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에서 배운 것 없는 국군 장교들 - 역사에서 과연 뭘 배웠는가?
(사람사는 세상을 위한 시애틀모임 / 나그네 / 2010-12-03)
군에 가서 나와 신분이 같은 병들과 생활하기 보다는 장교들이 더 많은, 정확히 말해서 모든 병과의 장교들이 다 모여 있던 사무실에서 살다 보니, 그들의 대화하는 것이나 사고방식에 대해서 더 심도 있게 관찰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 일 년쯤 지나고 나니, 그들 대부분이 전사, 즉 전쟁사에 대해서 참으로 무지 혹은 무관심하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지어 한국군의 장교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국전쟁이나 월남전에 대해서도 권력이 만들어 놓은 도식적이고 상투적인 내용 외엔 알고 있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한국전 초기의 패전이 오직 탱크가 없어서였다는 설명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이가 없었다.
이러니, 일을 하면서도 영문자료를 번역만 해주면 끝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인용구나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만 이해가 가는 특정한 단어의 의미를 설명해줘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장교들은 내가 그들보다 더 전쟁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놀라움을 표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실 내가 전쟁사를 정말 잘 알았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뜻을 물어보고 설명을 더하라고 요구를 하니, 나도 나름대로 도서실과 각종 자료들을 뒤져서 그에 대해 대비를 했던 것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내가 가끔씩 접촉할 수 있었던 미군의 장교들은 달랐다. 그들은 웬만한 전쟁사에 대해선 최소한의 기본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 변화마다 이를 적용하고 응용하는 데 써먹곤 했다.
내가 읽은 니미츠 제독의 전기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니미츠가 아직 영관 장교 시절 집에 돌아와 모처럼 고등학생이던 큰딸의 역사숙제를 도와주게 되는데, 하필 딸이 골라온 과제가 1차대전 최대의 해전 유틀란트 해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딸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니미츠는 식탁 위의 스푼과 각설탕과 접시들을 총동원해 장장 2시간에 걸쳐서 유틀란트 해전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 두 시간의 열강(?)이 끝나자, 딸은 미소를 지으면서 "아빠, 제가 필요한 건 고등학교 역사과제물이지, 해군대학의 논문이 아니에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만큼 니미츠의 설명은 치밀하고도 자세한 것이었다. 사실 니미츠는 해사시절 이과계열이었고 이후 경력에서도 기관담당으로 잠수함에서 잔뼈가 굵었던 전형적인 공학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사에서 특히나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던 유틀란트 해전을 여전히 2시간이나 딸에게 상세하게 설명할수 있을 만큼 기본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
니미츠의 전기를 쓴 포터의 평가에 따르면 당시 니미츠의 이러한 면모는 그만의 비범함이 아닌 애너폴리스 해사를 졸업한 미 해군 장교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군은 전쟁사를 모르는 장교가 승진을 하거나 진급을 하거나 좋은 보직을 얻기는 매우 힘들다. 그리고 이 모습은 해군이 아니라 미 육군도 마찬가지였고 아울러 서구 대부분의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표준적인 모습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적어도 2차대전에 참전했던 장교그룹 중 일본군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요컨대 군사학은 법학과 마찬가지로 실용의 학문이고 그 바탕이 되는 것은 지나간 사실들의 기록이다.
영미 법학의 기초자료가 판례이듯이 서양 군사학의 기초는 전쟁사에서 시작된다. 그런데도 미군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는 우리 군의 간부들은 놀랄만큼 전쟁사에 대해서 무지했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지만. 하긴 전쟁사를 잘 안다고해서 직업군인인 장교들의 초미의 관심사인 진급이나 승진 보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질 않으니, 누가 그걸 굳이 알려고 하겠는가? 게다가 닥치고 반공, 때려잡자 김일성 외엔 별로 필요치 않았던 대한민국 군대에서 누가 사치스럽게 전쟁사를 논하려 했겠는가?
그런데,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되고 21세기 선진국을 지향한다는 지금도 우리군 돌아가는 꼴이 여전하다면 그건 좀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최근 우리군의 심각한 이상 징후는 여기에서도 원인이 있는 것 아닐지?
연평도가 두들겨 맞았다고 서부전선 육군의 군단에서 급조해서 빼 온 온갖 첨단장비들을 줄줄이 배치하는 걸 보면 지금 우리 군 특히 육군의 간부들은 도서방비의 기본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태평양 전쟁 시기 내내 일본군은 외곽 도서에 혹독한 맹훈련을 시킨 정예부대를 투입하고 섬을 요새화하면 지상군만으로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철저한 오산이었다.
요컨대, 섬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상군 자체보다는 해군과 공군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했고 이미 전쟁 초 웨이크 섬의 전투에서 미드웨이 과달카날의 혈전에 이르기까지 섬을 지키려면 지상군 그 자체보다는 그 후위의 해군과 공군력에 좌우된다는 것을 보여준 지가 벌써 반세기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4킬로 길이도 안 되는 7 평방 킬로의 쬐그만 연평도에 시가 수백억짜리 MLRS와 같은 최첨단 군단포병용 화력을 다른데도 아닌 최전방에 배치한다는 것은 저들 대부분이 섬을 지키는 기본 전략이나 전술에 대해서 과거의 전쟁사에서 배워본 적도 없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아닐까? 아무리 국민여론이 따갑고 강력한 모습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인다고는 하나, 병법의 기본과 전술의 기초를 무시해서 될 일인가?
연평도와 같은 최전방 서해 5도를 지킨답시고 서부전선에서 매우 귀중한 첨단 장비와 지원 화력을 빼낸다면 그야말로 밑돌 빼서 윗구멍에 얹는 격이고 그로 인해 생길 방어의 구멍은 또다시 새로운 도발을 야기할 수도 있건만...
난 요즘 군대의 장교들은 잘 모르니 억측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 군부가 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노라면 여전히 우리 군대는 전쟁사를 제대로 간부들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는 게 분명해 보인다. 태평양 전쟁사를 한 줄이라도 제대로 음미했다면 저런 어설픈 짓은 할 수가 없다.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기억하지 않는 민족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고 난징의 강간을 쓴 역사학자 아이리스 장은 자신의 대표작 맨 첫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공허하기 짝이 없는 권력과 군의 수사는 과거 자유당 이승만 정권 시절 "전쟁이 나면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연상케 하고 있고 여론의 눈과 권력상부의 재촉이 자심하다 하여 전략전술 상 하지하의 배치를 강행하는 모습은 한국전쟁 초 야전전술의 기본을 무시한 축차 투입 강행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작금 군과 이명박 권력의 행태는 지나간 과거의 전쟁사에 대해서 너무도 무지한 집단이 드러내고 있는 우왕좌왕 안절부절 행보에 다름 아니다. 애초부터 제대로 된 전쟁사 교육이 선행되었다면 연평도 피격은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현대전에서 지나간 과거를 제대로 교육받아, 깊게 생각하고 냉정하게 분석할 줄 모르는 지휘관은 제아무리 최첨단의 무기와 정예의 병력을 손에 쥐여준들 절대로 맡은 바 임무를 해내지도 못하고 전쟁에서 승리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군의 주요 지휘관들과 장교들은 과연 지나간 전쟁에서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미래에 활용할 생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싸움이 나면 무턱대고 앞으로 나가 싸우기만 하면 되는 게 군대일까? 바로 그 짓거리 하다가 일본이 나라를 말아먹었던 덕분에 우리가 독립할 수 있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 맹목적이었던 쇼와 일본군대의 흉내를 낸다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은 국망과 국권 재상실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제발 대한민국 군이여, 전쟁사 책 좀 들여다 보고 공부 좀 해라.
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