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제네바모터쇼의 화두는 누가 뭐래도 ‘유럽 하이브리드의 역습’이었다. 일본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하이브리드는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동력원이었다. 하지만 100년 이상 사용해 온 내연기관을 하루아침에 버리기는 힘든 일. 더구나 전기차시대로 가는 길에는 아직 많은 장벽이 놓여 있다. 하이브리드시대가 예상 외로 길어지면서 너도나도 이 신흥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여기에는 스포츠카 메이커들도 포함된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디젤 엔진을 선택하기 힘들다. 털털거리는 아이들링에 4,000rpm에서 변속하는 페라리, 포르쉐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들은 결국 CO2 절감과 연비규제의 압박에 시달리다 하나둘 하이브리드 기술에 손대기 시작했다.
917에서 모티브를 얻다
포르쉐는 제네바에서 무려 3대의 하이브리드 모델을 전시했다. 신형 카이엔 하이브리드와 911 GT3 R 하이브리드 그리고 918 스파이더 컨셉트가 그것이다. 폭스바겐과 플랫폼을 공유하는 카이엔은 2005년과 2007년 하이브리드 버전 프로토타입을 공개한 이래 이번에 드디어 신형 카이엔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포르쉐 역사상 첫 양산 하이브리드다. 반면 포르쉐의 핵심인 911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아직 양산형 하이브리드는 없지만 서킷 레이스용 하이브리드 버전 911 GT3 R 하이브리드가 얼마 전 시험주행을 시작했다. 윌리엄즈에서 개발한 시스템은 배터리나 캐패시터 대신 최대 4만rpm 회전하는 플라이휠에 운동에너지 형태로 저장되며 필요할 때 앞차축에 달린 모터를 돌린다. 상황에 따라 네바퀴굴림으로 변신하며 강력한 추진력을 얻는다.
이 두 모델도 충분히 화제의 주인공이 될 소질을 갖추었지만 918 스파이더에는 미치지 못한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컨셉트카 918 스파이더는 디자인과 기술, 역사적 의미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제네바모터쇼 최고의 스타였다.
지난해 벌어졌던 포르쉐와 폭스바겐의 인수전쟁과 포르쉐 가문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918 스파이더의 존재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끝에 다윗 포르쉐를 인수하기로 결정한 폭스바겐. 그 막후실력자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포르쉐의 창업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외손자이며 한때 포르쉐에서 엔지니어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970년대 초 르망에서 맹위를 떨쳤던 레이싱카 917이다. 수평대향 12기통 엔진을 얹고 1969년 데뷔해 1970년과 71년 르망 24시간을 제패한 무적의 레이싱카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918 스파이더는 917에서 모티브를 따온 미드십 스포츠카. 폭스바겐 인수가 결정되자마자 지금까지의 대형화, 고급화 전략 대신 경량, 고성능으로 미래 전력을 수정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포르쉐와 하이브리드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창업자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삶을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그의 첫 작품이 하이브리드카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역사상 최초의 하이브리드카로 기록된 로너-포르쉐 믹스테 하이브리드(1899년)는 엔진으로 전기를 만들고 네바퀴에 모터를 달아 구동하는 직렬 하이브리드 시스템이었다.
무게 1.5톤에 10~14마력을 냈던 최초의 하이브리드카와 비교한다면 918 스파이더는 지게차와 우주선 정도의 수준 차이를 보여준다. 918 스파이더는 917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만큼 퍼포먼스를 추구하면서도 환경친화적인 모델이 되고자 했다. 0→시속 100km 가속 3.2초, 최고시속 320km의 성능은 최신의 911 터보 S를 능가하며, 7분 30초를 밑도는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 랩타임은 카레라 GT를 우습게 여긴다. 반면 CO2 배출량 70g/km와 33.3km/L의 경이적인 연비는 비상식적이기까지 하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마법을 가능케 한 것일까?
하이브리드로 추구하는 고성능
918 스파이더는 엔진과 모터, 배터리로 구성된 통상적인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다만 높은 성능을 목표로 한 만큼 500마력 이상을 내는 V8 3.4L 엔진이 미드십에 자리잡았다. 여기에 앞뒤 하나씩 두 개의 모터가 218마력의 여분 동력을 공급하는 구성.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하면 최고출력은 700마력을 넘는다. 변속기는 더블 클러치가 달린 최신의 7단 반자동 PDK(Porsche Doppelkupplungsgetriebe). 뒷바퀴와 엔진, 모터 사이에는 이 PDK가 자리잡고 있지만 앞바퀴는 별도의 변속기구 없이 고정 기어비로 휠에 연결되어 있다.
요즘 하이브리드뿐 아니라 일반 승용차(BMW 등)와 F1(KERS라 불린다)에서도 제동에너지를 전기로 바꾸어 저장하는 회생제동장치가 일반화되고 있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 열로 바뀌어 공기 중에 버려지는 운동에너지를 전기로 바꾸어 활용하는 원리다. 918 스파이더 역시 속도를 낮출 때 모터가 전기를 만들고, 그 전기는 조수석 아래 배치된 배터리에 저장된다. 리튬이온 배터리를 액체로 냉각해 일정한 성능과 내구성을 확보했다. 이렇게 모아놓은 전기를 모터에 공급하면 조금 더 강력한 성능을 얻을 수 있다.
918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모두 4가지 모드가 제공된다. E 드라이브 모드를 선택하면 엔진이 멈추고 전기차로 변신한다. 배터리가 완충된 상태에서 25km를 달릴 수 있으며, 플러그인 방식이므로 가정용 전원으로도 충전할 수 있다. 시간 여유와 인프라만 있다면 휘발유를 전혀 쓰지 않고 공해물질도 배출하지 않으면서 운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이브리드 모드에서는 엔진과 모터가 상황에 따라 작동하며 성능과 효율의 밸런스를 추구한다. 반면 스포츠 하이브리드 모드에서는 엔진과 모터가 함께 움직이며 보다 높은 성능을 추구한다. 뒷바퀴에 동력을 집중하며 좌우 구동력을 배분하는 토크 벡터링 시스템이 다이내믹한 달리기 성능을 제공한다. 이보다 한 단계 높은 레이스 하이브리드 모드에서는 출력과 성능의 한계치를 경험할 수 있다. 배터리만 충분히 충전되어 있다면 추월버튼(push-to-pass)이 폭발적인 가속력을 제공한다. ‘E 부스트’ 기능은 현재 F1에서 사용 중인 KERS와 매우 비슷하다.
성능과 연비에 일조하는 초경량 보디에는 포르쉐의 오랜 모터스포츠 노하우가 집적되어 있다. 우선 외형적으로는 전설적인 머신 917을 계승하는 가운데 현대적인 이미지를 담으면서 첨단기술의 집약체임을 시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917에는 숏 보디 917K와 고속주행성능에 주력한 롱 보디형 917LH 그리고 핑크 피그라는 애칭을 얻었던 와이드 보디의 917/20, 미국 캔암 시리즈용 917/30 등 다양한 버전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스탠더드한 917K의 얼굴에서 이미지를 따왔다. 반면 운전석 뒤 돌기와 엉덩이는 카레라 GT를 빼닮았다. 그야말로 역대 최강 포르쉐의 유전자를 두루 물려받은 셈이다. 여기에 필요할 때 솟아오르는 팝업식 에어 인테이크가 램 에어 효과로 흡기효율을 높이고, 가동식 리어 윙은 상황에 따라 공력특성을 조절한다. 모노코크와 보디는 카본 컴포지트와 마그네슘, 알루미늄 등으로 만들어 강성이 매우 높으면서도 무게가 1,490kg에 불과하다.
첨단 이미지 가득한 인테리어
운전석은 첨단 전자기기를 보는 듯하다. 우선 3스포크 스티어링 휠 뒤에는 60년대 경주차 스타일로 독립된 3개의 원형 미터가 자리잡았고 맨 왼쪽이 시속 350km까지 있는 속도계, 중간이 엔진회전계 그리고 오른쪽이 연료량과 배터리 게이지 등 에너지 게이지다. 스티어링 휠에는 각종 스위치들이 달려 조작 편의성을 추구했고 대형 플리퍼도 갖추었다. 시동 버튼의 위치는 당연히 왼쪽. 스티어링 5시 방향에 달린 것이 하이브리드 모드 스위치로 E(E 드라이브), H(하이브리드), R(하이브리드 레이스), S(하이브리드 스포츠)를 나타낸다. 모드에 따라 시각적 효과도 추구해 전기로 달릴 때에는 계기가 초록색으로 빛나고 레이스 모드에서는 붉은색으로 바뀐다.
공간활용을 위해 좁게 디자인한 센터페시아에는 공조장치와 오디오 스위치를 배치했으며 터치모니터를 활용해 버튼 수를 줄이면서 조작성을 개선했다. 내비게이션을 위해 센터페시아에 별도의 모니터도 마련했다. 포르쉐는 하이브리드 고객의 편의성을 고려해 내비게이션레인지 매니저 기능을 추가했다. 현재 연료와 배터리 충전량 등을 바탕으로 주행가능거리를 내비게이션에 표시할 뿐 아니라 주유소 위치도 알려준다.
비데킹 추출 후 새로운 미래전략을 짜 나가고 있는 포르쉐는 퍼포먼스와 경량이라는 가시적인 목표에 주력할 전망이다. 아울러 법규를 만족시키는 친환경 기술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 918 스파이더에는 포르쉐의 미래를 결정할 이들 요소가 잘 녹아들어 있다. 전설의 르망 머신 이미지를 되살렸으면서도 하이브리드 시스템으로 최고의 성능과 뛰어난 친환경성을 만족시켰다. 이대로 양산화가 가능할까? 기술적 완성도와 가격이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뚱뚱하고 거대하며 못생긴 포르쉐에 더 이상 낙담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