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인간이다”
재벌 2세의 폭력은 결코 용서되어서는 안 된다
(서프라이즈 / 명덕 / 2010-12-01)
민중(民衆)에게 어울리는 적당한 권력과 특권을 주고, 또 권력과 엄청난 부를 가진 자들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은 채, ‘중간에 서서’ 어느 편에도 불편부당하지 않으려 했던 고대 그리스의 정치개혁자 솔론이 “어떤 도시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불의(不義)를 당한 자들 못지않게 불의를 당하지 않은 자들도 불의를 저지른 자들을 벌주려고 나서는 도시겠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부정의를 당한 자는 말할 것도 없이 부정의를 당하지 않고 불의를 본 자들도 불의를 저지른 자들을 벌줄 수 있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이번 폭행사건은 정의와 공정을 넘어 인간의 인격을 파멸하는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우리가 도대체 어떤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공분(公憤)을 일으킨 재벌 2세를 벌주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면 다 되는 사회라 할지라도 이건 정도에 지나치다. 에스케이(SK) 가문의 2세인 최철원이란 자가 한 인간을 야구방망이와 주먹으로 마구 때리고서 ‘파이트 머니’라며 천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던져줬다는 것이다.
매 한 대에 100만 원, 300만 원이라며 제멋대로 값을 정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아직 돈값을 다하지 않고 맞았으니 더 맞아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 밑의 임직원이란 자들이 내뱉고 있다. 인격장애도 유분수지 차마 인간의 말로서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인간 이하의 발언이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다. ‘개 같은 새끼’라고 욕하면 ‘개와 같으니’ 개는 아니라는 말이 된다. 최소한 ‘인간임’은 인정하는 것이니, 이들에게는 인간의 ‘탈’을 악마라고 말해야 한다. 참으로 저런 생각을 하는 놈들은 유치찬란하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랴. 지난번에는 한화 재벌의 회장이란 놈이 제 아들이 맞았다고 가해자를 끌고 다니면 폭행하면서 조폭질을 해댔다. 이건 죽음을 앞세운 공포의 맛을 보여주는 최악의 패악질이다.
진정 이 땅에는 법은 없어져 강한 자의 이익을 앞세우는 논리만 남아 있으며, 정의는 사라지고 강자의 이익만이 정의가 되는 사회가 되고 만 것인가? ‘샤일록’ 같은 놈들만이 이 사회에서 행사할 수 있는 주인 되는 세상이란 말인가? 진정 살아있는 심장까지도 돈으로 사려는 자들만이 마구 행패를 부리는 사회란 말인가? 도덕이니 양심이니 하는 말들은 그저 하찮은 넋두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저 허울뿐인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돈은 수단이지 인간 자체의 목적일 수 없다.
권력도 마침내 시장으로 넘어간 이 시대는, 고대 그리스 서정문학 시대가 배출한 걸출한 시인 알카이오스가 한 말 그대로이다.
‘돈이 인간이네(chrēmat' anēr).
가난한 사람치고 고귀하거나 영예로운 이는 없네’(360)
가난한 사람은 정신적 고상이라곤 없다고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한 인간의 인격을 폭행한 저놈은 빈자(貧者)를 업신여기고 폭행을 가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부에 대하여 통렬한 비난을 퍼붓는 것은 부 그 자체가 아니라, 부에 대한 사회적 부산물들인 것이다. 부가 행사하는 폭력이고, 인격 모독이다. 부가 이 사회 공동체에 뿌려 놓은 온갖 악들, 부정의들, 계급 간에 불러 일으켰던 분열과 미움,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생겨나게 되었던 시민들 간의 부조화와 불평등에 대해 혹독하게 비난하는 것이다.
부가 모든 시민적 가치들, 혼인, 영예, 특권, 평판, 권력에 대한 가치의 전도를 가져오고, 부만이 그 모든 가치를 넘어 승리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표적이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가장 최악은 모든 것은 오직 돈으로 환원되고, 인간을 형성하는 것도, 가치의 기준도 돈이라는 것이다.
부자와 빈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통 속에 살았다고 하는 시노페 출신의 걸인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재치 어린 언변으로 부자와 빈자의 차이를 시니컬한 표현으로 구별해 주고 있다. 점심을 먹을 가장 적절한 때가 언제냐고 질문받았을 때에는 ‘만일 부자라면 먹고 싶을 때이고, 가난하다면 먹을 수 있을 때’라고 답했다고 한다.
물질의 풍요 속에서 디오게네스와 같은 삶을 강요할 수 없겠지만, 물질의 풍요가 가져오는 이기적 욕망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가치의 전도에 대해서는 심각히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덕의 최고의 단계는 가난’이라는 13세기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의 의미를 그냥 무심코 웃음으로 흘려버리기에는 아쉬운 구석이 있기에 한 번쯤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말인 듯싶다.
그래서 한겨레의 사설에서 주장하듯이,
“이런 일을 그냥 넘길 순 없다. 돈 주고 사람을 때린 짓을 눈감고 넘어간다면 무법천지를 용인하는 것이 된다. 법과 국가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돈으로 처벌을 모면하는 일이 되풀이돼서도 안 된다. 엄정하게 수사해서 엄중하게 처벌하는 것이 옳다. 돈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
명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