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박종철 고문치사 밝힌 주역 영광을 가로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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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홈페이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어제(14일)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24주년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결국 전두환 독재정권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된다. 만약 안상수가 없었다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영원히 역사에 묻힐 뻔했었다. 경찰은 박종철 시신을 바로 화장하려고 했지만 안상수는 검시를 했고, 물고문을 인한 사망 사건임을 알게 되었다. 이후 안상수는 한나라당 의원이 되었고, 지금은 한나라당 대표가 되었다. 사람들은 안상수가 없었다면 전두환 독재정권이 1987년 무너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안상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물줄기를 돌린 셈이다. 그런데 -그동안 안상수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드러났다고 다들 알고 있었지만- 그 주역은 안상수가 아니라 최환(당시 서울지검 공안2부장)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조국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트위터에서 “박종철 열사의 기일이 가기 전에 덜 알려진 사실 하나를 밝힌다. 안상수 대표는 종철 사건 수사 덕으로 유명세를 타고 정치인이 되었다. 그가 오늘 종철 추모 행사에 나타났다는 보도를 보았다”고 운을 뗐다. 조국 교수는 이어 “그런데 경찰의 사건은폐를 막은 핵심 주역은 최환 검사(당시 서울지검 공안2부장)이다. 최 부장의 지시에 따라 안상수가 수사를 한 것이다. 최 검사는 공안검사였지만, 나름의 원칙이 있는 사내였다”고 했다. ▲ 조국 교수 트위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알린 주역은 안상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안상수는 그동안 자기만 자랑한 것이다. 최환 검사가 대인배다. 자기 영광을 안상수가 다 차지했는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조국 교수는 또 “80년대 학생 시절 나는 공안검사 최환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경찰의 고문살해라는 사실을 ‘자기 편’이 했다고 덮지 않고 상부의 압력을 버티며 밝혔다는 점을 알게 된 후에는 ‘훌륭한 적’이라고 생각했다”고 추켜올렸다. 최환이야말로 진짜 보수인 것이다. 자기 부하가 영광을 가로챘는데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조국 교수는 이어 “최환은 수많은 공안사건을 수사, 기소한 골수 공안검사로 저는 그 사건들을 잊지도 용납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다만 최환은 다른 공안검사와 달리 종철의 죽음을 은폐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있었습니다.”고 했다. 역사의 진실은 이렇게 밝혀진다. 안상수는 진실을 밝혀라. 만약 최환이 없었다면 안상수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혔을까? 아니 최환이 덮으라고 했다면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밝혔을까? 요즘 안상수 행보를 보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란? 1987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다니던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주요수배자인 박종운(朴鍾雲)의 소재를 알기 위한 참고인이라는 이유로 1987년 1월 14일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에 의해 영장 없이 불법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1월 15일 경찰은 조사받던 박종철이 자기압박(自己壓迫)에 의해 충격사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박종철의 부검의(剖檢醫)였던 중앙대학교부속 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吳演相)의 ‘고문치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이 알려지자, 1월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의 사망원인이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이며 고문에 가담한 사람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2명이라고 다시 발표했다. 그러나 경찰의 정정발표에도 불구하고 고문 가담자인 두 수사관을 참여시키지 않은 채 사건 현장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라는 이유로 비공개 현장검증을 실시함으로써 연행시간과 결정적인 사망 경위, 고문 가담자의 수 등에 대한 의혹들이 그대로 남겨진 채 이 사건의 1단계가 마무리되었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2단계 은폐·조작 경위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끈질긴 추적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8과장 황적준(黃迪駿)의 일기 증언에 의해 드러났다.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자신의 부검소견서가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요청으로 ‘외상 없음’으로 조작되었다는 황적준의 증언은 온 국민의 충격을 자아냈으며, 언론은 최초의 고문 가담자 2명에 대한 경찰간부들의 회유과정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결국 여론의 압력에 밀려 고문치사의 은폐·조작에 관련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임하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비롯한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등 다수의 경찰간부가 구속됨으로써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다음 백과사전)
耽讀
(오마이뉴스 / 이정환 / 2007-04-06)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서문 중 일부다. 이 책을 쓴 사람은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그는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6월의 이름’ 하나를 책을 통해 세상에 공개했다. 한재동. 박종철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는 이부영 전 의원의 편지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숨은 조력자’다. “세상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민주화 운동에 우호적인 교도관들이 많았어요. 위험한 일들을 참 많이 했죠. 필기도구와 종이를 제공한다든지, 신문도 몰래 갖다 줬고, 심지어 외부에 비둘기(비밀 편지를 뜻하는 은어)를 날려주기도 했어요. 그러다 옷 벗은 경우 많습니다. 사실 그런 분들께 민주화의 영광도 드려야 하고, 감사 표시도 해야 하는 거죠. 전병용 씨나 한재동 씨가 그중 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김 전 수석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6월의 숨겨진 이야기’를 전하려 애썼다. 숨은 조력자가 많았다는 것, 그리고 우연 같은 필연이 작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것은 민주화 운동의 의미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는 현실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적지 않은 나이(65세), 하지만 인터뷰는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이런 얘기들을 한재동 교도관이 듣고 그때마다 이부영 씨에게 알려준 거죠. 그래서 사건 전모를 파악하게 된 이부영 씨가 한재동 씨에게 사건 진실을 써서 전해줬고, 한재동 씨가 전병용 씨한테, 그리고 다시 전병용 씨가 나한테 편지를 전해줬는데 이 과정이 참 오묘합니다. 한재동 씨가 원래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부터 이부영 씨와 안면이 있었어요. 이부영 씨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는데, 마침 또 그때 거기 근무하고 있었던 거예요. 누구는 역사의 힘이라고 그럽디다만, 참 어떤 오묘한 섭리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병용 씨에게 제가 편지를 받게 된 과정도 그래요. 그때 우리 두 사람 모두 도피 중이었어요. 연락이 끊겨 있었죠. 문득 전씨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전화를 했더니 ‘꼭 뵙고 싶었다, 어디에 계시느냐’고 해서 편지를 받게 된 거죠. 바로 이틀 뒤에 전병용 씨가 체포됩니다. 만약 그때 편지를 받지 못했다면, 그냥 사장되는 거였죠.” - 교도관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군요.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죠. 그동안 한재동이란 사람의 이름을 공개할 수 없었던 것은 2년 전까지 그 사람이 현직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만약 이름을 공개했을 때, 혹시 불이익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20년 동안 공개하지 않은 겁니다.”
김 전 수석은 이부영 전 의원의 편지와 관련 보도 내용을 종합해 세상에 진실을 알릴 준비를 했다. 문제는 ‘전파 방법’이었다. “하늘이 전두환 정권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할 정도의 진실. 국회의원도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정의구현사제단에 부탁하게 되는데, 김 전 수석은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보이지 않는 손’을 느꼈다고 한다.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기념미사에서 발표하기로 했어요. 문제는 ‘누가 발표하느냐’였죠. 결국 그동안 힘든 일, 궂은 일을 맡았던 김승훈 신부에게 다시 한 번 부탁하기로 했어요. 헌데 함세웅 신부가 성명서를 갖고 찾아갈 때마다, 김 신부 어머니가 곁을 떠나지 않는 거예요. 이걸 발표하면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일인데, 도저히 함 신부가 얘기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갔다 돌아오고, 돌아오고 했어요. 그런데 (기념미사 하루 전인) 1987년 5월 17일에도 어머니가 옆에 계셨는데 나가시면서 ‘내가 어제 좋은 꿈을 꿔서 비켜주는 거야’ 하고 말씀하시더랍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함정에 빠진 김 신부를 어머니가 어떻게 꺼내줄까 걱정하고 있는데,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서 손을 잡아 올려주는 꿈이었다고 해요. 참….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 양반(김승훈 신부) 돌아가시고 나니까 참 마음이 애련합디다.” - 선생님도 두려웠을 텐데요. “물론 두려웠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랬어요. 왜냐하면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 ‘반공 경찰’이란 큰 흐름이 완전히 꺾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 뭐, 빨갱이 잡고 하는 걸 자기 사명으로 생각하는 아주 전투적인 극우주의자들도 있지 않겠어요? 테러나 납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죠.” 당시 독재 정권에서 이른바 ‘반공 경찰’과 맞선 사람들은 검사‘들’이었다. 당시 서울지검 형사부 검사로 박종철 고문 타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안상수 한나라당 의원이란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 전 수석은 다른 의견을 내놨다.
“‘안상수 씨가 부검을 결정하고 지휘했으며, 부검에 입회했던 황적준 박사가 진실을 얘기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지금 이렇게 돼 있죠. 그런데 2005년이었어요. 박종철 사건 당시 부장검사였던 최환 씨가 장문의 팩스를 보내왔어요. 내용인즉 1월 14일 저녁에 남영동 대공분실 형사들이 서울지검 공안부에 찾아와요. ‘시체를 가족들에게 인계하도록 지시해 달라’고 말이죠. 가족을 설득해서 빠른 시일 안에 화장하고 종결 처리하려고요. 뭐, ‘우리 다 한통속 아니냐’는 생각이었겠죠. 그때가 저녁 7시 40분이었는데 학원 담당 검사가 퇴근한 뒤였어요. 공안부에는 최환 부장검사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갔더니, 글쎄 이 사람(최환 씨)이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신병을 처리하라고 지시하고 퇴근해 버린단 말이죠. 남영동 형사들로선 복병을 만난 거죠. 항의해도 안 되니까 치안본부에 보고해요. 당장 최환 씨한테 밤중에 ‘왜 네가 그러느냐, 해달라면 해주지’ 하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고위 당국자는 물론 중앙정보부 당직자, 그리고 나중에는 청와대 같은 곳에서까지. 그래도 최환 씨가 버틴 겁니다. 다음날,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냐 (갑론을박했고), 헌데 서로 안 맡으려고 하고. 결국 타협안이 형사부 당직검사였던 안상수 씨가 실무를 맡고 최환 씨 지휘를 따르라, 이렇게 된 거예요. 부검 결정도 최환 씨가 했고요. 안상수 씨에게 ‘나중에 책임 문제가 따를지 모르니 철저하게 입회해라, 부검 소견을 문서로 받아놔야 한다’는 지시를 내려요. 그래서 안상수 씨가 소견서를 받아놓게 된 겁니다." - 적어도 부검에 이르는 과정에서 최환 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그런데 안상수 씨, 자기가 아주….”
오랜 이야기에 목이 답답해졌는지 김 전 수석이 갑자기 기침을 시작했다. ‘잠깐 쉬었다, 계속하자’는 말에 그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박종운 씨 이야기로 화제를 바꿨다. 박종운 씨는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보호하고자 했던 학교 운동권 선배. 2004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던 박씨는 지난 1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시장 경제를 지키고 북한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종철이의 정신을 올바르게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철이란 후배가 죽어서 온 세상이 떠들썩한데, 당시 얼마나 죽을죄를 졌는지 모르지만, 얼마나 엄청난 혁명 과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때 박종운이 나타나는 게 인간적으로 옳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 앞에 솔직하고 경건하게 나타났다면, 국민 여론 때문에 맘대로 구속도 못 시켰을 것이고, 재판 가더라도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섰을 거라고 봐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죠.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터뷰에서 북한 민주주의를 이루고 시장 경제를 이룩하는 것이 박종철 역사의 뜻을 잇는 길이다? 아니죠. 그전에 먼저 메시지가 있어야죠. ‘나는 어떻게 보면 박종철을 죽인 사람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고인의 뜻에 맞게 사는 건지 생각하며 하루하루 조심스럽게 살고 있다’는. 그런데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설사 자기 심정이 그렇다고 해도 처신을 신중하게, 또 신중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하라고 얘기하고 싶은 심정이죠. 박종철의 죽음이 어땠습니까? 그 사람은 민주화를 위해 태어났고 민주화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한 꺼풀씩 한 꺼풀씩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이 있었고, 마치 민주화가 성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처럼, (박종철은) 일정 간격으로 그때마다 부활해서 국민의 분노를 폭발케 했어요. 그렇게 해서 자기의 진실도 밝히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도 이룩하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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