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칼테러의 토양은 폭력 휘둘러도 봐줄 거란 착각
(데일리서프 / 노혜경 / 2008-9-11)
9월 9일은 나의 생일날. 새벽 방송을 마칠 때쯤 젊은 직원들이 스튜디오 문을 불쑥 열고 들어오더니 초코파이 한 상자와 와인 한 병을 들이밀었다, 소리없이 금붕어 입을 하고 노래도 불러주었다. 웃느라 마지막 멘트도 건성건성 하고, 방송국 앞 밤새 하는 호프집에서 간단히 생맥주 한 잔 하자, 그러면서 앉았다.
평균 연령 스물다섯 살, 아직 솜털도 다 벗겨지지 않은 나이에 생의 신산고초를 다 겪은 청년들이 해맑은 얼굴로, 내 생애 가장 이른 시간 열린 생일축하파티를 해주었다. 행복한 시간. 그런데 문자 두 통이 날아들었다. 병원, 부상, 조계사 어쩌구 하는 두서없는 문자.
실감이 나질 않았다. 무슨 일인지 가늠이 안 되었다.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되지 않았다. 서둘러 자리를 파하고, 택시를 불러 조계사로 갔다. 나를 맞이한 것은 훅 끼치는 피비린내. 피의 바윗돌처럼 뭉쳐진 젖은 침낭과 소 한 마리 잡은 자리마냥 흥건히 고인 아직 굳지도 않은 피, 피, 피였다.
언론에는 거의 나지 않은, 회칼테러 또는 식칼테러로 포털에서 검색해보면 조금씩 나오는 그 사건의 현장은 그랬다. 참혹하다기보단 어이없는. 무슨 일인지 실감이 잘 나질 않은…. 정확한 공식명칭은 조계사 식칼 난동.
세 사람이 목을 베였다. 단순히 칼에 찔린 것이 아니다. 일본군이 독립군의 목을 베듯이, 망나니가 천주학쟁이의 목을 치듯이 칼로 목을 그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뒷목을 친 다음 다시 앞이마에 칼을 깊숙이 박아넣었다. 그는 칼을 뽑는 수술을 받긴 했으나 사경을 헤매고 있다.
경찰은 만취해서 벌인 일이라고 하고 범인도 언쟁 끝에 화가 나서 그랬다고, 취해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증언자의 말은 다르다. 술냄새도 나지 않았고 말도 또박또박했으며, 자려고 눕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언쟁을 유도한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논쟁을 피하고 자겠다고 하는데도 계속 말을 유도한 다음, 범인이 칼을 가지고 올 때까지 사람들을 일으켜 앉혀 놓았고, 살상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본 다음 사라졌다는 것이다. 테러를 당한 세 사람은 그동안 명동에서 뉴라이트의 실상을 알리는 사진전을 주도해 온 사람들이며, 그날은 조계사에 피신해 있는 수배자들을 보호할 겸 조계사 앞 우정총국 공원에서 노숙을 하려다가 참변을 당했다.
이들을 잠자리에서 일으켜 언쟁을 유도한 사람은 자칭 전직교수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뉴라이트의 논리를 옹호했고, 칼을 휘두른 사람도 미국쇠고기보다 한우가 문제다라고 주장했단다.
경찰은 우발적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렇게 홍보하고 있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을 무시하는 점이나 내가 지켜보는 사이에 벌어진 경찰의 현장 훼손--현장은, 우발적인지 계획성인지를 알려줄 단서가 될 만한 범인의 동선과 사라진 전직교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증거들이 깔려 있는 장소다, 그 장소를 청소를 해버리고 모든 것을 둘둘 말아 쓸어담아 가 버렸다. 감식을 위해, 현장의 모든 증거를 다시 점검하기 위해 가져간 것이 아니란 점은 요즘은 다들 미드 CSI를 보기 때문에 금세 알 수 있다--은 의심을 자초하는 행동이다.
뒤늦게 놀라 달려간 사람들에 의해 현장 물품들은 회수되었지만, 피에 푹 젖었던 침낭은 사라졌고 엉기기 시작하던 피로 두껍게 고였던 피의 띠--세 사람의 앉은 자리를 이어주던 그 기다란 피의 냇물은 사라졌다. 그냥, 자리 바닥에 흘린 피를 대충 닦은 다음 남은 흔적만.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뒷목이 아파져 오기 시작한다, 앞이마에도 무언가 박힌 듯이 무지근하다. 흡사 내가 당한 듯이 아프고 괴롭다.
이것은 테러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고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을 알리고 뉴라이트의 실체를 폭로한 사람에게 가해진 백색테러. 이 정권은 이 사건을 미미한 개인이 저지른 우발적 사건으로 처음부터 간주하고 시작하고 있다. 사람들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백색테러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모든 백색테러가 그 즉석에서 백색테러로 밝혀지지 않듯이, 이번 사건도 냄새가 폴폴 나는 그런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알 수 없다. 우발적 사건일 가능성도 높다. 아니, 나는 진심으로 우발적 사건이길 바라고 또 믿는다. 식칼 난동, 그렇다, 개인의 난동이다. 그래야만 지금까지 우리가 발전시켜온 역사가 가치있게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 범인이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칼을 휘둘러 죽여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공안당국의 태도 그 자체가 백색테러를 발생시키는 토양이란 점만은 지적해야 한다. 촛불에는 무자비하게 정권과 가까운 사람들의 전횡에는 너그럽게. 이렇게 법의 정신과 집행에서 보여주는 경찰의 무원칙하고 과도한 대응이 무지한 자들로 하여금 나도 폭력을 써도 같은 편이니까 봐줄 것이라는 오해와 착각을 낳는다.
촛불 초기에 진보신당 당원들을 향해 특수임무수행자회가 저질렀던 테러. KBS 앞에서 뉴라이트가 저질렀던 각목 폭행들이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라. 형평성이라곤 없는 오직 편 가르기의 공권력만이 있을 뿐이다. 경찰이 나서서 촛불엔 저래도 된다는 생각을 주입한 셈이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권력을 대신하여 내가 응징한다"라는 유사 백색테러가 난무하는 토양이 되는 것이다. 멀쩡히 경찰이 지키고 있는 속을 유유히 칼을 들고 진입할 수 있었던 범인의 정신상태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경찰은 우발적인 범행 어쩌구 서둘러 발표를 하기에 급급하기보단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는 그 사라진 전직교수의 행방을 찾는 일을 포함하여 범인의 주변과 범인의 활동영역을 조사하여 모든 것을 엄중히 밝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사람들은 끝까지 의심을 풀지 못할 수도 있다. 경찰은 그러나 스스로의 진정성에 기대어 미래를 바라보고 그렇게 해야 한다. 누가 범죄의 피해자가 되든 상관없이 억울한 자를 보호하고 범죄자를 엄중 문책하는 법의 정신을 지킬 때에야 비로소 추락한 공권력의 위상이 조금이라도 회복될 수 있다. 이번이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아직도 나는 경찰을 믿는다. 수사권 독립을 요구하며 마음속의 촛불을 들던 그 수사형사들을 아직도 나는 믿고 또 믿는다.
ⓒ 노혜경/시인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1&uid=163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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