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야만의 시대] CEO 대통령과 언론, 연평도사태 ‘군사게임’하듯
(미디어오늘 / 고영재 / 2010-12-01)
시인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다. 1967년, 박정희 군부독재가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의 시는 “4.19와 동학농민혁명의 그 순수한 열정은 남고 ‘쇠붙이’는 가라”고 절규한다. 어찌, 시인의 통찰과 영감을 제대로 읽을 수 있으리오. 다만 시의 운율 속에 요동치는 거짓과 위선에 대한 뜨거운 분노를 느낄 따름이다. 민족의 통합에 대한 시인의 염원도 감지된다. 군홧발에 짓밟히는 민주주의, ‘경제개발’ 깃발 아래 유린당하는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분단의 질곡 앞에 고뇌하는 시인의 숨결이 거칠다.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도 ‘알맹이’와 ‘껍데기’의 혼돈, 이미지가 지배하는 현대의 모순에 냉엄한 눈길을 보낸다. 그의 저서 ‘이미지와 환상’은 이미지의 감옥에 갇힌 현대인의 우울한 자화상을 그려냈다. 그 이미지 세계를 빚어내는 대표주자는 물론 언론이다. 언론은 ‘사건’을 보도하고 그 보도는 다양한 이미지를 창출한다. 문제는 보도된 사건만 ‘실재’한다는 데 있다. 보도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은 사건이나 마찬가지다. 독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언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곧 ‘껍데기’의 볼모가 된다. 부어스틴은 언론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준 셈이다. 이 책 역시 공교롭게도 1960년대 출판됐다.
정치·언론은 껍데기 세상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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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골목상가를 방문해 튀김집에서 어묵을 먹고 있다. ⓒ연합뉴스 |
그로부터 40년 남짓, 오늘도 대한민국은 껍데기가 판치는 세상이다. 언론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사회적 목탁’으로서의 언론의 지위는 옛 교과서에만 실려 있다. 정치는 비틀거린다. 국민들은 정치를 믿지 않는다.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내뱉기 때문이다. 껍데기 세상의 두 주역은 정치와 언론이다. 무엇보다 언론의 죄가 무겁다. 언론이 ‘껍데기 정치’를 채찍질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한 터다. 정권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무한권력을 휘두르며 날뛴다.
참말이 사라진 시대다. 적어도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 징표로서의 언론은 없다. 국민이 언론에서 진실을 찾는 시대는 분명 아니다.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 현상은 언론의 죽음을 의미한다. 언론의 침묵과 과장은 위험수위를 넘었다.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한 신문은 한때 ‘할 말을 하는 신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독자들을 유혹했다. ‘진실’과 ‘정의’, ‘정론’은 이른바 조·중·동의 한결같은 다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명박 정권의 독선과 무지, 위선과 거짓에 한없이 너그럽다. 한때 높아진 신뢰도를 바탕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던 ‘국민의 방송’도 국민의 뜻을 저버린 채 ‘MB찬가’를 부르기에 바쁘다.
강은 왜 흘러야 하는가. 고위 관료는 어째서 도덕적으로 떳떳해야 하는가. CEO식 대통령의 독선은 왜 문제인가. 국가 권력의 탈선은 또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불법적인 민간 사찰은 누가 무엇을 위해 저지른 짓인가. 이 헌법 체계를 우롱한 행위에 청와대는 어디까지 관여한 것인가. MB의 유별난 과시욕이 빚어낼 위험성은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가. 최고 권력자는 왜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는가. 부자감세가 가져올 국가재정상의 위험과 국민 사이의 위화감은 없는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지만 ‘강부자’, ‘고소영’ 인사는 정당한가. 4대강 사업 하청공사가 왜 동지상고 출신에 집중된 것인가. MB 정권이 추구하는 일관된 미래전략이 존재하는가. 그 전략은 정교하고 합당한 것인가. 무소불위의 검찰권은 무엇 때문에 최고 권력자 앞에 작아지는가. 주류를 자처하는 언론들은 하나처럼 ‘정권의 문제’를 외면한다. 이는 MB 정권에도 불행이다. 궤도 수정과 자기 성찰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한 터다.
빈 수레 요란하듯, 엉뚱한 호들갑은 언론의 또 다른 병이다. G20 정상회의를 전후해 쏟아진 갖가지 보도와 특집 프로그램은 오히려 그 효과와 정당성을 깎아내렸다. 최근 연평도 사태 보도를 보아도 ‘알맹이와 껍데기’가 뒤집혀 있다. 한반도 문제 해결의 변함없는 전제조건은 평화다. 북한의 도발행위를 분노하고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거기에 있다. 현 사태를 ‘군사적 게임’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흥분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반도 게임은 광저우 아시안게임과는 비교되지 않는 무서운 게임이다. 금메달 과녁을 명중시킨 열여덟 살 소년의 냉정·침착성을 따라가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정치인의 ‘헛말’은 상식으로 통용된다. 정치인들의 말은 언제나 그럴 듯하다. 때와 장소에 따라 적절한 말을 잘도 골라 말한다. 때로는 전혀 마음에 없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표정도 근엄하다. 그러나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 실천 의지도, 노력도 아직 부족하다. 언론의 검증과 비판의 칼날이 무딘 터다. 그 틈바구니에서 이미지와 이벤트 정치, 거짓의 ‘정치마케팅’이 활개친다. 적어도 G20 국가 가운데 정치인의 말에 책임이 따르지 않는 거의 유일한 국가가 한국이다.
자기성찰 박탈당한 MB에 ‘독’
연평도 사태 이후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국에서 ‘병역면제당’ 대표의 한마디 말은 조롱의 대상일 따름이었다. “전쟁이 터지면 입대하겠다.” 그의 결연한 다짐에 네티즌들은 코웃음으로 대꾸했다. 그 뉴스가 실린 포털사이트가 들끓었다. 수천 개 댓글은 대부분 그의 진의를 믿을 수 없다는 노골적인 표현들이었다. 집권당 대표의 말은 솔직한 해명도 진정 어린 각오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거철 재래시장 오뎅 아줌마에게 던지는 정치꾼의 위로의 말에서 국민은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 ‘공정사회론’, ‘녹색성장’, ‘친서민경제’는 그럴 듯한 대언론 홍보자료 제목으로 제격이다. 겉포장에 익숙한 정치, 그 ‘겉포장 정치’를 무비판적으로 조장하는 언론의 야합이 ‘불통’의 시대를 재촉하고 있다.
정치적 진실성에 대한 언론의 검증은 정치발전을 위한 핵심 변수다. 보수언론, 진보 언론의 시각이 다를 수 없다. 언론의 침묵도, ‘용비어천가’도 재앙이다. 거짓말과 위선의 정치 또한 야만사회의 징표다. 시인의 절규는 오늘도 살아 있다. ‘껍데기는 가라.’
고영재 / 언론인
출처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2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