갱이 나라로 만들려 한다면서 거품을 물었다. 아이티의 문제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위아래의 문제였다. 아이티 의회는 한통속이 되어 아리스티드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시켰고 아이티 군부는 1991년 9월 쿠데타를 일으켜 아리스티드를 내몰았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을 지키려던 수천명의 아이티 국민이 군인들에게 학살당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아리스티드는 2000년 말 대선에서 다시 압도적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야당은 승산이 없으니까 선거 불참 운동을 벌였고 선거가 끝난 뒤에는 부정선거라며 몰아붙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방은 아이티에 대한 경제 제재에 들어갔다. 프랑스에게도 아리스티드는 눈엣가시였다. 아리스티드는 프랑스에게 불법적인 노예의 재산 상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그동안 받아간 210억달러를 돌려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한 것이다. 인구의 1%가 경제를 독식한 데다가 국제사회의 졍제 원조까지 끊긴 상태에서 나온 요청이었다.
 
그러나 체 게바라와 볼리비아에서 같이 게릴라 항쟁을 했다는 사실을 자랑하면서 선거 때마다 "왼쪽의 왼쪽" 후보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고 부르짖는 프랑스의 극좌파 지식인 레지스 드브레는 시라크 대통령의 지시로 아이티 현지에 가서는 아리스티드의 요구는 법적 근거가 없으며 아이티 야당의 어느 누구도 돈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더라고 강조했다. 종주국 프랑스 진보를 추종하는 아이티 진보들이 신주단지처럼 떠받드는 프랑스의 리베라시옹, 뤼마니테 같은 좌파 신문도 경쟁적으로 아리스티드를 미치광이로 묘사했다. 결국 아리스티드는 미국이 아이티의 인접국 도미니카에 세운 군사시설에서 훈련을 받은 아이티 반군이 일으킨 반란으로 2004년 다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고 이 과정에서 다시 수많은 아이티 국민이 학살당했다. 자연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아이티는 외세와 그 앞잡이들이 걸핏하면 일으킨 인공 지진으로 풍비박산이 난 나라였다.
 
근대가 처음으로 시작된 해는 르네상스기가 아니라 흑사병이 일어난 1348년이라고 보는 설이 있다. 엄청난 규모의 떼죽음을 보면서 사람들은 죽음을 하늘의 벌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야만적인 자연에 우롱당하지 않는 인간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확대해나가려는 작업을 해온 것이 근대의 역사라는 것이다. 안전한 공간은 문명의 공간이고 안전하지 않은 공간은 야만의 공간이다.
 
프랑스는 유럽에서는 가장 먼저 빈부의 격차와 상관 없이 프랑스 국민이라면 누구나 프랑스라는 영토 안에서는 안전을 보장받는 공화국을 제일 먼저 세웠다는 점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문명국이다. 미국도 자유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긴다는 영국보다도 더 자유와 개인의 가치를 높이 사는 전통을 헌법에까지 박아놓았다는 점에서 역시 문명국이다. 그러나 프랑스도 미국도 예나 지금이나 자국을 안전한 공간으로 만드는 데는 관심이 있을지 몰라도 타국을 안전한 공간으로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다. 아니, 자기 나라를 조금이라도 안전한 나라로 가꾸어가려는 약소국의 노력에 끝없이 찬물을 끼얹어온 나라가 프랑스와 미국이다.
 
서양은 근대의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고 탈근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과연 그럴까. 서양은 자국의 공간은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었을지 몰라도 타국의 안전한 공간은 자꾸만 허물어뜨리려 한다. 아이티에서 외세의 비호와 지원 아래 일어난 수십번의 인공지진이 산 증거다. 타국민의 아픔을 자국의 일처럼 아파하지는 못하더라도, 자국의 안전한 문명을 이끌어가는 지배층이 타국을 야만의 공간으로 끝없이 밀어내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는 국민이 다수가 되지 않는 한 서양의 근대는 영원히 미완성으로 머문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마지막 순간에도 얼굴을 보지 못한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네 아버지를 죽인 나라가 프랑스라는 사실을 잊어달라"는 한마디였다. 제국주의 프랑스는 미워하되 자유 평등 우애를 추구하는 공화국 프랑스의 정신은 미워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백인은 공화국 정신을 저버리더라도 너만은 공화국 정신을 저버리지 말아달라는 유언이었다. 어쩌면 진정한 근대는 식민지의 후유증을 뼛속깊이 겪어 남의 눈물을 아는 아이티에서 먼저 완성될지도 모른다. 아이티 국민이 인공지진과 자연지진을 모두 이겨내고 아이티를 투생 루베르튀르의 나라로, '모든 각성한 성자들'의 나라로 만드는 날,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타국을 짓밟지 않고 자력으로 근대를 이룩한 나라를 보게 될 것이다.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11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