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M. 샌델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음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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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 명덕 / 2010-12-31)
한국을 지배하는 화두가 공정사회이고, 정의이념이다. 근자에 들어 가장 많이 읽힌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이 강조하는 것은, 정의로운 사회에서는‘강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고, 사회는 시민들이 사회 전체를 걱정하고 ‘공동의 선’에 헌신하는 태도를 키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시민들은 연대의식과 상호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가 강조하는 공동의 희생정신이라는 것도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하나의 중요한 덕목일 수 있다. 그래서 센델은 정의로운 사회는‘좋은 삶’을 고민해야 하고, 나아가 ‘좋은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좋은 사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표방하는 좋은 공동체의 모습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좋은 시민들의 공동체는 결국 도덕적 덕(arete)을 갖춘 ‘좋은 시민’을 교육해 길러내서, 좋은 시민들이 함께 어울리는 모듬살이가 되는 ‘좋은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모듬살이에서 인간의 행복이 성취될 수 있다. 나의 독서에 따르면, 마이클 샌델의 <정의에 대한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 주장을 넘어서고 있지 못하다. 공간의 제약상 센델의 ‘정의’에 대한 비판은 내놓을 수 없지만, 최소한 이명박이 내세운 허울 좋은 표어인 “공정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센델은 정의의 문제를 주로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33쪽)으로 보는 정의에 대한 ‘분배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다 분배의 문제에 정의론의 핵심이 놓여 있다면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국가’이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부와 자산은 일정한 ‘법’과 자본주의 원칙과 논리에 따라, 또 자신의 능력에 따라 부의 소유가 주어지고 있으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정의 개념의 핵심이 경제적인 분배보다는 사회적인, 공동체 전체를 지배하는 기본적 정치적 질서체제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cuique suum)’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의 이념은 “단순히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누가 어떻게 대우받는가의 문제와 관련된 것”(장은주 / 61차 참여사회포럼)이다. 그래서 정의와 공정한 사회를 말하려면, 우리 사회가 당장 직면한 ‘부당한 착취나 억압’, ‘자의적인 지배와 모욕’, ‘정당화 될 수 없는 무시와 배제’와 같은 정치적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이 점에서 마이클 센델의 정의이념은 지극히 미국적이다. 미국을 지배하는 가치인 경쟁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은 성립될 수 있어도, 보다 보편적 의미에서의 정의이념에 대한 대안은 될 수 없다. 물론 샌델의 비판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표방하는 공리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공리주의를 이론적 배경으로 성립하는 체제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경쟁과 효율성만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 미국 사회에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결정하는 요소로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은 마이클 샌델의 미덕이다.
아무리 법을 거미줄처럼 총총하게 만들어도 권력과 부를 소유한 '강한 자들'은 그 법의 거미줄에 걸려들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아나카르시스가 성문법을 비난하면서 했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법은 약한 자와 사소한 범죄를 제지할 수 있을지 모르나 부자와 강한 자들은 오밀조밀 쳐 놓은 그 법의 거미줄을 찢어 버리고 나아갈 터이니 말이다. 물론 이 말은 법과 이성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려 했던 솔론을 조롱하는 말이지만, 실상 총총한 법망(法網)에 걸려드는 자들은 오히려 힘없는 자들뿐이다. 이게 바로 법치주의의 약점이다. 그래서 '법은 보다 강한 자의 이익'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로운 것이란 더 강한 자의 이익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테제를 내 놓고 소크라테스에 맞선다. 이 양자 간의 싸움이 플라톤의 영원한 고전 <국가>의 논의를 이끌어 가는 근본적 방향을 결정한다. 요컨대 <국가>란 책의 주제는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트라시마코스의 ‘강자의 이익’은 국가 차원의 정의개념이다. 그가 정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법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정치권력을 쥔 강자가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만든 법을 따르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의의 주체는 법을 따르는‘약자’이며, 강자의 편에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나 약자에게는 해가 되도록 법을 만들거나, 만들어진 법을 마음대로 어기는 행위, 즉 ‘부정의를 행하는 것’이 되고 만다. 결국 그렇다면 정의란 ‘강자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만, 약자에게는 해가 되도록 법을 만들거나 그 법을 마음대로 어기는 행위’가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정의와 부정의는 강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 되고 만다. 소크라테스의 트라시마코스에 대한 논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도대체 정의와 부정의란 것이 강자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법과 정의가 지배하지 않고, 원칙이 없이 힘과 배경 그리고 돈과 권력에 의해 세상이 움직인다고 해보자. 그러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고, 사회 계층 간에 위화감과 양극화 현상이 점점 깊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의가 강자의 이익으로만 간주된다면, 가진 자는 자신이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갖추고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며 살 것이 뻔하다. 약자인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생활의 곤궁함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어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차대한 문제인 다방면에서의 ‘양극화 현상’이 바로 이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나라를 정의가 숨 쉬지 못하는 더러운 욕망으로 가득 찬‘돼지들의 나라’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나라는 오직 끝없는‘경쟁’이란 틀로 짜여진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밀림의 세계와 같다. 여기서는 싸워 이기는 것만이 정의이고 미덕이다. 이게 정글의 법칙이고 정의다. 누굴 탓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능력과 힘이 없다는 것만을 탓해야 한다. 패자는 도태되어야 하고, 뒤처진 자는 가난의 길로 전락해야만 한다. 자식들에게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는 방편과 지식만을 가르쳐야만 한다. 내 자식의 행복만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고, 남의 불행이 내 삶의 기쁨이 되는 사회가 과연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플라톤에 따르면 ‘제 할 일을 하는 것’(to ta hautou prattein)이 어떤 식으로 실현되는 것이 정의이다(<국가> 433b). 다시 말해 국가 수립의 원리인 ‘1인 1업(業)의 원리’에 따라 집단의 각 구성원은 저마다 타고난 본성에 맞는 자신만의 ‘일’ 한 가지를 해야 한다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바로 이 원리가 국가의 기본적 원리로 작동하는 경우에 정의는 “절제와 용기 그리고 지혜, 이 세 가지를 모두 국가 안에 생기게 하는 힘을 주고, 일단 생기면 그것들의 보전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433b)이라 할 수 있다. 이 지혜 용기 절제는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부류가 갖추어야 할 덕이다. 그러니까 ‘1인 1업의 원리’는 국가 정의의 기본원리인 셈이다. 이 원리에 따라 세 부류가 각각 자신에게 맞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정의이고, 이것이 나라를 정의롭게 한다. 반면 세 부류들 사이의 참견이나 상호교환이 국가의 최대의 해악이며, 이것을 ‘악행(惡行)’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다. 이 악행이 바로 ‘부정의’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 세 부류의 역할이 부조화를 이룰 때 생겨난다. 이런 국가는 참된 국가도 건강한 나라도 아니라, ‘병든 국가’가 되는 셈이다. 각각의 부류들이 제멋대로 생활하고 필요불가결한 것들 이상으로 챙기려고 서로 불화를 이루고, 경쟁을 통해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나라를 불러 플라톤은 ‘부풀어 오른 염증 상태의 나라(plegmainousa polis)’내지는 ‘돼지들의 나라(hyōn polis)’라고 불렀다. 이 ‘돼지국가’는 인간 정신(혼)의 욕구적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고 할 때, 이 부분이 적절한 통제를 받지 못할 경우 이 돼지 국가는 사치스러움만을 추구할 뿐이다. 이 돼지국가는 지나친 욕망의 추구에 집착해서 개인적 경쟁의 가치를 우선해서 갖은 자는 더 갖게 되고, 갖지 못한 자는 더 궁핍하게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바로 플라톤이 말한 ‘건강하지 못하고 병든 국가’인 돼지국가인 것이다. 이 사회는 죽은 정의가 판치는 사회다. 허울 좋은 공정 사회가 판치는 사회다. 재벌이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하고 빼앗고, 인권을 좀먹고, 법을 훼손하고, 질서를 무너뜨리고, 법을 집행하는 자가 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하는 사회다. 게다가 지나친 이기심으로 팽배해서 단지 자신의 욕구와 욕망만을 추구하는 사회다. 요컨대 정의는 약자에게만 요구되므로 법을 지키는 ‘정의’는 결국 강자의 이익이 되고 말 것이다. 정작 문제는 이런 돼지국가를 어떻게 정화해서 법과 원칙과 상식이 지배하는 정의로운 국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욕망을 향한 경쟁의 가치를 강조하다보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밀림의 법칙’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재벌이 골목 상권까지 지배하게 된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팔아야 될 물건까지 판매하는 SSM에서 약육강식(弱肉强食) 전형을 본다. 이렇게 되면, 게다가 밀림의 법칙이 지배하게 되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웃을 돌보지 말고, 혼자만 살아남는 훈련만을 시키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특정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아이들을 어린시절부터 시험성적이라는 하나의 지표만으로 줄을 세우고, 획일화된 입학시험으로 옥죄는 교육 방식이 올바른 방법이고, 정의라고 가르쳐야 하고, 이 길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밀림에서 살아남는 길은 양육강식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과연 부모의 경제적 능력으로 한 사람의 장래를 결정짓는 교육구조를 가진 사회가 ‘공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부정의와 부당 경쟁과 기회의 균등이 파괴된 이런 사회에선, 어쩔 수없이 ‘돈이 인간이네(chr?mat' an?r)라는 구호가 우리의 의식 세계를 좌우할 수밖에 없다. 부자의 말과 행동이 곧 정의이고 법이 되고 마는 셈이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치고 고귀하거나 영예로운 이는 없는 것이네.”(알카이오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부정한 사회, 정의가 살아 숨 쉬지 못하고 죽은 정의가 판치는 사회, 독재자본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도 정의와 좋은 사회를 위해 여러 방면에서 투쟁하고 분투노력 하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를 향한 발걸음을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삶’을 고민해야 하고, 나아가 ‘좋은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연대의식과 상호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며 나아가 공동의 희생정신이라는 것이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하나의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돼지국가를 진정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에 적합한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 phronesis)’를 가진 분별 있는 인간을 기르는 사회로 만들어가야만 한다. 프로네시스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만 하는지에 대해 명을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네시스를 가진 인간을 우리는 ‘분별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뒤처진 사람들이 사회를 향해 맹목적 저주의 화살을 쏘아대고, 악에 받쳐 끝내 공동체 구성원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와 복수의 칼을 던지는 불행한 사람들을 우린 어떻게 맞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우린 그동안 내내 이런 불행한 사람들을 수없이 목도하지 않았는가? 도대체 우리가 그들을 도외시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지금도 우리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약소국의 슬픔과 불행이 끝내 끝없는 테러와 폭력으로 강대국을 향해 가해지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사태들이 얼마나 많은 재앙을 가져왔는지도 숱하게 보아왔다. 그 피해를 누가 당했는가? 바로 우리 자신이 고스란히 받지 않았는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맹목적 비난과 저주를 배태하는 경쟁을 만능으로 하는 밀림사회는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건전한’경쟁도 한 사회가 가져야 할 정당한 규범이라면, 양보와 자비 그리고 관용의 정신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귀한 덕목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없는 자나 있는 자나,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잘난 자나 못난 자들이 다 함께 더불어 조화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인간적 미덕을 실천해야만 한다. 이 미덕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친애(親愛) 정신인 필리아(philia)이다. ‘친애와 정의’는 동일한 것에 관계하며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이것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에 대한 이념에서 빠진 가장 중요한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 “왜냐하면 모든 사귐에는 어떤 정의로움도 존재하고 또 한편 필리아(친애)도 존재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같은 배를 탄 사람이나 전우(戰友)를 친구라고 부르며, 마찬가지 방식으로 다른 사귐들에 있어서도 상대편을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사귐이 존재하는 바로 그 만큼 필리아가 존재한다. 사귐이 존재하는 만큼 정의 역시 존재하니 말이다. ‘친구들의 것은 공통의 것(koina)’이라는 속담 또한 맞는 말이다. 필리아는 공통의 사귐 안에 있기 때문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8권 9장; 김재홍, 강상진, 이창우역) 필리아를 길러주는 사회, 진정한 인간 교육을 통한 상호존중의 정신을 길러주는 사회가 바로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린 이런 사회를 희구해야 하고, 지향해 가야만 한다. 공동의 목적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 필리아가 없다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공동의 것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더 가지려고 하는 경우에 공동체는 도덕적 결함을 가지게 되고, 또‘공동의 것’은 돌보지 않으면 망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공동체에게 돌아오는 것은 ‘분열’일 수밖에 없다. (cL) 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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