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탐사기

김제영의 ‘페르시아 문화유적 답사기’ (6)

순수한 남자 2010. 11. 14. 18:14

김제영의 ‘페르시아 문화유적 답사기’ (6)
번호 207953  글쓴이 김제영  조회 1209  누리 155 (155-0, 10:14:0)  등록일 2010-10-17 16:15
대문 9


김제영의 ‘페르시아 문화유적 답사기’(6)
아케메니언 제국의 묘 (다리우스 1세∼키러스 2세)

(서프라이즈 / 김제영 / 2010-10-17)


빈부와 계층을 떠나서 지관(地官)에게 명당자리 물색을 의뢰하고 싶은 욕구가 장지(葬地) 문화에 대한 우리의 토속적 정서가 아닐까 싶다. 다리우스(Darius) 1세 역시 아케메니언(Achaemenian)왕조의 영원한 번영을 염두에 두고 낙쉐 루스탐(Naqsh-e Rustam)을 그들 제국의 묘지로 정한 게 아니었을까. 이곳 암벽 동굴묘에는 다리우스와 그의 후계자 세 명이 묻혀있다. 사진을 찍느라고 듣지를 못한 가이드의 설명에 그들의 명단이 언급되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고 관광안내 책자나 기타 문헌에서는 발견하지를 못했지만 크세르크세스 1세 (Xerxes, BC. 486-456), 아루타 크세르크세스 1세(Arta Xerxes, BC.465-424) 그리고 다리우스 2세(Darius, BC. 423-404)가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를 건설한 다리우스 1세(BC. 522-486)와 함께 아케메니언 왕조의 선대로서 그곳에 뉘어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케메니언 캐피탈을 소개한 책자에 제단의 위치가 다리우스 2세의 석관묘의 얼굴에서 약 50야드 떨어진 곳에 마주 서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리우스 2세의 무덤이 이곳임을 명시한 대목이기도 하다. 다리우스 2세 이후의 통치자 아루타 크세르크세스 2세(Arta Xerxes, BC. 404-358) 3세(BC. 358-337)의 묘지도 페르세폴리스 산기슭으로 밝혀져 있다. 아루타 크세르크세스 1세와 다리우스 2세의 사이 1년 간에 크세르크세스 2세 및 야키디아누스(소구디아누스)가 잠깐 등장했다가 물방울 꺼지듯 유야무야 퇴장했다. 이들을 배제한 아케메니언 왕조의 연혁에서 낙쉐 루스탐 석벽 왕가 무덤을 결정하는데 지관역할을 한 다리우스 1세 이후의 집권자들을 순서에 따라 거명하였을 뿐 나의 추측이 빗나갈 수도 있음을 말해둔다.

어쨌던 고대도시 이스타크르(Istakhr)시가 한 눈에 바라다보이는 아케메니언 제국의 암벽 석판묘는 장지문화에서 고찰할 때 전망이 트였고 물줄기의 침투 염려가 없으니 명당자리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곳은 다리우스 1세 이전에 이미 배화교도들의 기도소였느니, 자심했던 외침과 내란에서의 피난처였느니 아란 내의 어떤 구조물 보다도 고고학적으로 격렬하게 논쟁이 제기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낙쉐 루스탐의 석굴 유택을 주목함은 그 용도의 목적 여하에서가 아니다.  페르시안 석조예술에 대한 관심에서이다.

고개를 젖히고 석굴묘의 중앙 절벽을 올려다 보면 흥미있는 부조물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사산조(Sassanian)의 샤푸르 1세 (Shapur, 서기 241-272)가 말에 타고 있고 전쟁에서 잡힌 로마의 우아레리아누스 황제가 항복을 하고있는 장면이다. 시리아 원정의 승리를 묘사한 대목이다. 세계를 정복한 활력의 용솟음이 드라마틱하게 돋음 새겨져 있다. 이 밖에도 사산조 5대 통치자 바흐람(Bahram, 276-293)의 대관식 장면의 무작위적 표현은 우화적 흥미를 일깨우기도 한다. 그러니까 낙쉐 루스탐과 낙쉐 라잡(Naqsh-e Rajab)일대는 아케메니언 제국과 사산조(서기 224-651)가 시공을 뛰어 덤어 석회암 절벽에 마애(磨崖) 조각과 부조로 페르시아의 석조예술을 꽃 피운 페르세폴리스에 버금가는 조각미술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겠다.

아케메니언 시대에서 약 500년이 경과한 사산조 시대에 마무리 된 아케메니언 절벽묘에서 우리는 페르시아의 전통을 파악하려면 사산조에서 아케메니언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속담의 뜻을 알 것 같다. 

다음 행선지는 아케메니언 제국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키러스(Cyrus, BC.559-530) 2세의 궁전터가 파사르가다에(Pasar-gadae)이다. 가는 길에 버스에서 내렸다. 들판 언덕엔 한쪽 모서리가 허물어진 옹성이 보인다. 알라신에게 소원을 비는 기도소란다. 등산을 하듯 모두가 옹성 꼭대기로 올라간다. 회교도가 아닌 우리들은 빌기보다는 사진 찍기에 바쁘다. 옹성에 서니 파사르가다에의 목초지와 유적지가 한눈에 펼쳐진다. 기도시간이 되면 이 고장 사람들이 이곳으로 올라와 기도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메아리친단다. 

파사르가다에의 키러스 2세의 개인궁전 역시 기둥만이 남아있는 폐허이다. 폐허임에도 장중한 느낌의 분위기는 여간 엄엄하지 않다. 키러스 황제의 혁혁한 족적의 숨결인 살아서 꿈틀거리듯 전혀 폐허의 삭막감이 보이지 않는다. 기둥이 우람하기는 비슷하나 색깔도 길이도 다리우스의 아파다나(Apadana)궁전과는 다르다. 페르세폴리스의 원주(圓柱)와 키러스 개인궁전의 둥근 기둥의 현저한 상이(相異)는 기둥의 장식이다. 부조와 조각으로 원주를 장식한 페르세폴리스와는 달리 이곳의 기둥들은 단순하고 밋밋하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정사각형 받침대도 단순하고 밋밋하기는 마찬가지다. 인위의 솜씨를 덧붙이지 않은 그 밋밋한 기둥들에서 스며나오는 기원전의 비문명적 체취가 폐허감을 쓸고 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유행을 했었지요. 샤넬이라고, 그 유행이 이곳에서 기인된 것이랍니다. 불란서의 한 디자이너가 이것을 사진 찍어간 후에 이 부조의 주름치마가 세계의 패션가에 퍼져 나갔다는군요."

가이드의 설명이다. 파괴된 구조물의 한 쪽 벽면에 화사하게 주름치마를 걸친 부조물이 희귀하게 눈에 띄었다.

"이 석조물은 키러스 대제의 무덤입니다. 축대를 쌓아 올린 돌집만 아니었다면 우리 시골 외딴 곳에 숨겨진 듯 서 있는 상여집과 비슷한 느낌 아닙니까. 지붕을 이고 있는 게 봉분 무덤만을 보아오신 여러분들께는 생소하실 것입니다. 이 무덤에는 일화가 있답니다. 아랍군이 침공했을 때 적들이 몰려와 키러스 황제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서슬이 퍼랬답니다. 꾀를 내어 이곳은 예언자 알리의 모친의 묘이지 키러스의 묘가 아니라고 속여서 위기를 모면했답니다. 그런데 마침 무덤 속을 뒤지던 적군의 머리에 키러스의 시신이 떨어지면서 그 아랍군이 죽었답니다. 그 바람에 아랍군이 혼비백산 도망을 쳤답니다."

우리 일행의 인솔을 책임진 가이드 이정자 양의 설명은 정겨웁고 꼼꼼하다. 아케메니언 제국의 유적 답사는 이곳에서 마치었다.

쉬라즈(Shiraz)의 숙소는 호텔 호마(Homa)이다. 모두가 로비에서 얼쩡거리다가 호텔 내의 매점을 기웃거린다. 관광 책자 이외에는 아무 것도 사지 않기로 작심한 지 오래인 나는 매점 대신 프론트 데스크로 갔다. 유네스코가 인류문화유적의 도시로 지정한 쉬라즈의 인심이 궁굼했다.

"방마다 비치되어 있더군요. 예배할 때 이마에 대는 메카의 돌과 무릎에 대는 천 말이예요, 구할 수 없을까요? 이란 여행의 선물로 그것만은 꼭 가져가고 싶어요."

"매점에서는 팔지를 않습니다. 주문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내일 이곳을 떠나야 하니 하는 수 없군요. 아쉽지만 단념을 해야지요..."

돌아서려는데 50대쯤 되어 보이는 사나이가 "잠깐 기다리세요." 하더니 부지런히 서랍을 뒤진다. 서랍에서 찾아낸 앙증스러운 핀을 내게 주며 "우리 호텔의 로고입니다. 가지세요." 한다. 실재하지 않는 날짐승이다. "아주 근사한데요. 고맙습니다." 미소로 답례를 하고 내 방으로 가려는데 그 50대의 사나이가 프론트 데스크에서 이쪽으로 나오더니,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갖고 가세요."  내 방까지 올라와 직접 예배용 돌 (직경 약 3cm)과 포(손수건 크기와 그 두배의 크기)를 건네준다. 

"호텔 호마의 기억이 오래오래 남겠어요. 내게는 가장 큰 선물이예요."

나의 기쁨이 전이가 되었는지 사나이는 흡족한 웃음을 보이고는 내려갔다. 내 룸메이트 안영희 시인이 부러운 눈치이기에, "어쩌면 이 호텔만의 친절이 아닐지도 몰라. 우리 다음 호텔에서 시도해 보자구. 내가 거기서 얻어줄게." 장담을 했으나 다음 숙소인 이스파한(Esfahan)호텔에서는 보기 좋게 거절을 당했다. 지금도 나 혼자만이 선물을 받은 게 안영희 시인에게 개운하지 않은 심정이지만, "...호마호텔에서는 선선히 응해 주던데요. 나 혼자 선물을 얻어서야 되겠어요? 룸메이트인데요, 우리 방의 것 주시면 안되겠어요?" 구걸을 하다시피 하였는데도 "안됩니다."  칼로 무 토막을 내듯 거절을 당했으니 난들 어찌하겠는가.

나이를 먹으면 기운이 쇠퇴하고 허리가 꼬부라지고 자식들 눈치나 보는 것으로 지레 소침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게 슬픈 일만은 아니다. 기실 나는 호마 호텔의 친절이 기독교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불교에서 포교활동을 하듯 이슬람 교도들이 알라신을 위해서 베푸는 일반적인 것으로 간주를 했다. 젊은이 같았으면 체면 때문에 호텔 프런트에서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었겠는가. 나이를 방패 삼은 망령 기가 있었기에 쉬라즈의 호텔과 이스파한 호텔의 인심을 탐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김제영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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