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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총선 총평

순수한 남자 2010. 5. 9. 23:30

영국 총선 총평
번호 143200  글쓴이 개곰 (raccoon)  조회 395  누리 250 (250-0, 11:32:0)  등록일 2010-5-9 21:07
대문 18

 

올해 총선에서 보수당은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노동당을 누르고 제1당으로 올라섰다. 토니 블레어를 그대로 흉내내어 보수당이 확 바뀌었다는 인상을 주는 데 나름대로 성공한 젊은 데이비드 캐머런을 앞세운 보수당은 306석을 얻어 지난 2005년보다 97석을 더 얻었다. 노동당은 지난번보다 91석 적은 258석을 얻었고 초반 텔레비전 토론에서 선전했던 자유민주당은 보수당의 집권을 두려워한 서민 유권자와 고든 브라운의 유임 가능성에 반감을 품은 중산층 유권자가 각각 노동당, 보수당에게 표를 던지는 바람에 지난 총선보다 6석이 적은 57석에 그쳤다.


노동당은 영국 전역에서 지지율이 6.2% 내려갔고 잉글랜드 지역에서는 7.4%나 하락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지역에서는 노동당 지지율이 오히려 2.5%나 올라갔다. 59개의 선거구가 있는 스코틀랜드에서 노동당은 41석을 얻었고 자유민주당은 11석, 스코틀랜드국민당이 6석, 보수당은 겨우 1석을 얻었다. 보수당은 스코틀랜드에서만 죽을 쑨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잉글랜드인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반감이다. 스코틀랜드인은 전통적으로 잉글랜드인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하다. 반면 잉글랜드인은 스코틀랜드인이 지역에서 걷는 세금보다 훨씬 많은 재정 혜택을 잉글랜드 지역에서 걷은 세금 덕분에 누리면서도 고마워할 줄 모른다고 불만스러워한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인은 북해 유전의 막대한 수익금을 스코틀랜드인이 온전하게 누리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다. 스코틀랜드국민당은 여기에 불만을 품고 분리 독립을 추구하려는 당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이 보수당이라면 치를 떠는 결정적 이유는 보수당의 대처 총리 집권 시절이었던 1984년의 광부 파업 당시 런던에서 온 경찰이 파업 광부들을 곤봉을 휘두르면서 잔혹하게 진압하던 악몽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잘 나가는 기업인조차도 이번 총선에서 구타당하던 광부들을 기억하면서 투표했다고 지인들에게 반보수당 투표를 독려하는 문자를 보낼 정도로 보수당 정권의 폭력 진압은 스코틀랜드 유권자의 마음에서 보수당을 영원히 지워버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둘째는 스코틀랜드 사람인 노동당의 고든 브라운 현총리에 대한 연민이다. 스코틀랜드인은 고집스럽고 퉁명스럽다는 고정관념을 품은 잉글랜드인이 적지 않은데 브라운은 이런 고정관념에 딱 들어맞는 외모와 표정을 지녔다. 그래서 진보 정론지를 제외한 대다수 영국 언론은 뚱한 표정을 짓는 브라운 총리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싣고서 브라운의 음흉함과 우유부단함과 무능함을 조합한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그리고 가랑비에 옷 젖듯이 노동당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불편한 느낌이 있는 영국 국민은 고든 브라운에 대한 세뇌된 반감으로 자신의 반노동당 성향을 합리화하고 마음 편하게 보수당에 표를 던진다.

웃는 얼굴에 침뱉기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짓고 카메라 앞에 나타나던 토니 블레어 전총리와는 달리 고든 브라운은 표정 관리에 서투른 정치인이다. 그래서 보좌관들은 인터뷰를 할 때도 가급적 많이 웃으라고 사정하지만 브라운에게는 이것이 더 거북하다. 그래서 웃지 말아야 할 때 까먹은 숙제를 해치우듯 엉뚱하게 웃고 웃어야 할 때 안 웃는 어색한 장면이 연출된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반노동당 언론들은 작위적인 연출을 집어치우라고 비아냥거린다. 잉글랜드인에게는 이런 비웃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릴지 모르지만 스코틀랜드인에게는 이런 야유는 가슴을 후비는 비수가 된다. 그리고 잉글랜드 주류 언론에 농락당하는 고지식한 동향인에 대한 연민의 눈물을 가슴속에서 흘린다. 그리고 이번 총선에서 잉글랜드인을 상징하는 보수당을 표로 응징했다.


고든 브라운 총리가 그나마 막판에 비스코틀랜드 지역에서도 지지율을 조금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선거를 하루 이틀 앞두고 기득권자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보수당에 맞서 지난 13년 동안 최저임금제 도입과 박물관 무료 입장, 의료와 교육 예산의 대폭 증액 등 노동당이 어떤 일을 했는지 열변을 토하면서 보수당의 집권을 두려워하는 지지자를 결집시켰기 때문이었다. 만약 브라운 총리가 1주일만 먼저 더 이렇게 공격적이고 열정적인 연설을 했다면 노동당은 예상을 뒤엎고 단독으로 과반수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브라운이 자신에게 맞지도 않게 부드러운 전략으로 일관한 것은 결국 자신을 혐오하는 보수 언론의 프레임 내지는 덫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기득권자만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영국 유권자의 울분은 보수당 지지자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유민주당의 닉 클레그가 초반에 선전한 것도 경제를 말아먹었으면서도 거액의 보너스를 챙기는 금융권에 대해서 변변한 규제를 못 가하는 보수당, 노동당과는 달리 금융권을 강하게 비판하여 유권자의 울분을 달래주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분노를 혐오하는 적은 나의 미소까지도 혐오한다는 사실을 고지식한 브라운 총리는 미처 몰랐다.

신뢰받는 여론조사

BBC를 비롯하여 영국의 각 언론은 선거 전날까지도 각종 여론조사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박빙의 승부처를 보이는 곳에서 어떻게 전략 투표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까지도 분석했다. 금품 수수나 향응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선거 운동에 대해서 아무런 제약이 없는 셈이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고 거리낌없이 전략을 논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논의와 발언의 중요한 전거가 되었던 것은 각 언론에서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였다. 여론조사는 유권자가 마음속으로 지지하는 정당이 어디인가 하는 가변적 '사실'을 사진처럼 찍어서 드러낸다. 만약 여론조사가 조작되었다면 엉터리 사실에 근거한 무수한 논쟁과 논의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론조사를 자유롭게 공표한다는 것은 여론조사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깔려 있어야 한다.


영국의 여론조사는 YouGov, Ipsos MORI, ICM, ComRes 등 8-9개의 여론조사 전문회사가 거의 전담한다. 여론조사 회사의 생명은 높은 적중률에 있으므로 이들은 전문가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수시로 변하는 여론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영국의 여론조사 업체들이 공신력을 인정받는 까닭은 영국여론조사심의회(British Polling Council)라는 단체의 감시를 받기 때문이다. 영국 방송이나 신문에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업체는 그 조사를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설문으로 어떤 방법으로 조사했는지 그 구체적 내용을 심의회에 보고해야 하고 또 모든 시민이 내용을 볼 수 있게끔 온라인으로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 앞으로 한국에서 정권이 바뀌면 악질 언론과 정당의 요청을 받아 엉터리 여론조사로 왜곡된 여론을 만들어내는 한국의 엉터리 여론조사 업체가 발붙일 수 없도록 이런 감시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론조사 전문가의 직업적 자존심이다. YouGov의 공동 설립자인 피터 켈너는 BBC 기자 출신으로 1992년 영국 총선에서 모든 여론조사가 하나같이 닐 키녹 노동당 후보의 낙승을 예상하는 바람에 그런 '사실'을 바탕으로 기사를 쓰다가 보수당이 뜻밖에 압승을 거두는 바람에 망신을 당하고 충격을 받아 여론조사 전문가로 전직했다. 피터 켈너의 동업자인 스티븐 셰익스피어는 민주주의는 여론을 정확히 반영해야 하며 여론을 정확히 파악하자면 뛰어난 여론조사 회사가 있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진 이상주의자다. 그는 단순히 돈을 버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업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믿음을 갖고 회사를 운영한다. 돈만 많이 주면 여론조사의 기본 원칙은 내팽개치고 고객이 원하는 여론조사 결과를 만들어서 대령하는 한국의 여론조사 전문가들과는 다르다.


선진국에서는 직업적 양심을 어긴 전문가는 그 바닥에서 매장당하지만 후진국에서는 직업적 양심을 지키는 전문가가 그 바닥에서 매장당한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사익을 버리고 오직 공익만을 추구했던 노무현 같은 정치인은 목숨을 버려야 했고 그런 정치인을 윽박지르던 한국의 좌우 전문가들은 오늘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학계에서 정계에서 언론계에서 아옹다옹 오손도손 잘 지낸다.

소수의 열정

이번 영국 총선의 진정한 승자는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보수당이 아니라 인종주의 극우 정당 BNP(영국국민당)의 거점을 허물어뜨린 시민운동 단체 Hope Not Hate였다. 이 단체는 1천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를 모아서 지난번 지방선거에서 BNP가 런던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무려 12명의 구의원을 당선시킨 런던 동부의 바킹 지역에서 몇 주 동안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반BNP 투표 독려 운동을 펼쳐서 12명 전원을 낙선시켰다. BNP 당수 닉 그리피스도 이 지역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다가 노동당 후보에게 참패했다.


BNP는 암울한 경제 상황에 편승하여 이번 총선에서 지방과 전국에서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내심 기대가 컸다. 그러나 Hope Not Hate의 집중 견제를 받고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만약 BNP가 약진했다면 암울한 경제 상황으로 위축된 영국 국민은 파시즘 정당이 발을 붙이지 못한 역사에 대한 자긍심에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 자긍심에 한번 금이 가면, 영국은 파시즘과 인종주의가 발을 붙이기 어려운 나라라는 신화도 급속도로 허물어졌을지 모른다. 뜨거운 열정을 가진 소수 영국인의 헌신이 영국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5월 23일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년이다. 6월 2일 한국에서도 지방선거가 있다. 야바위꾼들이 판을 치는 흙탕물 속에서 외롭게 양심을 지킨 정치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력을 심판하고 그 뜻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모인 국민참여당을 성원하여 우리 모두의 가치를 위해 목숨을 던진 고인에게 진 빚을 백분의 일이라도 갚아보자.

(노무현 대통령님 서거 1주년 추모제가 오는 5월 22일 토요일 4시부터 뉴몰든에 있는 스텔라 식당에서 열립니다. 해외에 사시는 서프앙분들, 경기도지사 후보로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가 뽑힐 수 있도록 한국의 지인들에게 이메일 한 통씩만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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