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영의 ‘페르시아 문화유적 답사기’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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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 김제영 / 2010-09-29) 셋째 날(1999.10.2) 아침 6시에 기상이다. 쉬라즈(Shiraz) 행 이란항공 235기가 7시 30분에 뜨기 때문이다. 호텔(Azadi Grand) 식당에서 간이 식단으로 아침을 하고 공항으로 출발이다. 밤에는 (북경에서 이란에 도착한 시간이 밤 10시) 보지 못했던 산업단지의 거대한 구조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 같은 혼잡은 아니지만 외곽에서 테헤란 시내로 들어가고 있는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출근을 하는 직장인들일 것이다. 정지(整地)가 된 도로변 자투리땅엔 거의 묘목이 가꾸어져 있다. 식목에 정성을 쏟고 있는 이란 정부의 의지가 눈에 보이는데… 묘목이야 뿌리를 내리느라고 그렇겠지만 이미 자리를 잡은 지 대여섯 해는 되어 보이는 중(中)키의 나무들조차 몸살을 앓고 있는지 비실비실하다. 인위로 공급되는 물에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니 나무인들 기운이 팔팔할 수 있겠는가. 멀리 보이는 회갈색 암석의 산악의 줄기가 이승 그 너머 침묵의 세계인 양 황량하고 음산하다. 자생하는 숲으로 하여 대화가 있고 몸짓이 있고 새들의 노래가 있는 한국의 산, 정녕 우리는 은혜를 입은 민족인데….
공항에 당도한 우리 일행은 남녀로 갈라서 줄을 선다. 탑승 수속 절차의 출입구가 남녀 구분이 되어 있단다. 대기실에서는 남녀 구별이 해제되었다. 공항은 관광객들로 부산하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가도 거저인 관광안내도나 홍보물은 지천으로 꽂혀 있다. 그런데 이곳 메흐르버드(Mehrabad) 이란 국제공항엔 판매용 외의 여하한 관광홍보물이나 요약된 안내 전단 한 장 발견되지 않았다. 행선지의 관광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여 공항의 안내 창구며 비치되어 있을만한 곳은 다 기웃거렸지만 허사였다. 하긴 오일 산업이 국가 경제를 담당하고 있는 이란으로서야 관광산업이 뭐 그리 대단하랴 싶어 심드렁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1908년 이란에 석유시굴이 첫 시도 되었고 1909년에는 앵글로 페르시아(APOC)가 설립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해군이 독일군보다 우세하였음도, 제2차 대전에서 몽고메리 장군의 영국 제8군이 롬멜 장군의 독일군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격파한 것도 이란의 석유 덕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쨌건 국가예산의 95%가 오일로 충당이 된다니 그들의 풍족한 지하자원이 부럽다.
테헤란에서 이륙한 지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비행기는 쉬라즈의 아이톨라 다스트게입(Dastgheib) 공항에 착륙했다. 피부색이 다양한 관광객이 쏟아져 나온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와 현지 가이드가 우리를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로 안내를 한다. 페르세폴리스를 언급하기에 앞서 아케메니아(Achaemenia) 왕조를 건설한 키러스(Cyrus) 2세(B.C. 559-530)와 다리우스(Darius) 1세(B.C. 522-486)의 군주적 역사를 더듬어봐야 할 것 같다. 페르시아 왕국을 강력한 제국으로 위상을 바꾸어 놓은 그들의 패권주의가 페르시아 문화와 아케메니언 왕조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출연케 했기 때문이다. 키러스가 페르시아 유목민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기까지의 20년간의 족적을 거슬러 가보면 그는 B.C. 550년 페르시아 서북지역의 메디언 (Median)족을 정벌하고 546년에는 흑해와 지중해 쪽으로 진공, 리디언 (Lydian)족을 물리치고 바빌로니언(Babylonian) 왕국을 굴복시켜 539년에는 유대(Jews)민을 바빌론으로부터 해방, 바빌론으로 하여금 파괴되었던 예루살렘(Jerusalem)의 성전을 복구케 했다. 키러스의 대왕다운 치적은 피정복자에 대한 관대한 정책이었다. 전제정치로부터의 해방자라고 당대의 기록이 키러스 대왕을 찬양하고 있다. 캄비세스(Cambyses) 2세(B.C. 530-522)는 이집트를 원정 성공(B.C. 525)했으나 스메르디스에 의해 왕위가를 빼앗긴다. 다리우스 1세의 등장 계기이다. 다리우스는 스메르디스를 죽이고 키러스의 체제를 유지, 키러스와 캄비세스가 정복한 영지를 동서남북으로 더욱 넓혀가며 뛰어난 통솔력으로 페르시아의 통일을 성취한다. 북변 방위를 위해 카스피(Caspian)해, 동쪽으로는 초라스미아(Chorasmia), 소그디아나(Sogdiana), 간다라(Gandara)를 정벌했고 남쪽으로는 페르시안만 연안을, 서북쪽으로는 마씨야(Maciya)와 희랍(Greece)까지를 공격했다. B.C. 5, 6세기 역사지도를 보면 지중해 연안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는 광범위한 고대 문명국들이 페르시안 제국의 아케메니언 왕조에 예속되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자비의 산이라고 불리우는 구헤 라후마드 산자락 125,000m²면적에 높이 8-18m 대기단(大基壇)에 세워진 페르세폴리스……
세상은 온통 은빛이다. 곧장 쏟아지는 햇빛이 너무 강렬하여 눈을 뜰 수가 없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서 있지 않은 기단을 올려다본다. 까마득하다. 높고 멀다는 뜻만은 아니다. 생명체가 기식하고 있을 것 같지 않은 적막감, 관광객이 아무리 우글거려도 그 적막감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안내자의 뒤를 따른다. 목적지에 올라선 일순,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간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바람을 가르고 진격명령을 내리며 치닫는 다리우스 1세의 말발굽 소리가 천둥 번개인 양 요란하게 달려오는 것만 같다. 100개의 우람한 돌기둥(Column)은 몸통이 잘려나가고 파괴는 되었지만 밑동은 고스란히 남아 아케메니언 왕조의 장려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페르시안 제국의 석조문와에 압도되어 몸도 마음도 굳어진 느낌이다.
“개개의 높이가 14m인 100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쳐준 이 홀은 면적이 46,000m²로 왕과 신하들의 회의장소로 이 페르세폴리스에서 가장 넓은 홀이었습니다.” 안내자는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한다. “이곳은 아파다나(Apadana) 궁전입니다. 이 궁전은 계단으로 거울궁전(다치야라)과 이어져 있습니다. 거울궁전의 총 면적은 12,000m²로서 다리우스 대왕의 명령에 의해 창건된 왕의 사적인 궁전입니다. 이 계단 벽면을 보십시오. 정장을 한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의 고관이 번갈아 연꽃을 손에 들고 서 있습니다. 연꽃의 동양적 의미를 아시지 않습니까.”
가이드의 억양이 높아진다. “이쪽을 보십시오. 모두가 손에 공물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다리우스 왕에게 바치는 속국들의 사신들입니다. 맨 앞이 메디아, 다음이 에람, 세 번째가 파루디아 다음이 소구도, 그다음이 이집트, 여섯 번째가 박트리아, 일곱 번째가 드란기아나, 여덟 번째가 아르메니아, 아홉 번째가 바빌로니아 열 번째가 기리기아 열한 번째가 스키다이, 열두 번째가 이오니아 열세 번째가 사마루칸도…” 23개국 사신들의 나라를 줄줄이 설명을 하는 가이드의 표정이 골목대장의 얼굴을 쏙 빼다 박았다. 선조에 대한 자랑으로 신바람이 나서일 게다.
“다리우스 대왕 이래 페르세폴리스는 200년간 (알렉산더의 침공으로 종식) 아케메니언 왕조의 수도로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접은 정치나 경제, 군사적 측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케메니언 왕조의 수도로서 대접을 받았습니다. 아케메니언 왕조는 현재의 하마단을 여름의 도시, 스-사(에람의 수도)를 겨울의 도시라고 특징적 기능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페르세폴리스를 봄의 도시로 명명하였음은 물론 만물이 잠에서 깨어나고 꽃이 피는 그 아름다움의 의미도 있습니다마는 페르세폴리스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식이 치러지는 제의적 도시라는 것입니다. 즉 3월 21일은 춘분입니다. 이란 역(歷)으로는 신년이 됩니다. 그 신년제(新年祭)를 맞기 위해 페르세폴리스는 존재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는 긴장감으로 모두의 얼굴이 팽팽하다. 잠깐 숨을 돌린 가이드가 모두를 바라보며 침통한 얼굴로 다음 말을 잇는다. “알렉산더가 페르세폴리스에 당도하자 무슨 짓을 한 줄 아십니까? 3만 필의 말과 낙타와 노새를 징발, 페르시아의 진귀한 금은보화를 그리스로 실어 날랐습니다.” 알렉산더에 대한 증오심이 가이드의 가슴 속에서 활활 불붙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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