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거부반응 증후군. |
번호 138959 글쓴이 내과의사 조회 1984 누리 1002 (1027/25) 등록일 2007-10-20 11:30 | 대문 22 톡톡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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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이저 건' 사고실험(思考實驗) ' 테이저 건'이라는 보안장비가 있다. 쉽게 말해 사정거리가 늘어난 전기충격기이다. 바늘 달린 전선을 멀리 쏘아 보내는 총인데 맞은 사람은 총에 내장된 전기장치에서 발생되는 고압전기로 인해 '지옥의 쓴맛'을 경험하면서 무력화된다고 한다. 물론 단점도 있다. 사정거리가 잘해야 10여 미터 이내라는 점,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단발총이라는 점이다. 당신이 만약 방범용으로 테이져 건을 구입했다고 치자. 집에 좀도둑이 들어 현금 백만원 가량을 훔쳐서 도망간다. 놈을 쫓는 와중에 갑자기 '저기 유영철이 도망간다.'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공교롭게도 희대의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재판도중 탈출하여 당신이 쫓는 좀도둑 쪽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당신이 겨눈 '테이져 건'의 조준 시야에는 좀도둑과 유영철이 나란히 잡혀 있다. 사격 기회는 한번이다. 당신이라면 누구를 쏘아 맞추겠는가. 유영철을 잡는다면 당신은 피같은 당신의 현찰을 잃게 될 것이다. 반면 좀도둑을 잡는다면 당신은 돈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도주한 유영철로 인해 언젠가 누군가는 병적 연쇄 살인의 피해자가 될 것이다. 피해자는 당신의 누이나 딸이나 아내가 될 수도 있다. 물론 확률은 그리 크지 않겠지만. ' 놈현스럽다.' 말속에 스며있는 사회병리학. 놈현스럽다 - 기대를 저버리고 실망을 주는 데가 있다. 요즘 말많은 '개이버'인가 '네이버'인가를 검색해보니 이렇게 나와 있다.(놈현스럽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제대로 알았다.) 사람들은 대통령 노무현에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였길래 그리도 실망을 느꼈을까. 관점을 바꾸어 생각하자면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놈현스럽다.'는 말은 과연 정당한 기대가 충족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지극히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실망일까. 테이져 건을 든 사람이 자신의 사소한 개인적 이익을 침범한 좀도둑을 정당방위 차원에서 공공의 적 유영철보다 우선 해서 쏴버리는 것은 고유한 선택이다. 도덕적으로 탓할 수는 있어도 법적으로 응징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공권력인 경찰에게 유영철보다 내 돈 털어간 좀도둑을 먼저 잡아야 된다고 윽박지르는 것은, 또 그런 나의 요구를 묵살한 경찰을 직무유기 죄로 고소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염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라고 배웠다. '테이저 건'의 단 한번 사격기회를 좀도둑을 잡기 위해 사용했다면 나는 백만원 현찰을 놓치기 싫어서 공공의 적을 모르쇠한 시민으로서의 직무유기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누구도 법적으로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가령 나의 전재산이 백만원이었다면 그것은 충분히 정상참작이 가능한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반면 나의 월수입이 1억이라면? 누가 뭐래도 나는 개자식이 되는 거다. 염치의 상극개념은 '뻔뻔함'이다. 몰염치, 혹은 파렴치라는 단어도 해당되겠다. 좀도둑을 잡아도 쪽팔리기 싫고 오히려 그것이 지극히 잘한 일이라고 인정받고자 하는 심리이다. 그러한 심리충족을 위해서 모순과 불합리를 '보편적 가치'로 인식시키는 왜곡은 필수조건이 된다. 좀도둑 대신 유영철을 잡은 개인은 바보 등신으로 조롱하고, 경찰은 무능한 공권력으로 경멸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야 월수입 1억인 내가 돈백만원 찾기 위해 공공의 적 유영철보다 좀도둑을 우선순위로 해치운 행동이 현명하고 똑똑한 민주시민의 권리 수호 행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이전 50년, 대한민국의 독재정치 전통은 국민들에게 '언제나 우리는 선량한 피해자.'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중들에게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제공된 반대급부라 할 것이다. '선량한 피해자.'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박정희의 17년, 전두환의 7년을 용인한 대한민국 시민들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잔인한 가해자.'이다. 나머지 절반의 진실은 여기에 있다. 언제나 선량한 피해자라는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노무현에게 걸었던 기대는 공공의 적보다 자신들의 사소한 이익을 좀먹는 잡범들을 먼저 잡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재산 100만원인 사회적 약자들이 좀도둑을 먼저 잡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월수입 1억인 자신들에게도 똑같이 공평하게 적용해달라고 강요한 것이었다. 같잖은 기대에 대한 상식인의 대응은? 그것이 바로 노무현이 보여주었다던 소위 '놈현스러움'이다. 말은 제대로 하자. 노무현은 한번도 '놈현스럽지' 않았다. 정말로 '기대를 저버리고 실망을 주는 데가 있는' 종자들은 다름 아닌 유치한 신조어를 궁리해낸 바로 그 인간들이다. 백원짜리 하나 던져주며 '초코파이 두 개랑 우유 하나 사오고 잔돈 20원 남겨와.'라는 군대고참의 명령 아닌 폭력과 '놈현스럽다.'라는 말을 낳았다는 사람들의 기대. 나는 양자간에 차이를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다. 노무현 거부반응 증후군. 백혈병에 대해 현대의학이 현재까지 찾아낸 궁극적 해결책은 골수이식이다. 혈액암인 백혈병의 원인이 혈액세포를 생산하는 공장인 골수가 불량 암세포를 찍어내는 데에서 기인하므로 골수를 깨끗하게 밀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건강한 골수를 주입하는 방법이다. 한마디로 바이러스 먹은 컴퓨터를 완전히 새로 포맷하고 윈도우 시스템을 다시 깔아주는 작업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컴퓨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바로 거부반응이다. 새로 들어온 골수는 분명히 자신을 죽음의 마수에서 구해주는 구원군임에 분명하지만 몸을 구성하는 다른 시스템들은 새로운 골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몸을 외부의 미생물이나 유독 인자에서 보호해 주는 면역계가 거부반응의 주범이다. 골수이식 자체도 무척 어려운 첨단 의학 기술이지만 이식 후 거부반응과의 기나긴 싸움 또한 골수 이식 버금가는 최첨단 의학 기술이 집약되어야 하는 분야이다. '정동영이 이긴 게 아니라 이해찬이 졌다.' 인정하기 싫든 좋든 이 말들은 소름끼치는 진실이다. 백혈병에 걸린 대한민국. '노무현 모델'이라는 골수이식을 선택한 것은 필연이었지만 그에 따른 거부반응 역시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부반응을 이끄는 것은 우리 몸에 언제나 존재하여 왔던 면역반응과 일맥상통하는 '놈현스럽다'라는 말속에 스며있는 사회병리이다. 정동영을 인정하든, 문국현, 김혁규, 강운태등을 대안으로 끌어 붙이든, 서프의, 서프앙에 의한, 서프앙만의 노무현 계승정당을 만들든 노무현 거부반응 증후군에 대한 대책이 빠져 있다면 그 어떤 방법론도 노무현 모델을 대한민국 사회에 인스톨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는 이식 거부반응에 대한 고려 없이 컴퓨터처럼 포맷으로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로스쿨에 얽힌 이해관계의 충돌. 로스쿨 정원이 1500명 선으로 결정되니까 대학들이 깽판치며 들고일어났다. 한마디로 너무 대가리 숫자가 적다는 거다. 파업에 준하는 집단행동을 저지르는 중인가 보다. 대학의 속셈은 뻔하다. 한마디로 투자를 졸라 퍼부었으니까 장사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거다. 정원이 지금보다 두 배, 세 배가 된다고 하여도 학생들은 로스쿨에 몰릴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대학원 개념이므로 입학금과 등록금도 장난이 아닐 거다. 한마디로 대학입장에서 로스쿨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다. 대학은 로스쿨 졸업생들의 진로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지들 책임질 몫이 아니니까. 따라서 과연 대한민국 사회에서 법조인의 적정 수는 얼마가 되어야 하는지, 그에 따른 로스쿨 정원의 규모는 어느정도가 타당한지에 대한 정책적 마인드도 대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손님받고 보자는 심보만 가득하다. 여론의 향배는 어떨까? 당연히 대학 편에 설 것이다. 판사, 검사, 변호사, 일단 꼴보기 싫다. 이놈들 희소가치가 떨어지면 개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앞선다. 그리고 로스쿨의 직접적 수요자들인 학부모와 학생들도 문이 넓어지는 쪽을 선호할 것이다. 결론은 대학의 장삿속을 알면서 모르쇠하게 된다. 그리고 정책적 결정을 법조인들의 밥그릇 지키기 집단 이기주의의 로비라고 규정한다. 1500명이라는 정원. 과연 합당한 규모인지, 터무니없이 적은 규모인지 나는 모른다. 문제는 정원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충돌이 어떤 식으로 해결되느냐 이다. 대학의 장삿속, 기득권이라 할 법조인들에 대한 질시와 그 진입장벽을 뚫고 내 자식을 법조인 만들겠다는 부모의 욕심.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기존 법조인들의 이익수호의지. 결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없는 마인드들의 충돌. 이러한 마인드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는 진정 합리적인 해결책에 공정하게 손을 들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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