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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은 8월 중으로 친일 부역자 4천 명 정도의 명단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뉴스앤조이 신철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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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편찬을 앞두고 1차 명단을
발표한다. 광복 60주년인 올해는 일본의 역사 왜곡과 일부 인사의 망언으로 여느 때보다 친일 문제가 논란이 된 해였다. 광복절을 한 달 앞두고
명단 발표에 국민들의 관심이 모아진 지난 7월15일, 한성대학교 총장실에서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을 만났다.
윤경로
위원장은 올해부터 한성대 총장을 맡게 된 것을 비롯해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 기독교사회책임 공동대표, 기독교역사연구소장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내년에는 1차 명단의 사전 편찬을 위한 집필 작업에 들어가고, 2차 친일 명단 발표를 위한 조사 활동을 시작해 2007년 말에
사전편찬 작업을 마무리한다. 아래는 윤 총장과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 친일인명사전 명단
1차 발표를 앞두고 있다. 날짜는 확정했는가.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60년 동안 못 풀던 친일 문제를 이제
역사화해야 한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국민들의 성원과 지원으로 5년 동안 준비해온 것을 1차로 발표한다. 8월 15일과 8월 29일에
발표하는 안을 두고 협의하다가 8월 29일에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친일 청산 문제는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는 성격이 있기 때문에 광복절보다는
국치일에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두고, 어떤 이는 너무 늦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역사 판단에 맡기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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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위원장은 친일 부역자 명단에서 빠지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셈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
뉴스앤조이 신철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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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에서야 친일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만시지탄의 감이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정부가 새로 구성된 당시에 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친일했던 사람들이 다 살아 있었고 이승만 정권이
일제시대에 부일했던 인사들을 권력과 통치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친일 청산이 어렵게 됐다. 그 뒤 친일 문제를 거론했지만 인맥과 정치성이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에 와서야 가능하게 된 것이다. 벌써 60년 전에 했어야 할 일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여건 때문에 이제야 하게 된 것이다.”
- 반대하는 편에서 항의는 없었나. 또
우려하는 점은 없나.
“그동안 친일 청산에 반대하는 측에서 항의 전화를 많이 받았다. 이제는 한 고비 넘겼다. 오히려
친일 청산을 지지하는 편에서 반발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4000 명 정도 발표하게 되는데 여기서 빠지게 될 경우 면죄부를 주는 셈이 된다.
또 박정희나 김성수, 김활란 등을 명단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이견이 있다. 엄격한 기준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 친일파 연구에 대한 논문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친일 연구는 인색하고 게을렀다. 30여 년 동안 역사를 연구하면서 친일과 관련된 논문은 최근에야 몇 편
썼다. 시민운동에 관계하면서 일본의 역사 왜곡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우리는 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 스스로 침략당할 수밖에 없었던 내부 결점을 돌아보면서, 허물의 역사도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젊은 학자들이 넓고 깊은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지난 학기에는 대학생들이 친일 청산의 목소리를 크게
냈다.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는가.
“기성세대 입장에서 부끄러운 마음이 있다. 친일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 시대에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 논리를 가지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일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다 친일한 것 아니냐,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겠느냐, 왜 지나간 일에 매달리느냐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역사를 고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또
역사학자로서 민족과 역사,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한다.
저항의 역사는 열심히 연구하고 가르치고 했는데, 이제는
부끄러운 허물의 역사, 실패의 역사도 밝혀내야 한다. 그래야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하는 인식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러면 다시는 역사적 과오를 저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존경하는 인물로 알았던 사람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홍보하면서 우리 민족의 아픔과 어려움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 충격과 반작용이 나타난 것으로 본다.”
- 대표적으로 이화여대의 김활란 총장, 연세대 백낙준 총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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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위원장은 교회를 향해 분열을 멈추고 민족 분단을 극복하는 일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 뉴스앤조이
신철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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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를 발전시키고 근대화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한글 보급과 여권 신장 면에서 큰 기여를 했고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도 앞장섰다. 3·1운동 때까지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0년대 들어 문화 정치에 함몰되면서 민족과 역사 문제에 개량적 입장으로 바뀌게 됐다. 현실에 순응하면서 회절하고 부일한 역사가 나타나게
됐다.
1938년에는 신사참배가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가 행위라고까지 선언했다. 친일한 한국 교회와 더불어 백낙준 김활란도
제외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학교를 지키기 위해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한국 교회는 지금 사회로부터 여러 문제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교회가 앞으로 큰 역할을 감당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긍정적
역할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 때부터 정치적으로 경도되어 일제 시대와 비슷한 정교 밀착이 일어났다. 또 불의한 권력에 정치적으로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1970~80년대 산업화하면서 한국 교회가 외형적으로 발전하고 세속적 가치관과 결합해 교회의 물신주의가 축복 개념을 왜곡시킨
점은 반성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이념을 초월한 사랑과 공의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의 평화 사랑을 말하면서도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지 못하고 교회가 그 아래에 있기도 했다. 한국 교회는 반공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보수 교단측에서는 용공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과제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향한 화해와 협력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 한국 교회와 기독교 지도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분열을 조장하고 극복하는 일을 그만두고 민족 분단을 극복하는 일에 한국 교회가 기여하고 참여하지 않으면 훗날 역사적으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선교 목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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